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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51화 (151/463)

151화

하늘로 시원하게 뻗은 열아홉 봉우리.

창산을 상징하는 그것들의 중심에는 마룡봉이 있으니, 그 밑자락에 천하 구파의 일원인 점창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네.”

바로 그 점창파의 문간을 마른 비가 넘었다.

이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송의 양식과 대리국의 양식을 절묘하게 혼합한 정문.

조광의 설명에 따르면 아담했던 문을 으리으리하게 바꾼 건 공지량이 장문인에 오른 뒤라고 했다.

정문은 문파의 위세를 드러내므로 크고 멋져야만 한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입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건물을 갈아엎었는데, 그 엄청난 자금이 어디서 나온 건지는 수수께끼라고 했다.

차차창!

좌우에 일렬로 도열한 무인들이 하늘을 향해 사선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군문에서나 볼법한 의전.

일반적인 무림 문파에서는 행하지 않는 환영 의례다.

여기서도 공지량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으니, 간혹 점창을 찾는 외부 인사들과 본인을 위해 교육시킨 영접 방식이었다.

백색 일색의 복장도 그랬지만, 공지량은 보이는 부분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자였다.

“와~! 멋지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멋진 건 사실이다.

이런 걸 본 적이 없는 마른 비로서는 더욱 그랬다.

열여덟이 되도록 야생에서 살아온 청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장문인의 흔적이라 마음에 들진 않지만······. 멋진 건 사실이지. 소협이 갑자기 방문하는 바람에 다른 무언가를 궁리할 새가 없었소. 중요한 손님이니 예는 갖춰야겠고······. 나중에는 이것도 없애는 걸 고민해봐야겠군. 문파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허례허식이야.”

조광이 퍼뜩 깨달은 듯 중얼댔다.

그리고 마른 비는 그 한마디에서 현재의 점창이 추구하는 방향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 호칭을 어떻게 하면 되겠소? 마땅히 부를 말이 없어서 소협이라고는 했는데······. 그대는 중원 무림의 인물이 아니지 않소이까.”

“마른 비. 내 이름이야. 그냥 비아라고 불러, 아저씨. 말도 편하게 하고. 나만 말 놓으면 불공평하잖아.”

마른 비가 밝게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음. 이게 그 와족식 인사법이군. 사절로 다녀온 유립이에게 들었지. 좋아. 그렇게 하마.”

조광이 마주 주먹을 부딪쳤다.

“사실 나는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편이라 이런 게 익숙치 않아. 불쾌하거나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군. 자네는 묘한 친화력이 있어.”

“‘자네’, 그거 어색해. 그냥 ‘너’라고 해, 아저씨. 아저씨가 나이도 한참 많잖아.”

“허허, 거기까진 쉽지가 않은데. 흠흠. 그래, 비아 너는 묘한 매력이 있구나.”

“다들 그렇게 말해. 하핫.”

조광은 지금 스스로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전쟁에서 처음 만났고, 자신을 쓰러뜨린 상대다.

그런 자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조금 전 산을 달려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 마른 비라는 청년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나저나······.”

조광이 뒤쪽으로 힐끗 눈을 돌렸다.

아마 ‘저 존재’가 없었다면 제자들은 지금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을 거다.

마른 비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인간 석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딱딱한 평소의 자신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뒤를 따르는 존재는 모두의 이목을 휘어잡고 있었다.

투벅, 투벅.

저 새하얀 털이 피에 젖었던 걸 기억한다.

얌전히 다문 주둥이 속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이빨과, 앞발 안에 숨어있는 칼날 같은 발톱.

2년 사이에 덩치도 더 커졌다.

별비가 지나치는 경로에 사열해 있는 점창의 제자들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대, 대주님은 저 청년과 범을 동시에 상대하셨던 건가?”

저 멀리에 있는 제자 한 명이 기가 질린 듯 중얼댔다.

“그러게 말야. 대주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하신가 봐······.”

조용히 소곤대고 있지만, 조광 같은 고수의 청력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흐음.’

자신도 모르게 조광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결국은 저자에게 얻어맞고 쓰러지셨잖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절해 있었다던데?”

