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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49화 (149/463)

149화

“인간만이 아니라고? 분명 서책에는···!”

〔설원의 선택이 인간에 한정된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오래전에 한 인간이 차가운 눈을 얻었다는 것? 오히려 다른 생물들이 선택받은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알려주고 싶군.〕

“······그렇구나. 인간이 저술한 책이니까, 다른 생물이 음애고설을 얻은 건 알 수가 없었을 거야.”

노을이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얼굴로 하얀 깃을 올려다봤다.

“꼭 인간과 대화하는 것 같네. 단어 선택부터 화법까지, 웬만한 인간보다 나아. 내가 아는 어떤 멍청이보다 네가 훨씬 지적이야.”

굳이 그 멍청이의 이름까지 댈 필요는 없다는 게 노을의 생각이었다.

“근데 그런 이유로 인간을 해친 거라면 예전에 족장님이 방문했을 때 설명하지 그랬어? 그럼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노을이 휑하게 비어 있는 하얀 깃의 발톱을 바라봤다.

혹시 기분이 나쁠까 싶어서 반응을 살폈지만, 하얀 깃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를 말하는 것이군. 애석하게도 그는 나의 의지를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가능하더라도 나는 시도하지 않았을 거야.〕

“응? 왜? 아···! 너 족장님과 싸워보고 싶었구나?”

눈치 빠른 노을은 하얀 깃의 속내를 간파했고, 하얀 깃은 멋쩍은 어조로 대꾸했다.

〔부정하지 못하겠군. 맞다. 그대의 말이.〕

“그래서 어땠어? 엄청 세지? 우리 족장님?”

노을이 은근히 자랑하는 투로 물었다.

신체의 일부를 잃은 대상에게 할 말은 아니었으나, 하얀 깃도, 노을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맹수이고, 전사였으며, 강자와 싸우다가 입은 부상쯤은 웃어넘길 배포가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강했다. 진실로 놀라운 인간이었지. 나약한 인간의 육체로 그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그는 이 운남에서 전무후무한 존재일 것이다.〕

“맞아. 그런 분이지.”

노을이 팔짱을 끼고 끄덕였다.

“아, 그럼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네 말에 따르면 설원이 날 선택했다 그거야? 그래서 음애고설이 나한테 반응한 거고? 단순히 뛰어난 사람을 고르는 거라면 족장님이 오셨을 때 반응했을 텐데, 왜 나지?”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하얀 깃의 어조에 흡족함이 묻어났다.

〔역시 그대는 영리하군. 이야기가 빨라. 선택 여부는 단순한 능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가운 눈을 지키는 사명을 부여받았듯, 대자연이 선택한 자 또한 업을 짊어지게 된다. 그에 적합한 자가 선정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업? 업이라니? 어떤···?”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다.

심신이 정갈하다던가, 성장 가능성이 높다던가, 자연에 밀접하다던가.

기껏해야 그 정도의 선택 기준을 짐작했는데, 난데없이 업이라니?

노을은 음애고설로 자신을 안내한, 정확히는 발톱으로 걷어차서 낭떠러지로 추락시킨 저 흰 수리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모른다.〕

“······뭐야. 장난해?”

한참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다가 모른다고?

노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대자연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항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운남에 닥친 재해를 막는다던가, 닥치는 대로 생물을 죽이는 악수를 토벌한다던가 하는. 나 역시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 대자연의 뜻까지는 짐작하지 못한다. 선택받은 자 또한 때가 무르익어야만 알 수 있겠지.〕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자신은 그저 하얀 깃을 꺾기 위해 평소처럼 산을 올랐을 뿐인데, 뜬금없이 기연을 만나더니 업이니 사명이니 하는 감도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노을이 머리를 쓸며 말했다.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음애고설을 그냥 주는 게 아니라는 거지? 결국 나한테 ‘부탁’할 게 있고, 그걸 이루는 데 도움이 되도록 힘을 준다는 거잖아. 한마디로 거래네. 그치?”

〔······왠지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구나.〕

“좋아. 받아들이겠어.”

노을은 선선하게 결정했다.

“나는 힘이 절실해. 잘못된 방식이 아니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조건?〕

하얀 깃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자연의 선택을 받고, 설원이 축적한 자연기의 정수를 얻는 일이다.

영광된 일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굉장한 득이 되는 일일진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설원의 선택을 받은 생물은 많았지만, 노을 같은 반응을 보인 개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노을이 생각하기에 이건 자신이 제안을 받은 입장이었고, 그렇다면 원하는 바를 하나쯤 요구하는 건 문제 될 게 없다고 여겼다.

자신이 매리설산에 오른 목적!

살다 보면 뻔뻔해져야 하는 순간이 있고, 노을은 그게 지금이라고 믿었다.

“그래, 조건.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하얀 깃! 너, 내 친구가 돼라!”

〔거절한다.〕

칼바람 부는 설원에 어울리는 칼 같은 거절이었다.

“······야. 거절하는 건 네 맘인데, 좀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그렇게 단박에 거절하면 숙녀의 여린 마음에 상처가 난단 말야.”

노을은 어느새 성년식을 떠나기 전의 여유와 장난기를 되찾고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생긴 변화다.

아니, 지금도 그 마음은 같지만, 보고 싶은 이들을 떠올리자 마음의 공간이 훌쩍 넓어진 느낌이었다.

