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규를?! 그래도 돼?”
그 순간, 운검이 손바닥을 탁탁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 전할 이야기는 모두 전했군. 늙은이들이 젊은이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 소협, 규를 만나러 가시게. 그리고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게나. 규는 유립, 승이와 함께 연무장에 있네. 조 대주, 안내를 부탁하이.”
“염려 마십시오, 대장로님.”
조광이 극진한 공경을 담고 고개를 숙였다.
“흠. 거기에 이런 대호가 따라간다면 제자들이 난리가 날 것이야. 소협의 반려수겠지?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별비. 별비라고 해. 한어로는 유성우라는 뜻이야.”
“유성우라······. 좋은 이름이군. 별비야, 후방 전장을 뒤엎은 네 활약은 들었다. 기를 다룰 정도의 영물이니 내 말도 알아듣겠지? 너는 우리와 함께 있자꾸나.”
“그라랑?”
별비가 당황한 눈으로 마른 비를 쳐다봤다.
마른 비가 그랬듯 별비 또한 묘하게 이 노인들을 거스르기 힘들었다.
그래서 벗에게 도움을 요청했건만.
마른 비는 씨익 웃으며 별비의 도움 요청을 묵살했다.
“그렇게 해. 네가 같이 가면 시끄러울 거야. 할아버지들이랑 놀고 있어, 별비야.”
〔놀아? 이 노인네들이랑? 뭘 하고?〕
나도 데려가라고 내민 별비의 앞발을 마른 비는 모른 척했다.
“개문(開門)! 제1진 돌격!”
“원진(圓陣)! 전원 방어에 집중하고, 제3진은 우회하여 적들을 요격하라!”
소규모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모의 전투다.
두 편으로 나뉜 점창의 제자들은 진검까지 뽑아든 채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평지에 자리 잡은 거대한 연무장이 점창 제자들의 투기로 가득 찼다.
“규! 규가 앞으로 나왔다! 수운진을 발동하라!”
날카로운 외침은 언젠가 분명히 들어본 목소리였다.
마른 비는 왼편 진형 한복판에서 공유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 사제! 뒤를 받쳐 줘!”
“걱정 마십시오! 여 사형! 그대로 뚫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았어! 첨진(尖陣)! 이번 돌격에 모든 걸 건다!”
오른편 진형에서는 선두에 선 청년 뒤로 제자들이 달라붙었다.
송곳처럼 뾰족하게 형성된 진형이 둥글게 모인 원진을 향해 돌진한다.
공격과 방어가 명료하게 갈린 형국.
송곳의 맨 앞에는 훌쩍 커버린 여규가 있었다.
“모두, 나를 따르라! 가자!”
날카롭게 뻗어 나가는 사일검.
첨진이 원진을 가르며 중앙에 있는 공유립을 향해 짓쳐 들었다.
“지금! 닫아라!”
촤라라락!
공유립의 진형이 원 안에 들어온 여규와 선발대를 본대로부터 분리했다.
어차피 용병술과 지휘로는 공유립을 넘을 수 없다.
여규는 모든 힘을 집중시켜 머리를 치는 걸 택했고, 그걸 예측한 공유립은 진형을 움직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이다.
“차아앗!”
결국 남은 건 힘과 힘의 대결!
여규의 사일검과 공유립의 분광검이 빛을 토했다.
“허억, 허억···!”
수백에 이르는 점창의 제자들이 연무장 곳곳에 널브러졌다.
진검으로 하는 실전 모의 전투.
죽은 자는 없지만, 부상자가 속출했다.
문파에 소속된 의원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굉장하네···!”
마른 비는 입을 헤 벌린 채 모의 전투를 관전했다.
크게는 방어와 공격, 유연한 원과 날카로운 송곳의 대결이지만, 그 안에서도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공방이 교차했다.
전쟁을 직접 겪은 데다 밖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마른 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떠냐, 비아야. 꽤 살벌하지?”
조광이 웃으며 마른 비에게 물었다.
“응. 아저씨. 진짜 전쟁 같아. 근데 같은 식구끼리 저렇게 피를 봐도 돼? 많이 다쳤는데?”
마른 비가 부상자들을 돌아보며 답했다.
“평소에 진검을 쓰진 않지. 마침 오늘이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의 전투의 날이다. 사실 대부분의 문파에서는 모의 전투를 벌여도 사형제들끼리 진검을 주고받진 않아. 특히 정파로 분류되는 문파에선 금기나 다름없는 일이지.”