조광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응? 아저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마른 비가 갑자기 의기소침해진 조광에게 물었다.

높게 솟은 전각들을 구경하느라 마른 비는 제자들의 대화를 못 들은 상태였다.

〔야, 이 멍충아. 그런 거 묻지 마. 모른 척해, 모른 척. 그 인간, 상처 받는다.〕

위풍당당하게 뒤따르던 별비가 눈만 힐끔거리며 마른 비를 말렸다.

“아니다, 비아야. 그냥 갑자기 소화가 안 돼서. 규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온 거랬지? 그 전에 잠깐 장로원에 들리자. 대장로님들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시거든.”

“대장로라면······ 중앙에서 아버지와 싸웠던 할아버지들?”

“그래. 그분들이다.”

중원의 기화요초들이 만발한 정원.

그 중앙에 있는 정자에서 두 명의 노인이 마른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드려라, 비아야. 본문의 최고 어른이신 봉검, 운검 장로님이시다.”

두 노인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마른 비를 맞이했다.

2년 전 전장에서는 먼발치에서만 보았던 노인들.

처음 그들을 가까이서 본 마른 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해. 아무런 힘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기세를···!’

점창이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제자들의 목숨을 살려 달라 무릎 꿇었던 이들.

자비를 구하며 평생 동안 쌓아 올린 무공을 스스로 전폐시켰던 자들.

옳다 믿는 신념의 길을 평생토록 추구한 자들은 내면의 단단함을 지니는가.

단전이 깨져 내공을 축적할 수 없는 몸임에도, 봉검과 운검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반갑소, 소협. 그대가 바로 와족 족장님의 아드님이시군. 2년 전에는 싸움에 집중하느라 그대의 활약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소. 정말 굉장했다고 들었소이다.”

운검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족장이 아닌 족장‘님’이란 존칭과, 아군을 쓰러뜨린 마른 비의 행동을 ‘활약’이라 표현했다는 점.

그리고 그게 조롱이 아닌, 진심 어린 찬사라는 점.

운검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한 마디였다.

“와······. 진짜 놀랐어. 할아버지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마른 비가 입을 벌린 채로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자신이 힘을 잃는다면 이들처럼 당당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의 몇 배에 달하는 세월 동안 정진해서 쌓은 힘을 말이다.

무(武)에 인생을 건 무인과 전사.

그것이 송두리째 사라진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무언가.

그런 부분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는 마른 비에게 봉검, 운검과의 만남은 또 다른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과찬이오. 오히려 우리가 놀랍군. 같은 또래에선 이제 규와 유립이를 넘을 자가 없다고 자신했거늘. 과연 세상은 넓고도 넓구려.”

그 말처럼, 봉검과 운검은 마른 비를 보며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내공을 잃어서 정확한 무공 경지를 알아볼 순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잘 보인다.

눈앞에 있는 청년의 그릇과 품성이.

동작 하나하나에 깃든 무의 이치가.

단언컨대 둘은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 정도의 무를 깨우친 인재를 본 적이 없었다.

‘이 청년이 중원에 나간다면, 천하 후기지수들의 서열이 새로 쓰이겠군. 구파일방 전체를 통틀어도, 몇 년 전까지 보았던 인재들 중 이 청년을 능가할 자는 없다.’

여휘의 파문에 반대하고 칩거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구파일방의 회합.

전통적으로 각 파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들을 동행하는 그 자리에 봉검과 운검은 공유환을 데리고 갔다.

물론 공지량의 반강제적인 지시였고, 무공 수준만 놓고 본다면 공유환도 자격은 충분했다.

됨됨이와 그릇이 문제였을 뿐.

아미파의 차기 검후(劍后)에게 찝쩍대다 귀싸대기를 얻어맞고선 발광하는 공유환을, 봉검은 혈도를 짚어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회합이 끝나기도 전에 공유환을 둘러메고 창산으로 돌아왔다.

구파 영수들의 따가운 비웃음과 동정을 뒤로 한 채.

“할아버지야말로 과찬이야. 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칭찬받으려면 아직 멀었거든.”

“허허, 와족 족장님의 눈높이가 터무니없이 높은 거요.”

