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54화 (154/463)

154화

“도, 동월?”

곧 죽을 거라 생각했던 호국영은 혼이 빠져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이용하고 버렸던 겨울 달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이건 매우 좋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응목대원 네 명과 겨울 달.

어느 쪽이 상대하기 쉬운지는 대어볼 것도 없다.

겨울 달이 암습으로 응목대원들을 쓰러뜨렸지만, 모습을 드러낸 이상 자신이 질 리는 없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월매!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호국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굴만 봐서는 진심으로 겨울 달이 반가운 듯했다.

“월매라······. 잘도 그렇게 부르는군요.”

겨울 달은 울 듯 말 듯 한 표정이었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입술은 연신 씰룩인다.

호국영은 확신했다.

‘이 계집. 아직도 나에 대한 감정이 정리가 안 됐어. 흐흐!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몸과 마음을 바친 첫사랑.

호국영은 여자에 익숙했고,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잘 알았다.

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겨울 달에게 다가갔다.

“월매. 그동안 잘 지낸 거지? 2년 전 동굴에서, 월매 덕에 살아날 수 있었어. 인정해. 내 잘못을. 하지만 월매도 조직에 속한 전사니까 잘 알 거야. 임무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걸.”

호국영이 가만히 손을 내밀어 겨울 달의 뺨을 감쌌다.

“임무를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쉽게 생각했어. 하지만 월매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면서 너무 힘들었지. 임무를 완수해야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월매를 속이는 행동이니까.”

겨울 달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나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단 걸 알아. 하지만 월매. 월매에 대한 내 감정은 진심이었어. 난··· 월매를 정말 사랑했어. 평생을 같이하고 싶을 만큼.”

겨울 달이 두 눈을 꾹 감았다.

호국영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믿기 어렵겠지만, 난 월매가 계속 그리웠어. 전쟁이 끝나고 바로 중원을 다녀오는 바람에 월매를 찾지 못했지만, 보고를 마치면 바로 청죽림을 찾을 생각이었어. 월매에게 사죄하고, 정식으로 날 만나 달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호국영이 겨울 달의 가녀린 몸을 껴안았다.

“날 믿어줄 수 있겠어?”

우두커니 서 있던 겨울 달이 호국영을 마주 안았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네. 이젠 믿어요.”

‘흐흐흐. 이런 멍청한!’

호국영의 얼굴에는 징그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겨울 달이 눈물도 닦지 않은 채 말했다.

“믿어. 확실히. 네가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걸.”

콰지직!

왼편 어딘가에서 하늘로 치솟는 피.

호국영은 잠시 겨울 달을 안은 자세 그대로 멍하게 있었다.

왼쪽 목덜미가 허전해지는 감각과 분수처럼 샘솟는 핏물은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뭐지? 꿈인가?’

극통이 밀려왔다.

“끄···? 크, 크아아아악!”

호국영이 왼쪽 목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차가움이 도를 넘으면 도리어 무심해지는가.

울부짖는 호국영을 내려다보는 겨울 달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언가를 질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퉤!”

그녀의 입에서 핏물과 함께 튀어나온 것.

방금 전까지 호국영의 목에서 피를 실어 나르던 동맥이었다.

“으, 끄··· 크아아악! 네, 네년! 네년이 감히!”

호국영이 핏발 선 눈으로 겨울 달을 노려봤다.

겨울 달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아파?”

“그, 그걸 말이라고···! 이런 썅! 피, 피가! 피가 멈추질···!”

“나도 아팠어. 그거보다 훨씬 더. 난 모든 걸 잃었는데, 너만 멀쩡하면 불공평하잖아?”

호국영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그리고 중심을 잃고 도로 넘어졌다.

겨울 달은 그 모든 걸 눈에 담아두겠다는 듯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나 혼자··· 카학! 죽진 않아! 네년, 네년도 같이 가자! 빌어먹을! 씨바아알!”

