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어떤 사람이냐고? 아마 네가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인간일 거다. 아주 독특한 사람이지. 재미있을 거야.”
기대가 된다는 듯 그믐이 작게 웃었다.
‘할아범이 웃으셨어! 할멈이 돌아가신 이후로 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기만 하셨는데!’
마른 비가 너른 하늘에게 남긴 말.
어머니는 분명 아들이 행복하길 바라실 거라는 그 말.
‘할멈도 할아범이 슬퍼하는 걸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너른 하늘에게 그 말을 전해 들은 이후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세우던 그믐은 조금씩 부드러웠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산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할아범이 그렇게 표현하실 정도라니. 정말 궁금하네요. 그런데 할아범. 외부의 인물에게 영묘를 보여줘도 될까요? 지난 전쟁에서 달이를 이용했던 호국영이란 놈처럼, 금에 눈독을 들이는 경우가 생기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믐은 단정적인 말투로 산의 우려를 일축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성품 면에서든, 배경 면에서든.”
“배경··· 이요?”
“그래. 배경.”
그믐의 입에서 중원의 상계를 양분하는 거상 가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만금당. 중원에 흐르는 자금의 삼분지 일을 움직이는 가문이다. 이런 오지에 있는 금광 따위는 그들의 금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해. 아니, 군침을 흘릴 순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흑상이란 놈들과 달리 한 번도 불의한 일에 손댄 적이 없다.”
“믿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래. 그는 그 만금당의 적손이며, 믿을 만한 사람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때, 그믐의 뒤에서 검은 수리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범. 손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여어~ 아우야! 내가 왔다!”
청죽림을 헤치고 나온 노인이 활짝 웃었다.
마중 나온 와족의 인물들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아, 아우?”
“할아범. 저 손님이란 분, 할아범이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분입니까?”
그믐은 질문에 대꾸도 않고 두통이 오는지 머리를 짚었다.
“저 인간. 또 시작이군.”
늙수그레한 노인은 바삐 걸어오더니 그믐을 와락 껴안았다.
“아우야! 3년 만이 아니냐! 엄청 보고 싶었다고!”
“누가 아우란 말이오, 누가! 난 당신을 형으로 인정한 적이 없대도?”
“내가 더 일찍 태어났잖아? 그럼 내가 형이지, 인마!”
“하아······. 어쩌다가 이런 인간과 엮여서······. 아무튼 반갑소. 이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고.”
“형이 동생 보러 오는데 이까짓 게 고생은 무슨 고생! 히야~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군! 바로 눌러살고 싶을 정도야! 다들 반갑구만. 나, 금복인이라고 하오. 그래, 회효 아우가 그렇게 자랑하던 족장님이 누구신가?”
정신이 없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수다를 따라가기 힘들다.
무엇보다 와족 식구들은 전쟁 이전의 그믐보다 능청맞은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그 그믐이 한숨을 쉴 정도로 눈앞의 노인은 엄청난(?) 구석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제가 족장인 너른 하늘입니다.”
너른 하늘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전쟁 이후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믐의 어조가 누그러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노인을 반길 이유가 충분했다.
“······허. 허허. 이것 참. 대단한 사람이로군.”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내던 금복인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는데, 유쾌하기만 하던 눈빛이 너른 하늘을 본 순간 번쩍이고 있었다.
“내가 본 회효 아우는 중원 어디에 내놔도 최고를 다툴 만큼 굉장한 무인··· 아니, 전사요. 그런 아우가 족장님의 자랑을 그렇게 하더랬지. 어느 정도길래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나 했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구려.”
평생을 기인이라 불리며 강호를 전전한 노강호의 통찰력일까?
아니면 거상 가문의 핏줄을 이은 자의 안목일까?
금복인은 그저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너른 하늘이 지닌 힘을 눈치챈 듯했다.
아니, 그가 더욱 감탄하는 건 무력보다도 너른 하늘이란 사람 자체가 지닌 그릇과 품성이었다.
“왜, 우리 족장한테도 아우라고 해보지?”
그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금복인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듣는 건 사실인데,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에게까지 그렇게 막 나가진 않는단다, 아우야. 더군다나 족장님은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그릇이 아니야. 아우가 자랑할 만해. 정말 대단하군.”
“······그 말인즉슨 나는 당신이 함부로 해도 되는 그릇이다?”
그믐이 삐딱한 어조로 되물었다.
화를 내는 듯하지만, 그건 그믐이 2년 만에 처음으로 뱉는 농담이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 그렇다고 치지 뭐. 카하핫!”
금복인은 모든 이의 이목을 잡아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자였다.
또한 그 능청스러움만큼이나 묘한 호감을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와족 식구들은 난생처음 보는 유형에 당황했지만, 금세 그의 꾸밈없는 인간됨에 이끌렸다.
“하하! 정말 유쾌한 분이시군요. 할아범께서 갑자기 손님이 올 거라고 하셨을 때 놀랐습니다만, 어르신 같은 분이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편히 푹 쉬다가 가십시오.”
“그렇게 하지요. 족장님, 환영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땅 밑에 계신 분도 올라오셔서 노독을 푸시지요.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스스슥―
너른 하늘의 말에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땅속에서 그림자가 솟았다.
과거 설지굉을 일검에 쪼갤 수 있다고 단언했던 자.