“그럼 왜?”
“왜겠니. 그 정도로 절실하게 실전 감각을 다지고 싶은 거지. 이건 젊은 제자들이 직접 원해서 시작한 훈련이다. 2년 전의 전쟁에서 패하고 봉문을 한 이후, 점창의 제자들은 산에 틀어박혀서 힘을 갈고 닦는 중이야.”
마른 비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음······. 그거 설마······.”
무얼 우려하는지 알겠다는 듯 조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와족과 싸우려는 건 아니니 걱정 마라. 그럴 생각이라면 너에게 이걸 보여줬겠느냐.”
“그러면?”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거지. 천하 구파의 일원이라고 자부하다가 철저하게 패했으니 우리가 어떤 심정이 들었겠느냐. 무림의 문파로 살아가는 이상 언젠가는 또 검을 쓸 날이 오겠지.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다시는 패하지 않기 위해서.”
“그럼 다행이야. 그런 처절한 전쟁을 되풀이하긴 싫거든.”
마른 비의 말에 조광은 고개를 들어 동쪽 어딘가를 바라봤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허나··· 어쩌면 우리는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엔 어떤 무게가 깃들어 있었고, 마른 비는 그걸 물으려 했다.
그때 반갑게 다가온 발소리가 마른 비의 주의를 돌렸다.
다다다다―
“비아야!”
와락 달려들어 마른 비를 껴안는 청년.
못 알아볼 정도로 성장한 여규였다.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의 전투를 탈주할 뻔했어! 마중 못 가서 미안해. 잘 지냈지, 비아야? 진짜 보고 싶었어!”
“응, 나도! 너 보려고 일부러 왔어.”
여규의 뒤에서 원승이 소매로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소협! 그새 더 커지셨구려.”
“응, 아저씨도 잘 지냈지? 오랜만이야.”
인사를 건네온 자는 또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처음으로 보는구려. 그땐 인사를 나눌 정신도 없었지.”
선하면서도 강단 있는 인상의 청년이었다.
전쟁 이후 점창의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남자.
공유립이 마른 비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건넸다.
“공유립이오. 그땐 소협의 힘에 정말 놀랐었지. 절치부심하여 재대결을 꿈꾸고 있었는데······. 이거, 원. 더 괴물이 되셨구려.”
그 말에 여규와 원승도 마른 비를 꼼꼼히 살폈다.
둘의 눈이 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대, 대단하군. 소협, 지난 2년간 대체 무슨 수련을 쌓은 거요?”
“체내의 기운이······ 엄청나게 커졌어! 비아, 너도 무슨 영약 같은 걸 먹은 거야?”
마른 비가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응. 산의 정기라고 해야 하나. 운 좋게 그런 걸 얻었어.”
“산의 정기라니······. 그런 게 정말 있어? 와씨, 나도 야생이나 돌아다니면서 짐승들과 싸울 걸 그랬나?”
여규의 너스레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못 보는 사이 여규는 무척이나 밝고 쾌활해져 있었다.
“규, 너도 뭔가 얻은 모양인데?”
마른 비가 눈치채자 여규가 쑥스럽게 웃었다.
“응. 봉검 장로님께서 날 위해 단환을 준비해두셨더라고. 그래서 상당한 내공 증진이 있었어. 감사할 따름이지.”
‘여규, 그 녀석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게 있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전쟁 직전에 봉검이 운검에게 건넸던 말.
외로이 큰 여규를 위해 봉검이 준비해두었던 건 내공 증진을 위한 단환이었다.
“그걸 먹고, 아버지가 황실로 복귀하시기 전에 특훈을 받았어. 이제 너를 이길 수 있겠다 싶었는데, 넌 더 강해졌구나.”
재회 후 훈훈하게 오가는 말들이다.
어려운 발걸음이었지만, 마른 비는 창산에 찾아오길 정말 잘했다고 느꼈다.
웅성, 웅성.
모의 전투가 끝나고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있던 제자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2년 전 전쟁에 난입하여 폭풍처럼 전장을 휩쓴 와족 족장의 아들.
공유립과 벌인 엄청난 싸움을 보았고, 여규와 원승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앙금, 적개심, 호기심, 혹은 강자에 대한 동경.
다양한 감정들이 쏟아지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점창의 제자들에게 마른 비는 굉장한 유명인이라는 점이었다.
