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50화 (150/463)

150화

* * *

“할아범! 비아 이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청죽으로 짠 회의실.

와족의 수뇌부가 둘러앉은 가운데, 매서운 눈이 성난 표정으로 그믐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믐은 매서운 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툭 대꾸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표식을 남긴 걸 보면, 어딘가 무사히 있겠지.”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요! 성년식이 끝난 아이들이 복귀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오질 않는 거야? 칼이빨까지 사냥한 놈이 어디 가서 객사했을 리도 없고!”

매서운 눈의 말처럼, 성년식이 끝났음에도 마른 비는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주목받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마른 비는 전쟁 이후 모든 와족 전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아이들이 귀환하는 날에 와족 식구들은 노심초사하며 그가 검치호의 이빨을 들고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 어느 때보다 파란만장했던 성년식이 아니었나.

모두가 공격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응목대의 추격과 습격을 뿌리치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가 검치호 사냥에만 성공한다면 차기 족장은 따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직 모를 일이야. 그 녀석들이 그렇게 성장하다니.’

매서운 눈의 기억이 귀환의 날을 더듬었다.

“어서 와라! 정말 고생 많았다!”

와족 식구들은 성년식에서 복귀하는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검은 수리의 보고대로 응목대에게 목숨을 잃은 스물한 명을 제외하면 모든 아이들이 돌아왔다.

딱 두 명만 빼고.

“이제 둘만 오면 끝입니다. 남은 건 비아와···.”

그 순간, 그들의 고개가 한꺼번에 돌아갔다.

청죽사들이 놀라서 도망칠 정도의 무시무시한 투기.

게다가 북서쪽에서 접근하는 기운은 하나가 아니었다.

“······굉장하군. 더 강해졌어! 둘이 같이 오는 건가?”

바위 곰 고위 전사, 거친 모래가 중얼댔다.

하지만 당도한 자들은 기다리던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거, 성년식을 두 번 다녀온 기분인데요? 모두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응? 표정들이 왜 그럽니까?”

“산?! 그리고··· 걸음이?”

숲을 헤치며 나온 건 산과 안개걸음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믐을 따라서 어디론가 사라졌던 둘이 2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안 그래도 단단했던 두 사람의 몸은 칼로 찔러도 안 들어갈 것처럼 탄탄해져 있었다.

둘을 뒤따라 어슬렁어슬렁 마을로 진입하는 회색 곰과 흑표범도 더 크고 강해진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수련이 끝났나 보군. 고생했다.”

와족 식구들은 몰라보게 강해진 둘의 기운에 입을 쩍 벌렸지만, 그믐은 힐끗 보고 한마디 툭 던졌을 뿐이다.

산이 서운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몇 번이나 죽다 살아났는데, 좀 반갑게 맞아 주시면 안 됩니까? 그래도 할아범 덕분에 저희···.”

“삐이이익―!”

산의 말을 끊은 건 날짐승의 울음소리였다.

푸른빛 일색인 청죽림과 대비되는 새하얀 짐승.

어마어마한 자연기를 흩뿌리며, 거조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뭐, 뭐냐, 이건! 흰 수리?!”

사박, 사박.

뒤따라 접근하는 기운은 고요했다.

하지만 거기엔 강제로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산과 안개걸음에게 쏠렸던 눈들이 북쪽 숲을 헤치고 나온 여인에게 집중됐다.

“······노, 노을이? 너, 노을이 맞니?”

와족 식구들의 얼이 빠진 건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는 성년식 이후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한 소녀가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해져서 나타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녀의 온몸이 끔찍한 흉터로 뒤덮여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다들. 진짜 진짜 보고 싶었어요.”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신감은 외면의 미추를 압도하는가.

흉측한 흉터가 한가득이지만, 햇살을 등진 노을의 미소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이거부터 여쭤봐서 죄송한데, 제가 너무 궁금해서요. 비아, 이 멍청이 어디 있죠?”

