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족장 결정전
“하아암!”
금복인은 어제 금벽파라와 함께 영묘의 벽화를 분석하며 밤을 지새웠다.
스스로 고고학이란 학문을 창안하고,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온 지 수십 년.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는 언젠가 이 작업들이 인류사에 큰 공헌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이 오면, 운남 오지의 부족들이 천 년간 관리해 온 벽화는 진정한 가치를 평가받게 될 터였다.
‘응? 이것…?’
그리고 금복인은 동굴 중간쯤에서 그의 믿음을 확인시켜 줄 벽화를 발견했다.
오래전,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발굴하고, 복원했던 고대 맹수의 뼈.
그것의 실존을 증명해줄 그림이 거기에 있었다.
“이, 이것 봐라! 금벽아! 있었어! 있었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어!”
헐레벌떡 달려온 금벽파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발의 청년은 두 손으로 입을 감싸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검치호! 노야의 말씀이 맞았어요! 역시, 역시…!”
뼈를 발굴하고 복원하며, 두 사람은 검치호라는 맹수가 과거에 존재했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십여 년 전의 설지굉이 그랬듯, 사람들은 그들을 사기꾼으로 매도하고, 비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때와 장소에서 얻게 된, 자신들의 연구를 뒷받침해줄 증거.
와족의 영묘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노인과 청년에게 그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뭘 그리 부들부들 떨고 있소?”
그때, 새벽의 선선한 공기를 헤치며 그믐이 찾아왔다.
“아, 아우! 이것 봐! 이것 보게! 검치호, 검치호의 그림이야!”
“응? 칼이빨? 그게 왜?”
“칼이빨? 자네들은 칼이빨이라고 부르는가?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있었어! 이놈, 있었다고!”
“뭐라는 거요. 당연히 있었겠지. 지금도 있구만.”
그믐은 별 희한한 소릴 다 한다는 듯 툭 뱉었다.
“……응? 지금도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거, 멸종한 종인데?”
“우리도 그런 줄 알았소. 근데 있던데? 그거 저 위에 애뢰산에 가면 한 마리 있소.”
금복인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자네, 범이랑 헷갈린 거 아닌가? 이건 이미 멸종한 지가…….”
그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평생을 야생에서 살아온 우리가 그걸 구분 못 할 것 같소? 그 망할 놈한테 우리 식구들 여섯 명이 살해당했단 말이오. 아, 은빛여우까지 하면 일곱인가……. 당신, 중원 출신이니 점창파는 아시지?”
“점창?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파 말인가? 여기 운남에 터 잡고 있는?”
“그래. 그놈들. 2년 전에 거기 설검대인가 하는 놈들도 족장의 아들을 잡으려고 애뢰산에 들어갔다가 몰살했소. 그중 태반이 그 칼이빨한테 죽은 거고.”
갑자기 밀려드는 이야기를 따라잡기가 힘들다.
금복인이 혼란스런 얼굴로 물었다.
“점창? 점창파가 와족 족장의 아들을 잡으러 갔다고? ……왜? 자네들, 점창파와 척이라도 진 건가? 그리고… 검치호한테 점창의 검사들이 죽어? 아니, 자, 잠깐만! 설검대라고 했나? 그거 아마 지굉 아우가 점창에 들어가서 창설했다는…….”
이번엔 그믐이 물을 차례였다.
“지굉? 그거 설마 설지굉인지 살쾡인지 하는 그놈인가? 점창의 장로? 그놈이랑 형 동생 하는 사이요?”
“으엉? 자네, 지굉 아우를 아나?”
그믐과 금복인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우리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소.”
“……그래야겠군. 지난 3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믐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일단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해 못 할 일이지만 칼이빨 그거, 한 마리 살아 있소. 아, 아니군. 이제 죽었네. 족장의 아들이 얼마 전에 그놈을 사냥했거든.”
겨우 놀라움을 추슬렀던 금복인은 다시 기절할 듯 소리 질렀다.
“뭐, 뭐라?! 죽였다고? 하나 남은 검치호를?!”