“어······ 시선이 너무 집중되네? 좀 부담스러운데?”
마른 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점창의 제자들과 인사를 나눈 마른 비는 여규, 원승, 공유립과 함께 여규의 모옥을 찾았다.
중간에 장로원에 들러 별비를 데려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장로들과 보낸 시간이 어색하고 지루했는지, 별비는 마른 비가 오자마자 씩씩대며 투덜댔다.
“으아······ 가까이서 보니 진짜 무시무시하네, 이 녀석.”
처음으로 별비를 가까이서 보게 된 여규 일행은 탄성부터 터뜨렸다.
호기심과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
처음엔 쭈뼛대며 다가갔지만, 그들은 마른 비의 친구였고, 선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별비가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팔을 부들대면서도 과감하게 손을 뻗은 여규가 머리를 쓰다듬어도, 별비는 얌전히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비아, 네 친구라 앞발로 머리를 날려버릴 수도 없고.〕
물론 속마음은 전혀 딴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별비까지 낀 재회의 자리는 유쾌하고 즐겁게 시작됐다.
“정말?! 우리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가 대련하셨어?”
지난 2년간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마른 비의 관심을 끈 건 너른 하늘 대 여휘의 대결이었다.
“응. 창산과 청죽림의 중간쯤에 커다란 평야가 있더라고. 전쟁이 끝나고 부상자들이 몸을 회복할 때쯤, 거기서 양측이 만났어.”
점창과 와족, 양측에 속한 거의 모든 인원이 집결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고, 전쟁을 복기하며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양측 수뇌부는 알면서도 모두를 불러 모았다.
아니, 일부러 그 시점에 대결을 잡은 거였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어. 와족 족장님이야 전쟁에서 보았으니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오랜 기간 점창을 비우셨기 때문에 그 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 사실··· 나만 해도 아버지가 다치지 않고 끝나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중원 십좌의 일인.
황실 삼대 무장 중의 한 명.
점창파 역대 최고의 기재.
여휘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차고 넘쳤지만, 인간 같지 않은 너른 하늘의 힘을 목격한 뒤다.
모두가 그의 일방적인 패배를 예상했다.
하지만 여휘는 그 표현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증명했다.
개인으로는 누구도 몰아붙이지 못했던 너른 하늘을 연신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각자의 절기들이 터질 때마다 평야가 뒤틀릴 듯 요동쳤다.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사와, 중원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
평생 가도 보지 못할 세기의 결전이 아닌가.
양측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결과는 예상대로 아버지의 패배였어. 목숨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비장의 한 수는 남겨두었지만, 아버지가 인정했지. 전력을 다해도 족장님을 이길 수 없다고. 그리고 둘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어. 처음부터 그러고 싶었다나 뭐라나.”
적의로 팽배했던 양측의 감정이 누그러진 건 한순간이었다.
이토록 엄청난 전사와 무인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어른이라는 점.
그리고 화끈하게 한판 붙고 화통하게 우의를 다지는 모습!
전사라면, 무인이라면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처음엔 쭈뼛쭈뼛 다가갔지만, 넉살 좋은 몇몇이 자리를 깔자, 술판이 벌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양측은 평야 곳곳에 널브러져서 삼일 밤을 지새우며 먹고 마셨다.
중간중간 언성이 높아지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양측의 수뇌부는 제때에 개입하여 상황을 정리하고 관계를 조율했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이.
그리고 와족의 족장이 보여준 아량과 배포.
공지량에게 수년간 휘둘렸지만, 뒤늦게 눈을 뜬 점창의 제자들은 와족에게 진심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했다.
그래서일 거다.
느닷없이 방문한 마른 비에게 점창의 제자들이 큰 적의를 보이지 않은 것은.
너른 하늘의 바람대로 와족과 점창은 미래를 위한 교두보를 쌓고 있었다.
“아···! 아쉬워! 나도 거기 있었어야 하는 건데!”
마른 비는 안타까움에 바닥을 팡팡 내리쳤다.
서로에 대한 호감과 우의로 가득한 재회였다.
여규의 수련 이야기, 마른 비가 검치호를 사냥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청년들은 지난 2년간의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산 너머를 응시하던 마른 비가 말했다.
“규야, 나 물어볼 거 있어.”
“응? 뭔데?”
잠시 뜸을 들인 마른 비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물었다.
“호국영.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