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 *
커다란 부채꼴의 잎사귀들이 드리운 숲속.
하얀 피부에 옥석을 깎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닌 남자가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백색 무복을 입은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네 명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발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2년 만인가. 운남은 여전하군.”
2년 만이라고 했다.
어디 먼 곳에라도 다녀온 걸까?
그렇다면 오랜만의 복귀가 기꺼울 만도 하련만.
“여전히 무덥고, 아무것도 없어! 끝도 없이 펼친, 이 지긋지긋한 밀림! 지겹다! 현기증이 날 정도야! 다신 오기 싫었는데!”
호국영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그의 옆에 있는 사내들은 이런 짜증이 익숙하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혼자 주절대고, 혼자 소리 지르니 나만 미친놈 같군요. 2년을 같이 지냈는데도 대화를 나눈 적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응목대분들은 원래 그렇게 입이 무겁습니까?”
호국영이 사내들을 돌아봤다.
질문의 형식을 빌었지만, 실상은 원망이요, 조롱이다.
응목대원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 척했고, 한 명이 마지못해 대꾸한 게 전부였다.
“딱히 입을 열 만한 일이 없으니. 중요한 일들은 자네가 다 처리하지 않았나. 수완이 좋더군. 고생했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입은 닫혔다.
아예 대꾸가 없는 것보다 호국영은 그게 더 짜증이 났다.
‘망할 새끼들. 돕겠다고 따라와서 네놈들이 한 게 뭐가 있나. 호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호위가 아니라 감시겠지!’
이제는 전면 교체된 응목대의 전 대원들.
장문인의 손발이나 다름없던 자들이다.
그들은 전쟁 이후 문파가 개편되며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고, 대장로들로부터 자숙하란 명을 받았다.
공지량의 명을 수행하며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자들은 과거를 뉘우치고 쇄신된 분위기에 적응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장문인의 직속 단체로서 누리던 대우에 만족했던 자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전장을 그리워하는 자들.
지석인마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구심점이 없어진 그들은, 힘은 잃었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공지량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멍청한 새끼들. 제 스스로 살길을 개척할 생각은 않고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충성하는 꼴이라니. 아니, 이빨이 빠진 정도가 아니지. 단전이 깨지고, 왼팔이 잘린 데다 두 다리의 근맥이 끊겼어. 장문인은 살아 있는 송장이나 다름없다. 그런 놈에게 매달리느니 그냥 뒈지는 게 낫지.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속으로는 욕을 퍼붓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그린다.
중원을 다녀온 2년간, 호국영의 안면신공(?)은 초절정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당분간은 비위를 맞춘다. 내가 입지를 다지려면 이놈들이 필요해. 계획이 마무리되고 상황이 안정되면, 그때 이놈들을 일거에 흡수하는 거야. 내가 너희들을 아주 요긴하게 써주마.’
전쟁 이후, 최연소 장로 자리를 약속받았던 호국영의 미래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아니, 미래는커녕 당장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천만다행히도 전쟁 중에는 족장이 자신을 찾을 여력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빠뜨린 걸 되짚다 보면 분명 겨울 달의 일을 떠올릴 거다.
창산에 남아 있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산 채로 끌려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지원했다.
후기지수들이 경험을 쌓기 위해 떠나는 중원행에.
물론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지만.
‘흑상···!’
전쟁에서 쓰였던 군용 병기.
정상적인 경로로는 구할 수 없는 무기들이다.
황실의 눈이 닿지 않는 변방의 오지라서 가능했던 일이지, 중원 한복판에서 그런 걸 사용했다가는 멸문은 둘째치고, 역란의 죄를 뒤집어쓴 채 구족이 참살당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역시 장문인은 흑상을 통해 병기를 구입한 거였어!’
그런 전략 병기를 구할 곳은 흑상밖에 없다.
그리고 와족이 신성시하는 묘를 차지한다면, 거기서 나온 금을 유통할 경로 또한 흑상뿐이다.
호국영은 중원행을 떠나기 전에 병상에 누워있는 공지량을 찾았고, 장시간에 걸친 담판 끝에 흑상과 접촉할 방법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공지량. 그자는 끝났어.’
걷지도 못하고 평생을 침상에서 보내게 된 신세.
그 지경이 되고도 그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그는 낼 수 있는 패가 없었고,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를 지지하는 전 응목대원들이 있지만, 그들은 전투원일 뿐 모략을 꾸미고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모든 일 처리를 믿고 맡길 수 있었던 지석인이 죽은 지금, 그의 주변에서 큰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는 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후후후. 흑상과의 접선 방법을 비밀로 하고 싶었겠지만, 당신 처지에 어쩔 건가. 모든 걸 잃은 지금, 내 존재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겠지.’
공지량의 입을 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잠시 그와의 대담을 떠올렸던 호국영이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그렸다.
“응목대원 분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장문인의 명을 받고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먹하게 지냈지만, 그래도 정은 들었던 걸까?
복면으로 가려진 응목대원의 입 부위가 곡선을 그렸다.
‘웃을 줄도 아는군. 망할 자식.’
속마음과 달리 호국영은 끝까지 입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가장 난감한 부분이었던 흑상과의 접촉이 가능해졌어. 지금쯤이면 족장도 나에 대해 잊어버렸겠지. 기억하고 있어도 상관없다. 이번엔 일시적인 중원행이 아닌 정식 임무를 받아서 나갈 테니까. 다음에 운남으로 돌아올 땐 금광을 접수할 준비가 끝나 있겠지.’
가식적인 미소 위로 진짜 웃음이 번지려는 찰나.
“정말 고생 많았네. 그동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 답해주겠나?”
“무슨···?”
저자가 먼저 말을 걸다니?
2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궁금해? 무엇이?