금복인의 호위를 담당한 검은 옷의 사내는 복면 뒤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노야. 긴히 드릴 말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아우야. 괜찮아. 그러니 마음 편히 가져라. 앞으론 같이 움직이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노야.”
말과 달리 사내는 여전히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금복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오자마자 이런 이야기 하는 게 실례란 건 알지만, 수년 동안 너무 고대했던 순간이라 더 기다릴 수가 없구려. 족장님, 이 늙은이가 와족의 묘를 좀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네. 할아범께 미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안내할 청년을 붙여드릴 테니 따라가시면 됩니다. 저희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 이왕이면 침착한 친구보다 똥꼬발랄한 친구를 붙여주면 고맙겠소이다.”
“똥꼬··· 발랄까지는 모르겠고, 시원시원한 아이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너른 하늘은 넉넉하게 웃었다.
“어르신. 중원이란 곳은 운남과 많이 다르다지요?”
영묘로 향하는 길.
산이 금복인에게 물었다.
원시의 모습을 간직한 운남의 정경에 취해있던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은 무슨 놈의 어르신.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라.”
“하하핫! 할아범 말씀대로 정말 독특하시네요. 못해도 마흔 살 이상 차이가 날 텐데 형은 좀 양심이 없는 거 아닙니까?”
“으엉? 이놈이?”
금복인이 우스꽝스럽게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중원이라······. 회효 아우에게 듣지 못했나?”
“듣긴 많이 들었지요. 하지만 이방인의 입장과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의 시선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음. 별로 좋은 곳은 아니다.”
“그런가요?”
“그래. 사람이 무지하게 많고, 그만큼 각박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몰라도, 정신적인 여유가 없지.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살아 내야 하는 곳이다.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겠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생존 경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구나.”
“음. 좀 어렵군요.”
“아까 잠깐 본 게 전부지만, 여긴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와 행복이 깃들어 있어. 사람마다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겠지만, 난 와족이 축복받은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이셨나요?”
“그럼. 그렇고말고.”
어느덧 숲이 끝나고 영묘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할아범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2년 사이 앳된 티를 벗고, 여인이 된 여울이었다.
주술사 특유의 녹색 옷을 입은 그녀는 단아하고 품위가 있었다.
“오오, 반갑네. 난 금복인이라고 하네. 부족 유일의 주술사시라고?”
“네. 어르신.”
“고귀한 전통을 지키는 분이시군. 그렇다면 존중받아 마땅하지. 잘 부탁하네.”
남녀 불문하고 자기보다 어리면 형을 자처하는 그가 여울에게는 반 존대를 쓰고 있었다.
족장과 부족 유일의 주술사.
그가 존칭을 쓰는 나름의 기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보고 싶으신 게 벽화와 유골함이라고 하셨지요? 이쪽으로.”
와족의 선조들이 생존을 위해 운남의 야생과 투쟁했던 기록.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수많은 동식물의 그림.
입구에 그려진 벽화를 보고 금복인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럴 수가!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진 벽화라니! 게다가 이 놀라운 보존 상태! 이건··· 이건··· 인류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야! 어떠냐, 금벽아?”
금복인의 눈은 희열에 차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잠겨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평생을 살아온 노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청죽림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금발의 청년이 더듬더듬 대꾸했다.
“대단··· 하군요. 중원 어디를 가도 이보다 가치 있는 벽화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이 먼 곳까지 내려온 보람이 있네요, 노야.”
청년은 홀린 듯이 벽화들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여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금복인은 또 한번 탄성을 질렀다.
“선조들의 유골을 항아리에 모시는군! 아주 오래전 중원에도 이와 같은 풍습이 있었지. 또한 내 연구에 따르면 과거 옥저(沃沮)라는 동쪽의 소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선조들의 뼈를 보관했어. 거긴 항아리가 아닌 곽(槨)에 유골을 담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야.”
같은 것을 보더라도 느끼는 건 전혀 다른 법이다.
벽화와 유골함을 쓰레기 취급했던 호국영과 달리 금복인과 금벽파라는 숨겨진 보물창고를 발견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믐의 장담대로, 금복인은 번쩍이는 금광석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소, 소저! 우리 오늘 여기서 밤을 좀 새도 되겠는가?”
산의 옆에 선 여울이 예쁘게 웃었다.
“얼마든지요.”
* * *
‘결국 못 만났구나.’
마른 비는 운남의 숲을 걷고 있었다.
여규를 만나 회포를 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겨울 달로 하여금 부족을 떠난다는 결정을 내리게 한 호국영을 떠올렸다.
아니, 2년 전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떠나간 순간부터 마른 비는 호국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는 마주치겠지.’
창산에 머무는 중, 대리 인근에서 호국영이 겨울 달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실을 마른 비가 알 리 없었다.
그가 성년식과 비슷한 개념의 중원행을 떠나 있었고, 곧 돌아올 시기가 되었다고 들었지만, 마냥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여규에게 그가 돌아오면 와족에 알려달라는 부탁을 하고, 마른 비는 창산을 나왔다.
가까운 시일 안에 운남을 넘어 ‘그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긴 채.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별비야?”
어느덧 고개를 드니 숲이 끝나 있었다.
언제 봐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정경.
저 멀리 푸른 빛깔의 대나무 숲이 훌쩍 커버린 마른 비를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