〔말하지 않았나. 나에겐 이곳을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흰 수리들의 수장인 내가 설산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리고 그댄 이미 그대의 인연을 알고 있다. 마음의 이끌림을 외면하지 마라.〕

“마음의 이끌림······.”

노을의 눈이 하얀 깃의 옆으로 돌아갔다.

징글징글하게 싸우며 정이 든 흰 수리.

하지만 자신은 녀석을 외면하고, 하얀 깃을 원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끈을 느끼지만, 이제 와서 날 봐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삐이익―.”

설원의 바람을 거스르는 유연한 선회.

원을 그리며 하강한 흰 수리가 깊은 골짜기에 내려앉았다.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털.

노을의 키의 두 배는 될 듯한 비조가 따스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너······.”

아무 망설임도 없이 자신에게 날아온 흰 수리.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노을은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울컥했다.

“알잖아. 난 너를 외면했었어. 그래도 내가 좋아?”

“삐익.”

“······어떤 멍청이완 다르게 여자 보는 눈이 있네.”

크게 심호흡을 한 노을이 흰 수리에게 손을 뻗었다.

“네 아빠 진짜 못됐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알면서 지난 2년간 우릴 그렇게 막 굴린 거야?”

〔그건 그대와 그 녀석을 단련시키기 위해···.〕

“눈치도 없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끼어들지 말라고 좀 전해 줄래?”

하얀 깃이 부리를 다물고, 노을은 고개를 낮춘 흰 수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난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오직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 미안해. 내 사과, 받아줄래?”

“삐이이.”

흰 수리는 노을에게 머리를 부비며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울었다.

“고마워. 이 미안함은 평생을 두고 갚을게. 눈 감는 날까지 함께하자.”

우우우웅―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혼과 혼이 공명한다.

마침내 맺어진 일인일수를 축복하듯 푸른 자연기가 둘을 감쌌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설원의 골짜기에서 또 하나의 인연이 탄생했다.

휘아아악―

바로 그때, 발밑에서 청정한 기운이 솟았다.

나를 잊으면 섭섭하다는 듯, 음애고설이 오랜 시간 축적한 자연기의 정수를 건네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노을만이 아니었다.

“어? 설마 너도?”

하얀 깃조차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두 개체에게? 이런 경우는 나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에게 가야 할 자연기가 둘로 나뉜다면······.〕

하얀 깃의 어조엔 우려가 묻어났다.

하지만 노을은 히죽 웃었다.

“아냐. 오히려 잘됐어. 이렇게 좋은 걸 나만 받으면 불공평하잖아. 우린 앞으로 하나니까 이게 맞는 거야.”

하나가 받아야 할 자연기가 둘로 나뉜 상황.

이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내 하나뿐인 짝이 됐는데 흰 거머리라고 부를 순 없겠지. 너랑 싸우는 내내 설산의 매서운 바람을 닮았다고 느꼈어. 칼바람. 그게 네 새로운 이름이야. 어때?”

“삐악―.”

흰 수리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들고 힘차게 울었다.

‘내 우려가 틀렸어! 잘됐구나. 정말 다행이야!’

차가운 눈 속에 몸을 파묻은 사내가 가슴을 쓸었다.

그는 노을이 하얀 깃에게 얻어맞고 추락한 다음부터 초조함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성년식의 규칙이건 뭐건 간에 당장 뛰쳐나가 노을을 구하고 싶었다.

새벽 어스름이 본 노을은 절대 이렇게 잃어서는 안 되는 인재였다.

‘아냐. 아무리 뛰어나고 아까운 아이라도 규칙은 규칙. 내가 왜 이리 동요하는 거지?’

은빛여우가 마른 비에게 그랬듯, 어스름도 노을을 지켜보며 정이 들어버렸다.

생존을 위해, 힘을 키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소녀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자신이 이토록 동요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신이 지켜야 할 아이에 대한 정 때문인지, 그 이상의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2년 내내 노을이만 지켜보다 보니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보살펴야 할 아이 중 둘을 잃었다.

노을이가 살아남아서, 훌륭한 벗과 힘을 얻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장담한다. 내년은 와족 최초의 여족장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해가 될 거야.’

그의 장담이 맞을지 어떨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었다.

* * *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제 가자. 비아야.〕

애뢰산의 정상.

별비가 절벽 끝에 걸터앉은 마른 비에게 의지를 전했다.

터득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붉은 발톱이 알려준 요령을 깨우친 것이다.

하지만 마른 비는 미동도 없었다.

〔그가 동굴에 남긴 유언대로 화장해서 애뢰산에 흩뿌렸다. 내 가족들에 대한 추모도 끝냈어.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

〔네 상실감과 슬픔을 이해한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를 살리지 못한 게 더욱 마음 아프겠지. 하지만 네가 이렇게 넋 놓고 있는 걸 그는 바라지 않을 거다.〕

마른 비와 2년이 넘는 시간을 지내서일까?

별비는 인간들의 화법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마른 비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중이었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마른 비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니. 뭐가 말이냐?〕

“처음엔 너무 슬펐는데, 이젠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내가 여기 앉아서 고민하고 있던 건 그게 아냐.”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한 달 넘게 산 정상에 머물렀던 마른 비가 몸을 일으켰다.

깊게 가라앉아서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던 눈동자가 또렷이 빛났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이제 마음을 정했어. 산을 내려가자, 별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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