차창!

호국영이 검을 빼들고 겨울 달에게 달려들었다.

겨울 달이 느슨하게 두 손을 벌렸다.

“교살(絞殺).”

패애애액―!

쾌속하게 교차한 손이 호국영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양팔이 믿기지 않는 각도로 휘어지며 그의 목을 옥좼다.

“커, 커컥!”

“너 설마 내가 약하다고 생각한 거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난 너보다 강했어. 산이나 걸음이에 비할 수 없을 뿐이지, 성년식을 통과한 또래 중에서도 난 강한 축에 속하거든.”

순식간에 등 뒤로 돌아간 겨울 달이 팔에 힘을 주자, 컥컥대던 호국영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아악! 끄아아악! 모, 커헉, 목이···!”

“아차.”

겨울 달이 스르륵 팔을 풀며 물러났다.

입으로 물어뜯었던 상처 부위를 압박하자 호국영이 죽을 듯이 괴로워한 것이다.

“네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2년 내내 기다렸어. 네가 나타날 때까지. 근데 이렇게 쉽게 죽일 순 없잖아?”

“끄··· 으윽. 사, 살려···.”

“어머? 내가 의원인 줄 알아? 못 살려. 넌 이제 죽는 거야.”

피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호국영에게, 겨울 달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지난 2년간 널 어떻게 죽일지 고민했어. 대리 주변에서 우연히 전쟁 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희 점창에 인간 조각가가 있다면서? 장문인의 아들을 살해한 장로.”

호국영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설지굉이 공유환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그다.

그 끔찍한 광경에 몇 번이나 토악질을 하고 악몽에 시달렸던지.

“아, 안 돼······. 주, 죽여. 날 그냥 주···!”

“쉿―. 닥쳐. 넌 선택할 권한이 없어.”

겨울 달이 호국영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의 옷을 찢어서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입에 틀어박았다.

“기구하다. 난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첫 살인의 대상이 첫사랑이라니.”

겨울 달은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슬프게 울었다.

“시작하자. 칼을 써본 적이 없어서 많이 아플 거야. 그건 네가 이해해.”

끔찍한 비명이 숲을 울렸다.

해가 질 무렵, 멍하게 있던 겨울 달이 눈을 들었다.

그녀의 눈엔 생기가 없었고,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던 무언가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듯 공허했다.

새빨갛게 물든 팔을 노을빛이 덮었다.

“쉬이익―.”

새카만 뱀이 재촉하듯 울었다.

“아······. 밤아? 그래. 가자······ 가야지.”

팔을 들어 얼굴을 훔치자, 붉은 물감이 얼굴을 덮었다.

비릿하고 축축한 내음에 겨울 달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가자······. 가자. 밤아······.”

울음기 어린 그녀의 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원으로.”

* * *

한동안 고요했던 푸른 대나무 마을이 부산스러웠다.

사냥해온 짐승을 해체해 고기를 발라내고, 청죽림을 누비며 맛깔난 죽순들을 채집한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수백 명이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우······.”

긴장감과 기대감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공기.

내일은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족장이 탄생하는 날이다.

산이 아침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몸을 풀었다.

“시간 참 빠르네. 내일이면 우리 중에 차기 족장이 뽑힌다니.”

어릴 때부터 고대해온 날이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오니 심정이 복잡했다.

족장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건 걸음이와 자신이 될 거라고 여겼는데, 생각지도 못한 강적들이 등장했다.

비아와 노을이.

비아, 이 못 말리는 꼴통은 성년식이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현재 족장이 되고 싶은 청년들 중 가장 큰 기대를 받는 게 비아였기에, 족장 결정전을 뒤로 미루자고 건의했다.

비아가 없는 상황에서 족장으로 뽑힌다고 해도 수긍할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서운 눈 부 족장은 단호했고, 결국 족장 결정전은 미리 공표한 대로 열리게 되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꼬맹이는.”