노을만이 아니라 모두가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산이와 걸음이. 그리고 노을이. 그 셋이 그토록 성장할 줄이야. 칼이빨까지 사냥한 비아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별비와 함께한 일일 테니······. 누가 족장이 될지는, 결국 싸워봐야 알 수 있는 문제인가.’

현재의 와족 구성원 중에서 검치호를 직접 본 건 마른 비뿐이었다.

대략적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 누구도 검치호의 힘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눈깔이, 네 말대로 칼이빨까지 사냥한 비아를 어떤 짐승이 해칠 수 있겠냐. 뭔가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거겠지.”

마른 비 때문에 화가 난 매서운 눈과 달리, 그믐은 느긋한 어조였다.

귀환의 날, 와족 모두는 밤을 꼬박 새며 마른 비를 기다렸다.

하지만 마른 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그믐은 3년 전 내린 지시를 거두며 검은 수리들을 애뢰산에 급파했다.

식은땀 나는 수색 끝에, 검은 수리들은 독림에서 송곳니가 뽑힌 검치호의 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사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사라진 이상, 더 이상 은밀히 수색할 필요가 없었다.

수색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사냥의 흔적을 거꾸로 더듬는 건 쉬웠다.

검치호가 마른 비를 쫓은 경로는, 마치 여길 지나갔다는 걸 알려주듯 모든 지형지물이 파괴되고 뒤집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검은 수리들은 검치호가 머문 곳을 발견했다.

전 산군의 보금자리였고, 애뢰산에서 가장 높은 곳.

수색대는 산 정상의 동굴 앞에서 마른 비가 남긴 표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정 잇어서 바로 돌아가지 안습니다. 저 겅강해요. 칼아빠도 잡앗구요. 나중에 바요.’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칼이빨’을 ‘칼아빠’라고 쓸 수 있는 건지 연구해볼 문제였다.

그것도 문자가 아닌 표식에서 말이다.

마른 비가 남긴 표식을 그대로 들고 와서 킥킥대던 검은 수리들을 떠올리자, 매서운 눈은 이마에 핏줄이 섰다.

“사정은 무슨 놈의 사정! 성년식을 끝마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 좀 나아졌나 했더니만, 그놈은 여전히 글러 먹었소!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면서 복귀를 안 하다니! 안 그렇습니까, 족장님?!”

그때까지 너른 하늘은 한마디도 안 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매서운 눈이 질문을 던지자 흠칫하며 꾸물댔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으, 응? 커흠···. 뭐, 할아범 말대로 비아가 뭔가 사정이 있는 게 아니겠냐. 조바심내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보자꾸나.”

“······뭡니까, 그 반응은? 족장님, 설마 지금 아들이라고 편드는 겁니까?”

“아, 아니, 그럴 리가 있겠냐. 비아를 믿어 주자는 거지. 아이들이 성년식이 끝나는 기간에 딱 맞춰서 복귀하지 않은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처음이 아니라고요? 다쳐서 못 움직이게 된 경우 말고 이런 사례가 또 있었다고? 제가 성년식을 다녀온 이후 이십 년간 한 번도 없었습니다만?”

무심하게 앉아있던 그믐이 너른 하늘을 힐끗 바라봤다.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나나 본데······. 눈깔이, 너와 우둔한 놈이 성년식을 떠나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이유가 아마······ ‘휴식과 원기 충전을 위한 운남 여행’이었지?”

아연해진 매서운 눈에게 너른 하늘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크, 크흠. 성년식 내내 푸른 눈을 길들이느라 원체 고생을 해서······. 매서운 눈, 고유의 이름이 붙은 놈들과 싸우고 나면 말이다···.”

없던 두통이라도 생긴 건지 머리를 짚은 매서운 눈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지금의 비아를 찾아내는 건 어렵습니다. 운남은 너무 넓어요. 우연히 발견하면 모를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하는 통에 검은 수리들이 따라붙질 못합니다.”

“그렇겠지.”

