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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47화 (147/463)

147화

수년간 연마한 기예를 총동원해도 쓰러지지 않던 괴수가 휘청댄다.

똑바로 서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다리가 풀리는 걸 주체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맹렬히 타오르던 붉은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야 효과가 나타났구나···!’

기적?

아니, 이건 기적이 아니다.

마른 비 본인이 계획하고 준비한 함정이니까.

하지만 마른 비에게는 이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늪 거머리!’

달리 부를 표현이 없다.

독림의 늪에서 자생하는 놈들은 강력한 독물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했고, 독이 없는 대신 거머리 특유의 흡혈을 더욱 발전시켰다.

은밀하고, 집요하며, 탐욕스럽다.

자신의 몸무게의 20배까지 피를 빨아 배를 채우며, 놈들의 침에 함유된 성분은 피가 응고되는 걸 막는다.

독처럼 신체에 이물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피를 빠는 게 전부이기에 검치호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었다.

〔왜, 왜 갑자기 몸이? 뭐냐, 이것들은···?!〕

늪에 가본 적이 없는 검치호가 거머리에 대해 알 리 없다.

마른 비는 거기까지 계산했고, 검치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독물들을 먼저 달려들게 만든 다음, 놈을 늪으로 유인했다.

귀찮을 뿐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미물들.

거머리들이 달라붙는 걸 느꼈음에도 가만히 놔둔 검치호의 실수였다.

“크하항!”

검치호는 자연기를 발산해 몸에 달라붙은 것들을 전부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미 빠져나간 피가 돌아올 리 없었다.

괴수가 또 한 번 비틀댔다.

“어지럽지? 숨이 가쁘고, 몸도 무겁고. 피가 부족하면 그래.”

〔이, 이런 것들이 어떻게 내 외피를···?!〕

“생채기 났잖아. 첫 함정에 빠졌을 때.”

마른 비가 자연기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통나무에 찍혔고, 나랑 싸우면서 상처도 났지. 네 가죽을 뚫고 들어간 게 아냐. 상처 부위에서 피만 빤 거지. 그놈들, 피 냄새가 나면 머리 꼭대기까지도 타고 올라. 뭍에서도 한참을 버티는 지독한 놈들이거든.”

덫이 발동됐다.

거머리들을 활용하기 위해 안배한, 이중삼중의 덫.

하지만 고작 피를 뽑아낸 정도로 검치호를 거꾸러뜨릴 순 없다.

한 번 더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별비야! 도와줘!』

놈이 비틀거리는 틈.

절호의 기회다.

쓰러졌던 별비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 있었다.

백호의 앞발에 막강한 자연기가 응축됐다.

“크아아앙!”

망할 자식.

이거나 먹고 뒈져라!

시커먼 어둠을 가르는 다섯 줄기 하얀 궤적.

석림의 제왕에게 전수받은 비기다.

남의 기술을 배워놓고도 ‘붉은 발톱’이란 이름은 죽어도 쓰기 싫다고 박박 우겨서, 결국 ‘하얀 발톱’이 된 비운의(?) 기예였다.

콰앙!

마른 비가 가만있을 리 없다.

종으로 날아가는 별비의 공격에 맞춰, 횡으로 기동한다.

번갯불을 발동한 청년이 하얀 발톱과 만나는 순간, 눈부신 십자포화가 검치호를 덮쳤다.

“크허헝!”

까불지 마라!

갑작스런 이상 증세에 당황했을 뿐, 네깟 놈들에게 밀릴 것 같나!

부아아악!

기술이고 뭐고 없다.

오로지 힘과 자연기만으로 밀어붙이는 야수의 발톱이 열십자로 날아드는 기의 응집체를 깨부쉈다.

쿠콰카카캉!

귀청을 찢는 굉음이 터지고, 후폭풍이 독림을 휩쓴다.

공격을 상쇄한 검치호가 한숨 돌리는 순간!

마른 비가 괴수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휘리릭―

두터운 팔뚝이 검치호의 목을 옥좬다.

오른팔로 목젖 부위를 압박하고, 왼쪽 팔뚝이 접히는 부위를 오른손으로 잡아 고정시켰다.

