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빠악!
퍼어엉!
산은 왼쪽 어깨가 부러지며 땅으로 주저앉았다.
안개걸음은 내장이 진탕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작은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서로에게 달려들 뿐이다.
이 순간, 모든 걸 쏟아내지 못한다면 평생토록 후회할 터.
왼발 진각을 내리찍은 산이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것은 일타에 모든 걸 싣는 회색 곰의 앞발을 닮아 있었다.
“곰 발.”
부아아아앙!
천둥바위를 개량한 일격이다.
광범위 충격파를 응축시키고 응축시켜 주먹에 전이한 강격.
2년간의 수련 끝에 터득한 산만의 비기였다.
안개걸음이 가만있을 리 없다.
이를 악 물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극통을 억누르며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의 입술이 열렸다.
“섬표(閃豹).”
번쩍!
흑표범의 기동에 번갯불을 담는다.
소낙비의 연타에 불벼락의 강렬함을 조합하니, 섬전 같은 발차기가 폭우처럼 내리꽂혔다.
그믐의 집중적인 지도하에 처절한 단련을 거친 두 사람은 이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힘과 속도.
어느 쪽이 우위인가.
적어도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의 대에서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재능이 각자의 특화된 장기에 몰두했지만, 엎치락뒤치락하며 이십 년을 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이번 세대에서도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했다.
충돌 이후, 정신이 날아간 둘이 동시에 풀썩 엎어졌으니까.
“…….”
먼저 일어난다면, 그쪽이 승자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움찔대는 몸을 겨우 억누르고 있던 여울은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산이 오빠! 걸음이 오빠!”
지난 2년간, 이 순간을 위해 갈고 닦은 치유의 술이 연녹색 빛을 발했다.
“어, 엄청나구만…….”
금복인은 입을 쩍 벌린 채 감탄하고 있었다.
솔직히 뭐가 뭔지도 모르고 번쩍이는 푸른빛들을 홀린 듯 바라봤을 뿐이다.
평생을 강호에서 지내며 많은 싸움을 보아왔지만, 이 정도 수준의 격돌은 보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 주체들을 스물 안팎의 청년들로 한정한다면,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리고 산과 안개걸음의 격돌을 분석할 능력이 되는 전흠은 아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가? 우리 애들이. 꽤 쓸 만하지?”
그믐이 말을 잃은 전흠을 흘깃 바라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더듬더듬 대꾸했다.
“저 둘…… 갓 스물을 넘었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올해로 정확히 스물하나지.”
“저 청년이 저희를 안내해줄 때 비범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 당장 중원에 내놔도 저 또래에서는 대적할 자가 드물겠군요. 정파의 후기지수 중 최고라는 칠룡(七龍)에게도 밀리지 않을 겁니다.”
그믐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칠룡? 호칭 한 번 유치찬란하군. 한족들은 용을 참 좋아한단 말이야. 정파가 용이니, 사파의 후기지수들은 호랑이쯤 되나?”
“네. 사파 후기지수 중 최고로 꼽히는 네 명은 사호(四虎)라고 하죠.”
“……괜히 물었군. 칠룡과 사호라니. 그 기적 같은 작명 감각에 나까지 오염되겠어.”
전쟁의 기억과는 관련이 없는 외부의 인물들이어서일까?
그믐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금복인, 전흠과 말을 섞으며 점차 과거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너른 하늘이 보았다면 절로 웃음을 지을, 긍정적인 변화였다.
“족장 결정전이라……. 그렇다면 저 둘 중에 한 명이 저분의 뒤를 잇는다는 말이군요.”
전흠이 눈을 돌려 와족 전사들의 중앙에 앉아 있는 너른 하늘을 바라봤다.
오래전, 그믐을 처음 보았을 때도 엄청나게 놀랐지만, 어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너른 하늘을 보자마자 전흠은 등줄기를 훑는 전율을 느꼈다.
이자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들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고 이 오지에서 뼈를 묻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금복인에게 전하고자 했던 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럴지도. 아니, 그렇게 만들 작정으로 최선을 다해 가르쳤지만, 사실 지금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어렵… 다니. 저 둘을 능가하는 인재가 또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은지 어떤지는 붙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그럴 것 같군. 저기 있지 않나. 저 꼬맹이.”
그믐이 가리킨 건 노을이었다.
아무런 기세도 흘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그녀는 산과 안개걸음의 싸움을 보고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저 여인이…… 둘을 능가한다고요?”
전흠이 눈살을 좁히며 노을을 살폈다.
그러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노을과 눈이 마주쳤다.
전흠은 흠칫 놀랐지만, 노을은 작게 웃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내 시선을 바로 알아채다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전흠은 제대로 살피기로 했고, 내공을 운용하자 노을의 몸 내부에 숨은 막대한 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산과 안개걸음의 싸움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그의 눈이 커졌다.
“그렇군요. 저 소녀, 아니 여인도 정말 대단….”
그 순간, 북쪽의 숲이 열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청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털빛의 백호와 함께.
“드디어 찾았다! 왜 다들 여기 모여 있어요?”
청년은 질문을 건넸고,
“비, 비아? 비아다!”
“망할 꼬맹이가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나타난 거냐!”
“살아 있으면 재깍 복귀할 일이지, 저 사고뭉치를 그냥!”
와족 식구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안도와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노을은 말없이 마른 비에게 걸어갔다.
“어? 노을이? 이야, 3년 만이네! 잘 지냈지?”
마른 비가 활짝 웃으며 노을을 반겼다.
“했어, 안 했어?”
뜬금없는 물음에 마른 비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응? 했냐니? 뭘?”
“내 생각.”