그리고··· 노을이.

사선을 수도 없이 헤친 듯 노을이의 몸엔 끔찍한 흉터가 가득했다.

각성한 흰 수리를 반려수로 데려왔고, 그건 와족 역사상 세 번째 있는 일이었다.

비아까지 더하면 넷이지만, 비아는 싸워서 제압한 게 아니니까.

노을이가 투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걸 보고 있자면, 어릴 때부터 봐온 동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후우······. 마음이 복잡하구만.”

산이 심란한 마음을 내뱉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몸은 좀 어떠냐.”

뒷짐을 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는 자.

그믐이었다.

“몸 상태는 좋습니다, 할아범. 다만 비아가 오지 않은 게···.”

매서운 눈이 그랬듯이 그믐도 단호했다.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 비아가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게지.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마라.”

그믐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듯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산이 너, 요즘 영묘 근처에 머물지?”

그 말을 듣자마자 산의 얼굴이 벌게졌다.

“네? 아, 네. 할아범.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됐다. 전쟁에서 여울이가 네 목숨을 살리고 둘이 가까워진 걸 모르는 사람도 있더냐. 여울이가 묘를 떠나지 못하니 네가 가는 게 맞지. 나도 그랬다.”

“아······ 네. 할아범도 그러셨군요.”

산이 덩치에 맞지 않게 수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서 말인데······ 곧 손님이 올 거다.”

“네? 손님이요? 우리 마을에?”

20년에 걸쳐 거듭된 외유.

그믐은 긴 시간 동안 중원을 오가며 많은 인연을 쌓았고, 그 중엔 간혹 마을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자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오지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지만 말이다.

“그래. 굉장히 독특한··· 아니, 피곤한 사람인데······ 중원에 나가 있을 때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았지. 그러다가 가까워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부족의 영묘에 관한 말도 나왔다. 한데 눈을 빛내며 굉장한 관심을 보이더군.”

“그래서요?”

“그게 3년 전 내가 마을에 복귀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내 한 번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잊었지. 나도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이도 수년에 걸쳐 진행하는 일이 있었거든. 한데 며칠 전 서신이 도착했다.”

“말씀하신 분이 방문하신다는 건가요?”

“그래. 제멋대로인 인간이라 서신을 보내면서 같이 출발했다더군. 와도 된다는 답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에게 알려준 경로에 검은 수리들을 파견했는데 거의 다 왔다고 한다. 아마 오늘 중으로 도착할 거야.”

손님이란 사람을 떠올리자 피곤해졌는지 그믐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엔 묘한 기대가 묻어났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할아범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산이 물었다.

“한데 저에게 그 말씀을 꺼내신 이유가···?”

“아, 그렇지. 손님이 오면 네가 영묘까지만 그를 안내해 주거라. 내일이 족장 결정전이라 이런 부탁하기 미안하다만, 청년들 중엔 네가 적격인 것 같아서. 손님을 맞을 때는 나오겠지만, 오늘은 회의가 계속 있어서 내가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구나.”

‘청년들 중엔 네가 적격인 것 같아서.’

그 한 마디로 결정 났다.

산이 걱정 말라는 듯 콧김을 뿜었다.

“어차피 잘 때 영묘 근처로 가야 하는걸요! 걱정 마세요. 할아범! 제가 책임지고 안내하겠습니다!”

“잘 때? 잘 때 거길 왜 가? 너 이 녀석, 벌써부터···.”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할아범! 여울이가 외로울 것 같아서 동굴 주변에 거처를 마련한 것뿐이에요!”

산은 손사래를 쳤고, 그믐은 피식 웃었다.

“뭐, 다 큰 놈들이 그럴 수도 있지. 난리는.”

“아·닙·니·다·그·런·거!”

벌게지다 못해 폭발할 거 같은 얼굴로, 산이 물었다.

“근데 그 손님이라는 분, 어떤 분이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