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우드드득.
검치호의 상징.
마른 비는 기형적으로 길고 커다란 두 개의 송곳니를 뽑았다.
하나는 은빛여우에게, 또 하나는 아버지에게.
인간을 해친 괴수를 사냥한 전리품을, 자신을 가장 염려해준 두 사람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싸우면서 느꼈지만, 검치호의 송곳니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기술이 정면으로 수차례나 들어갔지만, 금 하나 가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성장을 고대하고, 무사히 귀환하길 간절히 기도해준 이들.
그들에게 줄 선물로써 이보다 좋은 건 없을 듯했다.
“고생했어. 별비야. 이제 형에게 가자. 너의 가족과 실바람을 추모하고, 형을 데리고 돌아가는 거야.”
“······.”
한을 토해내고, 승리를 만끽하던 별비는 어느새 조용히 마른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크르릉.”
시간이 됐군.
별비가 가만히 한숨을 쉬며 그르렁댔다.
“시간? 무슨 시간?”
“가릉.”
네가 쓰러질 시간.
그 순간, 마른 비의 몸이 경련하더니 무릎이 풀썩 꺾였다.
‘왜···?! 아, 전투화장!’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기력과 전신을 엄습하는 통증.
손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 마른 비는 그대로 풀썩 엎어졌다.
덮쳐오는 수마가 눈꺼풀을 끌어 내렸다.
“크르르르······.”
고생했다. 비아야.
기절하기 전에 들어라.
그 은빛여우라는 인간······.
그는 이미 죽었을 거다.
‘무, 무슨 소릴···!’
가물거리는 시야가 닫히며, 별비의 울음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일단 아무 생각 말고 푹 자라.
일어난 다음에.
그 후에 마음껏 아파하자.
피이이잉―
무언가가 끊기는 감각을 끝으로, 마른 비의 의식이 닫혔다.
재회
휘이이잉―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이 육신을 난자한다.
끔찍한 냉기가 뼛속까지 스미고, 자연기는 바닥을 드러냈다.
눈과 얼음뿐인 대지.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진 여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추워······.’
피투성이가 된 노을은 간신히 눈을 떴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진 흰 수리와의 사투.
매리설산의 주인인 하얀 깃의 새끼는 강했다.
노을과의 목숨을 건 싸움 끝에 놈은 결국 각성을 이뤘고, 그때부터는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의 나날이었다.
겨우 우위를 점한 힘의 차이가 단박에 뒤집혔고, 사냥꾼이던 노을은 졸지에 사냥감이 되어 쫓겨 다녀야 했다.
그렇게 1년.
말 그대로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 끝에 노을은 결국 힘의 우열을 다시 뒤집고야 말았다.
‘그때······ 끝냈어야 했나.’
너무 지긋지긋해서 흰 거머리라고 이름 붙인 하얀 깃의 새끼.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마주쳐서일까?
언제부터인가 노을은 녀석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아니,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녀석을 반려수로 삼기엔, 상정했던 목표가 너무 높아 성에 차지 않았을 뿐.
‘하얀 깃.’
빠드드득.
죽어가면서도, 노을은 이빨을 갈았다.
분노? 증오? 원한?
아니다. 분했기 때문이다.
노을은 녀석을 압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신의 힘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는 점이, 너무도 분했다.
하얀 깃의 새끼를 쓰러뜨린 날.
녀석의 굴복을 받아냈던 그날에, 노을은 마치 운명처럼 휘감기는 인연을 느꼈다.
할아범에게 들은 게 맞다면, 눈앞에 있는 녀석이 자신의 반려수가 분명하다.
힘이 센 녀석일수록 저항도 거세다고 들었건만.
죽일 듯이 싸우던 때의 기억은 모조리 잊어버렸는지, 흰 수리는 더없이 따뜻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미안.’
하지만 고민하던 노을은 녀석을 외면했다.
마음은 지금 당장 돌아서서 녀석을 끌어안으라고 말하지만, 이를 꾹 깨물고 돌아섰다.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피부는 트고 갈라지다 못해 흉하게 굳어 버렸다.
독수리 발톱에 찢기고 패인 상처가 온몸을 메웠다.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한 채 오직 힘을 키우는 데만 몰두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부족 최초의 여족장.
그 원대한 꿈을 위해서였다.
결심을 되새긴 노을은 그대로 하얀 깃에게 걸어갔다.
‘하아아앗!’
넘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꺾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고유의 이름이 붙은 맹수의 벽은 아득하게 높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노을은 어떻게든 어떻게든 도망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설마··· 하얀 깃 저놈. 나를······ 봐주고 있는 건가?’
의심이 추측이 되고, 추측이 확신에 이르렀을 때.
끝을 모르던 노을의 투지도 꺾였다.
간절히 꺾고 싶은 상대에게 수십 번이나 목숨을 적선 받았다는 점.
자존감이 높은 만큼 좌절도 컸다.
노을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다.
항상 그래왔지만, 모든 걸 내던질 각오로 최후의 도전장을 내민다.
이번에도 패한다면, 자신의 그릇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노을은 시리도록 아픈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발 쓰러져! 이 괴물아아아!’
결과는 참패.
스스로도 놀랄 만큼 녀석을 몰아붙였지만, 결국 발톱에 채여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이 꼴이었다.
‘후후. 결국 이 정도구나. 이렇게 될 걸 왜 그렇게 악을 썼을까······.’
투지가 꺾여서일까?
아니면 죽어가는 육체가 마음까지 약하게 만든 걸까.