마른 비와 운검 사이에 훈훈한 인사말이 오갔다.

그리고 잠자코 있던 봉검이 마른 비를 보자고 한 이유를 꺼냈다.

“말을 편히 하니 나도 그리하겠네. 자네, 규를 보고 나면 마을로 돌아가겠지?”

“응? 마을? 그건 아직 안 정했는데?”

“······안 정했다고? 자네, 성년식인가 하는 그 의식 중 아니었나? 규에게 그리 들었네만.”

“아, 그건 끝났어. 근데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겨서 거기부터···.”

“허! 이런 천둥벌거숭이를 봤나! 어딜 가든 우선 어른들을 찾아뵙고, 허락을 구하는 게 도리이거늘!”

봉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공을 잃었어도, 그 괄괄한 성정은 어디 가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엄한 사람에게 꾸중을 듣게 된 마른 비였다.

“그, 그런가? 아··· 듣고 보니 그러네. 하고 싶은 게 생겼더니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었어. 고마워, 할아버지. 마을부터 꼭 들를게.”

“허어···! 이런 면에선 우리 규나 유립이가 백배는 낫구먼.”

봉검이 기막히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품에서 두툼한 뭉치를 꺼냈다.

“무조건 마을부터 들르게. 다 큰 청년이 친인들에게 걱정을 끼쳐서야 쓰겠나. 그리고 마을로 갈 때 족장께 이 서신을 전해주게. 지난 2년간 우리가 약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담겨있으니.”

“약조? 결과? 어떤 걸 말하는 거야, 할아버지?”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은 토착 부족들에 대한 보상 내역일세. 땅, 금품, 생계, 인명 등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었다면 직접 찾아가 사죄하고 보상을 했지. 그걸로 그들의 아픔이 가시지는 않겠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을 돕고 그들의 번영을 위해 노력할 걸세.”

2년 전, 봉검과 운검은 너른 하늘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그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뱉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 두 명의 노인은 전심전력을 다해 점창의 죄를 씻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는 사절을 파견할 생각이었지만, 자네가 점창을 방문한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겠지. 잘 부탁하네.”

봉검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로 보아 그 역시 마른 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 가지 묻고 싶군. 자네가 가보고 싶다는 곳. 혹시 중원으로 나갈 생각인가?”

그 물음에 마른 비의 눈이 커졌다.

“어? 그걸 어떻게?”

“자네가 문명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걸 규에게 들었지.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것도. 서역이나 천축으로 넘어갈 리는 없을 테니 그럼 중원밖에 더 있겠는가?”

마른 비가 잠시 주저하다 대꾸했다.

“응. 맞아, 할아버지. 중원에 나가보고 싶어. 하지만 어른들이 반대하실까 봐 마을에 들르지 않고 바로 떠날지를 고민 중이었거든. 할아범도, 아버지도, 모두 젊을 때 운남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대. 실은··· 나도 마을에 가면 그럴 것 같아. 어른들의 반대는 둘째치고라도 식구들을, 친구들을 남겨두고 혼자 떠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거든.”

봉검은 진지하게 마른 비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내가 본 자네 부족의 어른들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자네 말처럼 반대할 수도 있겠지. 식구들을 두고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게야. 자네 정도의 인재라면 분명 차기 족장으로 기대받고 있을 테니 책임감도 얹혀 있을 터. 허나 이걸 기억하게.”

지금 이 순간, 봉검은 소속된 집단을 떠나 삶을 앞서 걸은 선배로서 후배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자네의 마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거야.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할 것 같다면, 자네가 원하는 길을 걷게. 자네 생각보다 인생은 턱없이 짧아. 원하는 바를 추구하고, 과감히 그 길을 걷게. 그 길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고민해온 이야기.

그에 대한 조언을 적으로 마주쳤던 집단의 큰 어른에게 들을 줄이야.

이래서 인생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마른 비는 큰 격려를 들은 기분이었다.

“응. 할아버지 덕분에 한결 확고해졌어. 고마워. 그렇게 할게.”

하지만 봉검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만약에 자네가 중원으로 나가게 된다면 말이지.”

의아해하는 마른 비에게 봉검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보였다.

“그때, 우리 규도 데려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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