개활지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놀라움에서 감탄으로, 그리고 왠지 모를 부끄러움으로.
소리 없는 응원도 많았지만, 부러움과 짓궂은 키득거림이 소수의 격려를 압도했다.
“키히야~ 좋을 때구만! 뼈가 녹을 나이지! 아무렴!”
뜻을 짐작하기 힘든 탄성도 간간이 들렸다.
하지만 노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마른 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릴 뿐이다.
“빨랑 말 안 해? 내 생각했어, 안 했어?”
“어… 음……. 사실 안 했어. 단련하느라 바빠서. 미안.”
마른 비의 대꾸에 전혀 다른 의미의 침묵이 흘렀다.
싸해진 분위기가 개활지를 메웠다.
“허이구……. 저 병신.”
뼈가 녹을 나이라고 농담을 했던 누군가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댔다.
“그럴 줄 알았어.”
노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방긋 웃었다.
오히려 그 솔직함이 고맙다는 느낌이었다.
“나, 달라진 거 없어?”
노을의 얼굴과 몸엔 독수리 발톱에 채인 상처가 한가득이었다.
바뀐 게 없냐고 묻는 노을의 음성은 처음으로 작게 떨리고 있었다.
노을의 볼에 남은 상처를 쓰다듬으며, 마른 비가 말했다.
“많이 다쳤구나. 진짜 고생 많았겠어. 지금은 아픈 데 없는 거지?”
“으, 응……. 아픈 데는 없어.”
“다행이야.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해졌어. 정말 대단해. 역시 노을이 넌 멋져.”
해맑은 웃음이었다.
마른 비의 말은 노을을 어엿한 한 명의 전사로 바라보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었던 노을은 그게 기꺼웠다.
혹독했던 지난 3년을 오롯이 들여다 봐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시큰했다.
하지만 당장은 이 이상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지금은.
3년 전처럼, 노을은 웃었다.
“성년식을 출발할 때, 이야기했지? 3년 후에는 비아 너보다 강해질 거라고.”
노을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그 말을 확인할 시간이야. 비아 네가 시간을 기가 막히게 맞췄어. 나는 어울릴 상대가 없었거든.”
말을 마친 노을은 등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갔다.
개활지 중간까지 걸어간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이리 나와, 비아야. 한판 붙자.”
‘원래 성년식을 다녀오면 서로 싸우는 거였나?’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3년 전에 산이 형과 걸음이 형이 싸웠던가?
아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그때 싸운 건 큰 발과 검은 밤이었다.
‘뭐지? 그사이 뭔가 바뀐 거야?’
가만 보니 산과 안개걸음이 한편에 쓰러져 있었다.
척 봐도 둘은 한바탕 겨룬 게 분명했다.
그리고 부족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자신이 나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가 보네. 뭔가가 바뀌었나 봐. 단련의 정도를 측정하는 건가?’
갑작스럽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가 노력해 얻은 힘에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고, 모두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다.
부족의 행사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마른 비가 이게 족장 결정전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뭐, 좋아. 해보지 뭐.”
마른 비가 빙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여자라고 힘을 아끼면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그럴 리가. 알잖아. 한 번도 그런 적 없다는 거. 난 노을이 너랑 대련할 때 항상 최선을 다했어.”
“그래. 그래서 내가 비아 널 좋아하는 거지.”
노을은 웃으며 자세를 잡았고,
“크으, 비아 저 병신! 저놈 저거 좀 모자란 거 아니야?”
앞서 농담을 했던 사내는 자신만 속이 터지는 건지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봤다.
스르륵―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에서 연마한 기동.
노을의 발이 고양이의 사뿐함을 담았고, 부드럽게 흐르는 다리는 구름의 유유함을 그렸다.
빠르면서도 유연한 발놀림이 노을의 신형을 쉴 새 없이 흔들며 전진시켰다.
그 움직임만으로도 노을의 지난 3년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와족의 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을 터뜨렸다.
“가볍게 시작할까? 일단 올빼미 사냥부터.”
그믐이 창안한 날카로운 수격.
이제는 수리의 눈 전사라면 누구나 익힌 기예지만, 그 경지가 놀랍다.
상하좌우를 뒤덮으며 내리꽂히는 손은 어둔 날개의 발톱 그 자체였다.
“그건 나도 자신 있어.”
마른 비 또한 올빼미 사냥으로 마주쳐 갔다.
그리고 금세 눈이 커졌다.
막상 마주쳐 보니 2년 내내 맹금류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모방한 노을의 그것은 훨씬 높은 경지에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마른 비가 내뻗은 수격들은 모조리 중간에서 차단당하며 맥이 끊겼다.
‘숙련도와 변화에서 밀려! 그렇다면…!’
쾌애애액―!
모든 힘을 일점에 모은 최속의 일격!
올빼미 사냥, 강습이 대기를 뚫었다.
“흡!”
굉장한 힘과 속도.
이건 얕볼 수 없다.
노을의 몸이 기울어지고, 양손이 현란한 변화를 그렸다.
그녀의 눈이 마른 비의 손이 지나칠 허공의 일점을 잡아챘다.
“올빼미 사냥, 요격(邀擊).”
슈슈슈슉― 쩌정!
연타이되 일점 집중타.
부족한 힘을 정확한 타격과 횟수로 메꾼다.
몸에 붙인 이래 너른 하늘과의 대련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강습이 중간에서 튕겨 나갔다.
“제대로 하랬지.”
노을의 눈이 번쩍였다.
그녀의 몸은 이미 마른 비의 발밑까지 파고든 후였다.
할퀴듯 구부린 손은 설산의 제왕이 자랑하는 발톱을 닮았으니.
“독수리 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