호국영이 눈으로 묻자, 사내의 복면 위로 또 한 번 곡선이 그려졌다.
“자네, 흑상을 따로 만난 이유가 뭔가?”
“······?!”
‘이, 이 새끼가 그걸 어떻게?!’
호국영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전 응목대원들을 대동하고 한 번.
혼자서 몰래 또 한 번.
공지량의 줄을 통한 공식적인 접촉 외에, 몰래 건넨 서신을 통해 사적인 접촉을 성사시켰다.
흑상과 따로 만난 이유는 뻔했다.
공지량의 줄이 아닌, 자신만의 독자적인 접선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아, 아아···! 그건 빠뜨린 내용이 있어서······. 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서 응목대 분들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중에라도 말씀드리지 못한 건···.”
복면 뒤의 곡선이 더욱 짙어졌다.
“그렇군. 개인적인 접선책을 마련하는 게 별로 중요한 사안은 아니겠지. 그게 중원의 지하 상계를 쥐고 흔든다는 흑상과의 연결고리라도 말이야. 안 그런가?”
“······!”
이것들,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저 지금까지 모른 척 해왔을 뿐.
중요한 건 일을 마치고 운남에 복귀한 지금에 와서야 말을 꺼낸 이유였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자네 같은 친구들을 수두룩하게 보지. 운남의 자연이 지겹다고 했던가? 난 자네 같은 놈들이 지겨워. 분수를 모르는 쥐새끼들.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설치지. ‘난 이렇게 끝날 그릇이 아니야.’ 하면서. 그게 제 무덤을 파는 길이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저 노골적인 경멸.
글렀다.
이들은 자신을 살려둘 생각이 없는 거다.
어렵게, 어렵게 뚫어 놓은 접선책마저 꿀꺽하겠지.
어쩌면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모른 척한 걸 수도 있다.
아니, 확실하다.
자신은······ 2년 내내 공지량에게 놀아난 거였다.
“자, 잠깐! 차분히 생각해보십시오! 장문인은 이미 재기를 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는 끝났다고요! 차라리 앞으로는 저와 함께···!”
“아아, 헛짓거릴 하다가 발각된 쥐새끼들의 반응이란 어쩌면 이리도 똑같은지. 정말 지겹구나. 아까 말했지? 네 주제를 알라고. 네깟 게 우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나?”
복면 위의 곡선이 뚜렷하게 짙어졌다.
저것, 비웃음이 분명하리라.
그리고 그 위에 덧씌워진 흉흉한 살의.
이놈은 지금 살인을 앞두고 즐거워하고 있으며, 그 대상은 자신이었다.
“이··· 비겁한 새끼들 같으니라고! 네놈들이 이런다고 무슨 득이 되겠느냐! 나와 협력하면 새로이 얻은 흑상의 접선책을···!”
“쯧쯔. 이것 봐라. 너 같은 놈들은 하나같이 저만 똑똑한 줄 안다니까? 흑상 같은 거대 집단이 뭘 믿고 너 같은 핏덩이와 거래를 트겠나. 장문인 정도 되니까 흑상과의 거래가 가능한 것이다. 네놈이 말하는 그 접선책이 너의 소거를 요청한 거다, 애송아.”
“그, 그럼 나에게 접근한 ‘그자’들도···?”
“당연히 널 보고 온 게 아니지. 그들은 장문인이 중원 진출을 할 날을 대비해 연결해 둔 자들이다. 넌 그냥 장문인의 뜻대로 이리저리 춤만 춘 거야.”
호국영은 아연한 표정이었다.
처음 중원으로 나갔을 땐 막막했지만, 일이 술술 풀리며 마침내 커다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점창의 배경을 등에 업고 몇 년 안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일굴 수 있으리라 확신했는데.
그 모든 게··· 장문인의 뜻대로 놀아난 거였다고?
“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점창의 이대 제자, 거기서 멈출 그릇이다. 능력도 되지 않는 놈이 욕심을 부리니 이런 결과를 맞는 거지. 말이 길었군. 이만 뒈져라.”
검은 옷의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너 따위를 죽이는데 신중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호국영은 손이 하얘지도록 검 손잡이를 틀어쥐었지만, 자신이 곧 죽으리란 걸 예감했다.
“이 개새끼들아아아!”
“역시 지겨워. 모든 게 무너지고 죽음을 예감한 놈의 발악. 어쩌면 이리도 하나같이···.”
그 순간, ‘지겹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커, 꺼걱···!”
“윽! 이게 웬?! 쿨럭, 크학···!”
“뭐냐? 왜 그래? 큭! 뭔가 날 물었···! 윽, 크학!”
쿵! 쿠쿵!
호국영을 둘러싸고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던 사내 셋이 일시에 쓰러졌다.
호국영을 죽이기 위해 다가가던 사내는 마지막 사내가 쓰러졌을 때, 길쭉하고 검은 무언가가 그의 다리 쪽에서 움직이는 걸 포착했다.
“저, 저게 뭐냐! 뱀?!”
순식간에 풀숲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방금 본 건 뱀이 분명했다.
새카만 무광택의 비늘을 지닌.
그리고 동료들이 내공을 끌어올릴 틈도 없이 절명한 걸로 보아 지독한 독사가 분명했다.
“어떤 놈이냐! 감히 어떤 놈이 뱀을 푼 거야!”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살폈다.
“야생의 뱀이 가만있는 사람을 세 명이나 먼저 공격할 리가 없다!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인데 짐승을 부려서 사람을 공격하는···! 가, 가만. 짐승을 부려서···? 서, 설마······ 와족?”
“정답. 잘 맞췄어.”
와드드득―
목이 꺾인 사내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뒤엔 2년 전, 마을을 떠난 겨울 달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