왼손은 위에서 검치호의 머리를 내리누르니, 괴수의 숨통이 서서히 조여들기 시작했다.

검치호의 등에 배를 밀착한 채 양다리로 몸통을 휘어잡은 마른 비가 얼마 전에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뱀 조이기.’

대망이 별비를 압박하던 모습.

근육을 한계까지 팽창시키고, 철골에 자연기를 흘려 넣어 상대방을 붙든다.

우드드득― 소리와 함께 검치호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오래는 못 버텨···!’

이빨과 발톱이 닿지 않는 사각에서의 조이기.

힘이 약한 인간이 맨손으로 맹수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도 평범한 맹수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지, 이런 괴수를 상대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

원래 계획대로 추가적인 피해를 덧씌울 때였다.

『다들 이리 와! 내 말을 들어!』

또 한 번 독림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언령에 이끌린 독물들이 끌려 나오고, 검치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마른 비를 떼어내기 위해 날뛰던 검치호가 주둥이를 벌렸다.

〔학습능력이 없는가! 한 번 실패했던 짓을 되풀이하다니!〕

검치호가 포효를 터뜨리려는 순간!

“으아아아!”

범의 앙심을 발동한 마른 비가 검치호의 목젖을 감은 팔뚝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으드드득―

“크, 커···!”

검치호는 포효를 터뜨리는 데 실패했고, 새카맣게 몰려든 독물들이 괴수와 청년을 감쌌다.

『별비! 넌 거기서 대기해!』

스아아악―

마른 비는 별비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언령을 회수했다.

정신을 차린 독물들이 주위를 에워싼 적들을 인식했다.

“······?!”

시아악―!

꾸루룩!

크롸롸라!

푸화하아악!

독림 한복판에 치명적인 절독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흡···!”

예전에 한 번 겪어 봤지만, 정말 지독하다.

아니, 그때는 피부에 닿았을 뿐 독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진 않았었다.

그럼에도 마른 비를 죽음 직전까지 몰았고, 설검대의 정예들을 한 줌 핏물로 녹여버린 독이다.

마른 비가 검치호를 사냥하기 위해 준비한 두 가지 함정은 피와 독이었다.

〔놔, 놔라! 이놈···! 같이 죽자는 거냐!〕

『아니, 난 버틸 수 있어. 아마도.』

섞인 독들이 다르니 성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독기의 절대치는 비슷하다.

그리고 마른 비는 이미 한 번 이겨낸 경험이 있다.

강고히 쌓아 올린 내부의 방벽.

마른 비의 내독성이 신체에 침입한 독기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쿨럭, 큭···!”

그럼에도 치명적인 건 변함없다.

자연기가 독기를 몰아내야 하는데, 모든 기운은 검치호를 붙들어두는 데 쓰고 있다.

마른 비의 안색이 보랏빛으로 물들 때.

‘그것’이 깨어났다.

화아아악―!

애뢰산 지맥에서 습득한 자연기의 정수.

주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침입자에 맞서 청정한 자연기가 들불처럼 일어난다.

원래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녹여야 할 그것이 위기를 맞아 눈을 뜨고 있었다.

‘이, 이거 대단해! 이토록 순정한 기운이라니!’

전신을 일주한 기운이 독기를 남김없이 불태운다.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제 색깔을 찾는 건 한순간이었다.

독기를 몰아낸 기운은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잠잠해졌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검치호를 압박하는 팔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크, 카아아앙!”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독무 속에서 마른 비가 자연기의 정수를 일깨웠듯, 위기를 맞이한 검치호도 내재된 힘을 끌어냈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죽음의 위협.

고대의 괴수가 육신에 깃든 잠력을 격발시켰다.

“크하항!”

훌쩍 뛰어오른 검치호가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땅을 향해 등부터 내리꽂는 추락.

검치호의 무게에 깔린 마른 비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아아악!”

비아야! 괜찮은 거냐!

독무의 바깥에서 대기하던 별비가 외쳤다.

시커먼 독 구름 바깥으로 튕겨 나온 마른 비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안개처럼 퍼지는 독무를 뚫고, 괴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크, 르랑··· 카항···!”