“아씨. 지금까지 뭘 들은 거요? 그놈이 우리 식구들을 해쳤다니까? 당연히 복수해야 할 것 아니오?”
오늘따라 뭔가가 계속 어긋나는 두 노인이었다.
금복인은 좋은 걸 보여주겠다는 그믐을 따라 숲길을 걷고 있었다.
두 노인의 뒤에는 금벽파라와 금복인을 호위하는 흑색 무복의 남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허! 점창이 그런 짓을…! 믿기지가 않는군. 천하 정파를 영도하는 구파일방의 하나가 어떻게…….”
와족과 점창 사이에 벌어진 전쟁.
그리고 점창이 저지른 만행들.
금복인은 그믐에게 실상을 들으며 진심으로 분노했다.
“공지량이라는 점창의 장문인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소. 대단히 뛰어난 자더군. 물론 나쁜 쪽으로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알려지지 않은 거지? 무림의 문파가 군용 병기를 사용했다고? 허허, 지금 중원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황실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걸세.”
“운남의 위치상 중원의 눈길이 닿지 않으니 가능했던 거겠지. 자체적인 정보 은폐는 물론이고, 황실에서 파견한 총독까지 매수해서 일을 벌였더군. 자신들의 본거지를 전장으로 삼았고 말이야.”
그럼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금복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토록 철저하게 준비한 점창을 상대로 이겼단 말이지? 중원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운남의 토착 부족이 구파일방의 하나를 일대일로 꺾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가 진동을 하겠군. 수많은 이들이 와족과 교류하기 위해 줄을 설 걸세.”
“순진한 소리 하지 마시오.”
그믐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중원 무림의 사정은 모르지만, 거기가 복마전 같은 곳이란 건 잘 알고 있소. 정파, 사파, 그리고 마교.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새외의 세력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믐이 고개를 돌려 금복인을 바라봤다.
“한족의 입장에서 우린 정체를 알 수 없는 변방의 야만 부족일 뿐이오. 그런 우리를 순수한 친교의 대상으로 바라볼 리가 없지. 둘 중 하나요. 이용하거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없애버리거나. 점창을 무너뜨릴 정도니 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겠지. 우린 그런 귀찮은 일을 겪는 걸 원치 않소.”
그믐이 북쪽 저 멀리, 창산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쟁이 끝나고, 점창은 변하고 있더군. 더디지만, 우린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소. 모든 일의 주범이었던 놈도 힘과 권력을 잃고 평생을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할 신세가 됐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일들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아 주시오.”
금복인이 깊은 눈으로 그믐을 바라봤다.
그리고 툭 던지듯 말했다.
“형이라고 부르면 그렇게 하지.”
“큭큭. 그런 표정으로 그런 소리라니. 역시 당신은 웃기는 사람이요.”
그믐과 금복인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앞을 바라봤다.
어느덧, 숲이 끝나 있었다.
“대, 대단하군!”
원시림의 한복판에 있는 개활지.
거기엔 난생처음 보는 크기의 나무가 있었다.
“어마어마하구나!”
나무가 드리운 그늘은 작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였다.
나무의 꼭대기를 확인하려면 뒤통수가 뒷목에 닿도록 꺾어야만 했다.
품과 높이도 엄청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이었다.
숨을 들이킬수록 몸에 축적된 피로가 사라지는 게 체감될 정도였으니까.
“노야. 여기는…!”
무를 모르는 금복인은 그저 상쾌하고 맑은 곳이라는 느낌 정도지만, 그의 호위를 담당하는 사내는 신령목이 내뿜는 자연기를 뚜렷이 감지할 수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눈이 커졌다.
“이런 곳에서 내가심법을 수련한다면…… 굉장한 효능을 보겠군요. 노야를 따라 천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대자연의 기운이 이토록 충만한 곳은 처음입니다.”
“그게 우리가 이 나무를 신령시하는 이유일세.”
그믐이 사내에게 눈을 돌렸다.