수긍하는 너른 하늘에게, 매서운 눈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규칙을 어긴 건 비아입니다. 아이들의 힘이 충분히 갖춰진 이상, 원래 계획대로 족장 결정전은 당겨서 진행해야 해요. 비아 하나 때문에 이미 공표한 사항을 미룰 수 없다는 거, 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이다.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격이 박탈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또 한번, 너른 하늘은 선선히 수긍했다.

그 시원한 태도가 오늘따라 얄밉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매서운 눈은 할 말을 마쳤는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서 눈썹을 씰룩이다가, 도로 앉았다.

“······족장님. 허락받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락이라니? 갑자기 무슨 허락?”

궁금해하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매서운 눈이 말했다.

“족장님께 욕 한 번만 해도 됩니까?”

* * *

“2년 만이네.”

구름까지 치솟은 열아홉 봉우리.

길 위엔 햇살을 받은 초목들이 싱그럽게 반짝였다.

마른 비는 별비와 함께 천천히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널찍한 평지가 나왔다.

2년 전,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피가 뿌려졌던 그곳은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애뢰산을 나온 마른 비가 향한 곳은 창산이었다.

뎅- 뎅- 뎅―

2년 전엔 효시가 솟아올랐었는데.

초대받지 않은 자의 진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쉬쉭- 쉭- 쉬쉬식―

아무래도 저 종소리는 내부에 알리려는 목적보단 침입자를 멈춰 세우기 위한 용도인 듯했다.

전투 준비를 끝낸 수십 명의 인원이 쾌속하게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오길 잘했네.’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고 이동했는데, 옳은 판단이었다.

점창의 인원들은 바짝 긴장해 있지만, 적의나 살기를 드러내진 않았다.

아직까지는.

“와족 족장님의 아드님이시구려. 오랜만이오. 나, 호검대주 조광이오.”

무리의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인사를 건네왔다.

꼿꼿한 자세와 우직함이 묻어나는 얼굴.

마른 비와 별비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때 전쟁에서!”

우측 전장에 난입했을 때, 매서운 눈의 지시를 받고 별비와 함께 쓰러뜨린 검대의 수장.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조광은 복잡한 심정을 숨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땐··· 신세를 졌었지. 솔직히 말하면 1년 전까지만 해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오. 억울한 마음도 들고, 화가 나기도 해서. 살심이 끓어올랐다가, 자조적으로 웃기도 했지······. 내가 패하는 바람에 우측 전장이 무너진 것이니까. 수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으니까.”

말을 잇는 게 쉽지 않은지, 조광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다시 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수도 없이 상상했다오. 제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 검을 뽑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소.”

그 말처럼, 조광의 오른손은 미미하게 떨리며,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구나.’

굳이 자연기로 탐색할 필요도 없다.

적으로 만났던 사이인 데다가 자신을 쓰러뜨린, 까마득하게 어린 상대.

더군다나 마치 조롱하듯 홀로 산에 올랐다.

그런 자에게 저토록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점.

음험하거나 악한 자라면 절대 이럴 수 없다.

마른 비는 몇 마디 말로도 충분히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저씨,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우린 먼저 공격을 받았고, 많은 피를 흘린 건 마찬가지니까. 부디···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야.”

꿈틀대던 조광의 손이 멎었다.

마른 비가 그랬듯 그 역시 마른 비의 진심을 알아본 것이다.

조광이 경직됐던 어깨를 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전쟁이 끝나고, 장문인이 벌인 일들에 대해 낱낱이 알게 됐소. 경악을 금치 못했지. 허나 모르고 휩쓸렸다고 해서 우리가 저지른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 깊이 사죄드리오. 그리고 와족이 베푼 자비에 감사하며, 그 배포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요.”

번민이 사라진 눈이다.

그의 표정은 진실했으며, 어조는 진솔했다.

정파인을 대변하는 초상화를 그린다면, 이런 얼굴이 아닐까?

조광이 한층 부드러워진 눈으로 말했다.

“환영하오. 점창에 잘 오셨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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