‘저놈······.’

뚝뚝 끊기는 호흡.

검치호는 딱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붉게 빛나던 눈동자는 보랏빛이 섞여 기괴한 색을 띠었고, 다리는 몸체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푹푹 꺾인다.

하지만 서서히 몸을 똑바로 세운다.

이 지긋지긋한 야수는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별비야! 바로 가야 돼! 저놈이 기운을 차리기 전에!”

“크하항!”

알고 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간다!

아까 타격을 주었던 그곳.

힘차게 날아오른 별비가 휘청대는 검치호의 목덜미를 노렸다.

하얀 섬광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괴수의 눈이 번쩍였다.

『어린 것! 나대지 마라! 너보다 강했던 너의 아비도 나에게 죽었다!』

퍼어어억!

어떤 생물도 버텨내지 못했던 일격이다.

검치호는 이번에 휘두른 앞발로 별비를 죽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키이이잉―

인간과 연을 맺은 야수.

인간의 기예를 습득하고, 자연기의 섬세한 운용을 터득한다.

그리고 마른 비와 별비는 지난 2년간 와족 역사상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던 발상을 시도했다.

검치호의 앞발에 맞아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물 사이로.

별비의 전투화장이 빛을 발했다.

“크아아아앙!”

얼굴을 때린 놈의 앞발을 물어 그대로 들어 올린다.

별비가 고개를 휘젓자 검치호의 육중한 몸체가 통째로 들렸다.

후우욱― 콰아앙!

놈을 거꾸로 내리꽂고,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 제압한다.

푸르게 타오르는 눈으로, 별비가 재촉했다.

비아야!

마지막 기회다!

놈이 힘을 되찾기 전에 끝내야 해!

『응. 알고 있어.』

마른 비는 이미 집중하고 있었다.

지그시 감은 눈과 둥글게 모은 손.

청년의 감각은 자연기의 실체를 더듬고 있었다.

‘기억해 내. 난 이미 두 번이나 경험했어.’

화통달이 기를 다루는 것을 보았고, 너른 하늘이 펼친 서리불꽃을 느꼈다.

그들이 구현한 기적 같은 기예들.

가슴 앞에 모은 마른 비의 손에서 영롱한 광구가 번쩍였다.

‘내 손에 담는 거야. 천지를 뒤흔들었던 대자연의 기운을!’

떠올려라.

그 강렬했던 순간을!

상상하라.

내 몸에 깃든 무한의 기운을!

그리고, 창조하라.

숙적을 꿰뚫을 필멸의 무기를!

우르르릉―

횡으로 번지는 손길을 따라 날카롭고 길쭉한 형상이 떠오른다.

상상이 곧 현실이 될지니, 마른 비의 손에는 2년 전 점창과의 전쟁에서 보았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오직 검치호를 쓰러뜨리기 위해 창안한 마른 비만의 기예.

“뢰창(雷槍).”

콰르르릉―!

우레의 기운을 담은 천공의 창이 현세에 재림한 고대의 재앙을 꿰뚫었다.

“크, 커······ 커헝!”

목구멍을 뚫고 지나간 우레의 창은 검치호의 내부에서 강렬한 폭음을 터뜨렸다.

공기의 입자까지 분해하는 굉음의 파동이 괴수의 장기를 산산이 부순다.

푸르른 전광이 어둠을 밝히고, 뇌성이 독림을 떨쳐 울리니, 애뢰산에 새로운 제왕이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나, 나는······!〕

검치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누구도 모를 일이다.

마른 비는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경련하는 괴수에게 다가간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은빛여우 형이 아니었다면. 독물과 거머리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지맥이 건네준 자연기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길 수 없었겠지. 인정해. 적이지만, 넌 정말 대단한 놈이었어. 잘 가라.”

퍼어억!

마침내 사냥이 끝났다.

검치호의 눈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눈물 때문일까?

무척이나 후련할 줄 알았는데, 마른 비는 복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크와아아앙!”

별비만이 애뢰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를 터뜨리며 승리를 만끽했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독림 속에서.

가슴에 쌓인 한을 날려버리듯 별비는 길게, 길게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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