“항상 몸을 숨기고 있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군. 이제 통성명 정도는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맡은 임무가 이렇다 보니……. 결례를 용서하시길. 전흠이라 합니다, 어르신.”
“전? 성이 전 씨였는가? 어지간한 고수들은 찜 쪄 먹을 실력에 그 비범한 은신술. 게다가 전 씨라면……. 중원을 돌다가 어떤 단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네 혹시…….”
“예. 짐작하시는 그게 맞을 겁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시길.”
그믐이 새삼스런 눈길로 전흠을 바라봤다.
그건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금복인의 호위로 살아가게 되었냐는 눈빛이었다.
“누구나 한두 개쯤 말 못 할 사연이 있기 마련이지. 아우가 순순히 이름을 밝힌 건 자네가 처음이야. 자신의 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친구가 회효 아우를 믿어도 되겠다고 판단했나 보군.”
그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콰아아앙!
개활지를 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투콰카칵! 파바박! 쾅!
주먹과 발이 교차하고, 어깨와 팔꿈치가 부딪힌다.
쳐올린 무릎이 복부를 쑤시고, 날카로운 손날이 목덜미를 후려쳤다.
“오오오!”
“차아앗!”
푸른 잎들이 하늘을 떠받치듯 드리운 곳.
부족의 신령목 아래서 청년 둘이 난데없이 격돌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금복인을 영묘까지 안내해준 산이었다.
“뭐, 뭔가? 갑자기 왜?”
금복인은 놀라서 그믐을 쳐다봤고,
“좋은 구경을 시켜준다고 하지 않았소. 당신, 날짜를 기가 막히게 맞춘 거요. 오늘이 다음 대를 이끌어 갈 차기 족장을 결정하는 날이거든.”
그믐은 두 청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꿰뚫듯이 살피고 있었다.
휘휘휙―
산의 공격은 간결하고 경쾌했다.
턱 밑에 붙인 두 주먹이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 뻗어나가며 안개걸음의 움직임을 봉쇄했고, 서서히 간격을 좁혔다.
한 방이라도 제대로 허용하는 순간, 곧바로 적을 침몰시킬 연타가 쏟아진다는 걸 알기에 안개걸음은 반격할 기회를 잡기가 힘들었다.
“연(連), 번갯불.”
콰콰쾅!
그렇다면 모습을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된다.
힘과 속도.
둘의 장점은 명확했고, 서로를 이기기 위한 법도 명료했다.
인간의 동체시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극속의 기동.
산의 주변에서 안개걸음의 잔상이 번쩍였다.
“타아앗!”
빠아악!
하단.
안개걸음의 정강이가 산의 허벅지 바깥 부분을 때렸다.
산이 주먹을 뻗어 요격을 시도했지만, 안개걸음은 이미 간격을 벌린 후였다.
스팟!
산이 주먹을 회수할 때.
그대로 다시 들어간다.
한 팔로 땅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 발차기 연타를 퍼붓는다.
초저공에서 수평으로 펼친 소낙비가 산의 몸을 두드렸다.
빠바바박!
밀리지만, 밀리지 않는다.
한 걸음 밀려났다가도, 다시 두 걸음 전진한다.
굳게 조인 산의 육체는 단단한 바윗덩이 같았다.
두두두두두!
안개걸음의 발차기는 산의 자연기와 강피를 뚫고 철골까지 울렸지만, 산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산이 자신의 간격 안에 안개걸음을 담았을 때.
그의 등이 전면을 향하며 공간 전체를 깨부술 충격파를 떨쳐냈다.
그리고 안개걸음은 거꾸로 회전했다.
“불벼락?!”
지켜보던 와족의 전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매서운 눈의 비장의 기예가 마침내 안개걸음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자연기를 머금은 뒤꿈치가 불꽃을 토했다.
“저건 천둥바위!”
우둔한 땅의 비기를 습득한 건 산도 마찬가지다.
전면을 뒤흔드는 강대한 충격파와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야만의 징벌.
귀청을 찢는 충격음이 사위를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