흘러내린 눈물이 소스라치게 차갑다.
휘몰아치는 칼바람 속에서, 노을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족장님. 할아범. 매서운 눈, 우둔한 땅 아저씨. 산이 오빠. 걸음이 오빠. 여울이 언니. 그리고······.’
비아.
비아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바보 멍청이가 웃는 얼굴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어릴 적 부모를 잃은 자신에게 꾸밈없고 편히 다가갈 수 있는 비아는 친구이자 형제요, 가족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지만.
‘비아야, 건강한 거지?’
그 바보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여전히 방향을 못 찾아서 이상한 곳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성년식이 거의 끝나 가는데, 반려수는 찾았을까?
한 번이라도 내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열 받네.’
안 했겠지.
그 둔해 빠진 머저리는 아마 내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을 거다.
아직 이성에 눈을 뜨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괜찮은 여자를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 멍청이의 눈을 독수리 사냥으로 콱···!
‘절대 죽을 수 없어!’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은 간절히 보고 싶은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고 갈망한다.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그것은 삶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는 가장 훌륭한 연료였다.
‘확인해야겠어. 그 멍청이가 내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겠다!’
오직 힘만을 바라보며 보낸 3년이었다.
지금 이 순간,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을은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산다. 무조건 살아나갈 거야! 난 혼자가 아냐.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었어!’
눈 속에 파묻혔던 노을이 기를 쓰고 위로 기어올랐다.
피가 얼어붙은 손이 새하얀 눈을 짚었을 때!
화아아아악―!
빛이 일어났다.
강렬한 열망. 그리고 자연기.
삶을 향한 노을의 의지에 응답하듯 푸른 대자연의 빛이 골짜기를 채운다.
겨우내 쌓인 눈이 봄을 맞아 녹듯 꽁꽁 얼었던 몸이 거짓말처럼 풀리고 있었다.
“······?!”
빛은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노을이 파묻혔던 곳.
푸른 이끼처럼 흩뿌려진 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것······ 음애고설(陰崖古雪)?!”
그믐 할아범이 준 한족들의 서책.
세상의 귀한 물품과 영약, 영초들을 수록한 책에는 ‘그늘진 낭떠러지 아래 오래된 눈’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허황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빛을 내는 눈은 서책에 적힌 내용과 일치했다.
수백 년? 어쩌면 그 이상?
고산지대에 위치한 설원에는 음기가 집약되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고 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걸쳐 축적된 음기는 가장 깨끗하고 차가운 눈에 깃들며, 설원의 정수를 고스란히 간직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아무리 헤매도 찾을 수 없으며, 설령 찾는다 해도 ‘선택’받은 인간이 아니면 취할 수 없다고 했다.
‘다 좋아. 그렇다고 쳐. 근데 이게 왜 하필 여기에?’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오르면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곳.
마지막으로 하얀 깃에게 도전한 날, 녀석에게 얻어맞고 추락한 깊은 골짜기.
하필 자신이 떨어져 내린 곳에 전설상의 음애고설이 있었다?
이게 우연이라고?
펄럭, 펄럭.
벼랑의 꼭대기.
저 높은 곳에 날개를 접은 설산의 주인이 내려앉았다.
음애고설이 빛을 발하는 순간, 하얀 깃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시. ‘차가운 눈’이 그대를 선택했군.〕
붉은 발톱에게 의지를 전달받은 마른 비가 그랬듯, 노을도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러나 노을은 마른 비와 달리 금방 평정을 찾았다.
“놀··· 랍네! 자연기를 음파에 싣는 건 같지만, 언령과는 미묘하게 달라. 희한한 기술을 쓰는구나, 너.”
노을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푸른 기운이 노을의 신체에 빨려들 듯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차가운 눈의 주인이 그대일 거라 짐작했다. 힘은 약하지만, 굽힐 줄 모르는 투지. 내가 그대를 살려둔 이유다.〕
“약하다······. 살려뒀다······. 처음 말 섞는 건데 상당히 마음에 안 드네, 너.”
어떤 인간이 설산의 주인 앞에서 이토록 당당할 수 있을까.
재밌는 건 하얀 깃이 노을의 그런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점이었다.
〔그대가 온 이후, 설산이 무척이나 떠들썩했지. 차가운 눈을 탐내지 않고 순수하게 힘을 찾아온 자. 그대와 함께 한 시간은 나에게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차가운 눈, 그러니까 음애고설을 탐낸다고? 혹시 네가 예전에 원시림에 접근했던 소수부족들을 죽였던 게 그것 때문이야?”
〔그래. 그들은 감히 나의 영토를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차가운 눈을 찾고 있었지. 설산의 흰 수리들은 차가운 눈을 지키다가 설산이 선택한 생명이 나타나면 인도한다. 오래도록 이어져 온 우리의 사명이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얀 깃이 인간을 해친 게 그것 때문이었다니.
아니, 그전에 어떤 존재가 있어 흰 수리들에게 음애고설을 지키라는 임무를 부여했단 말인가?
명민한 노을도 갑자기 듣게 된 내용에 혼란을 느꼈다.
“누가, 누가 그걸 명령한 거야?”
〔명령? 그건 옳은 표현이 아니다. 내가 누군가의 명령을 들을 것 같은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핏줄에 각인된 본능이라고 표현함이 옳겠지.〕
“대체··· 왜? 자격이 있는, 그러니까 설원이 선택한 인간에게 음애고설을 넘기기 위해서? 너희가 그러기 위해 존재한다는 거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리의 존재 이유가 그것인 건 맞지만, 그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