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쾌애 쾌애애액!
상하에서 짓쳐 드는 흰 수리의 칼날이 마른 비를 덮쳤다.
“큭!”
무소의 뿔.
급하게 내친 왼쪽 팔꿈치로 노을의 오른손을 쳐냈다.
힘에서 밀린 노을은 흔들렸지만, 흔들린 자세 그대로 공격을 이어 왔다.
놀라운 균형 감각.
발 한 번만 삐끗해도 황천으로 가는 설원지대에서의 2년은 노을을 초인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퍼어억!
위에서 내리꽂힌 왼손이 마른 비의 어깨를 잡아챘다.
자연기가 뚫리고, 강피가 찢어진다.
어깨의 살점이 후드둑 찢겨 나갔다.
평온했던 표정과 달리 노을은 전심전력을 다해 마른 비를 상대하고 있었다.
‘안이했어.’
도저히 적으로 볼 수 없어서일까.
대충한 건 아니지만, 각오가 부족했다.
노을은 온 힘을 쏟아부어야만 저지할 수 있는 상대였다.
마른 비의 내심을 눈치챈 노을의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너! 똑바로 안 해!”
휘돌려 찬 뒤꿈치가 마른 비의 명치를 노렸다.
“미안. 집중할게.”
콰아앙!
정말 오랜만에 밟는 진각이다.
강렬한 자연기가 돌풍처럼 휘감기고, 노을의 몸이 떠올랐다.
순정한 일격이 장전되니, 와족 정권 바위 부수기가 사선으로 솟구쳤다.
“야아압!”
이래야지.
이래야 할 맛이 난다.
노을이 몸을 뒤집으며 낭랑하게 외쳤다.
“수리 날개!”
휘리릭―!
고공에서의 운신은 제약되기 마련이거늘.
바람의 결을 잃고, 자연기를 발출하여 선회한다.
공중에서 여덟 번 몸을 뒤집는다는 곤륜(崑崙)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 이러할까.
아직은 짧은 이동이 한계지만, 노을의 몸은 바람을 탄 흰 수리처럼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춤췄다.
마른 비의 정권이 목표를 잃었을 때, 노을은 또 한번 간격을 허물었다.
“이 악 물어!”
팔꿈치가 턱을 강타한다.
무릎이 명치를 후벼 파고, 뾰족하게 세운 주먹이 인중을 쑤셨다.
하나같이 날카롭고 정확한 타격들.
교룡갑을 발동했음에도 뼛속까지 울리는 예격이다.
존재 자체를 부숴 버릴 듯한 검치호의 앞발에 비할 순 없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부수는 살상기였다.
“크윽…!”
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이 정도에 쓰러질 마른 비라면 무수한 사선을 넘지 못했을 터.
범의 앙심을 발동하자 육체에 충만한 힘이 깃들고, 착지 중인 노을에게 솔잎 털기가 쏟아졌다.
빠바바바박!
힘에서 밀리니 기술이 발동된 다음은 늦다.
힘이 터져나가기 전에 요격한다.
마른 비가 뻗은 발차기 연타가 모조리 중도에 가로막혔다.
휘리릭―
좋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천둥바위로 공간 전체를 밀어버리려는 순간, 노을이 바싹 다가와 몸을 밀착시켰다.
“어… 어어…!”
지켜보던 우둔한 땅이 속이 터질 만큼 느린 감탄을 뱉었다.
천둥바위가 터지기 전, 몸을 돌리는 순간에.
거리를 완전히 죽여서 기술을 미연에 차단한다.
앞으로 내민 마른 비의 등판에 올빼미 사냥이 꽂혔다.
퍼퍼퍽!
“윽… 큭!”
마른 비는 후퇴했다.
그리고 뒤로 기동하는 동시에 거꾸로 회전했다.
불벼락을 뿜어내려는 찰나!
“늦어.”
한 쌍의 독수리 발톱이 아래에서부터 솟구쳤다.
마른 비는 뒤꿈치를 내려찍기도 전에 허벅지를 내주어야만 했다.
“허어…!”
이번 탄성은 매서운 눈이었다.
후퇴 기동과 동시에 발동된 불벼락.
기가 막힌 임기응변의 한 수였거늘.
곧바로 따라붙은 노을은 이번에도 기술이 발동되기 전에 끊어버렸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싸움법이다. 할아범의 노련함을 닮아 있지만, 그것과도 달라. 와족에는 없던 전투 기술이다. 다들 집중해서 보도록.”
너른 하늘이 족장 결정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전사가 주목할 만큼 노을의 싸움은 독보적이었다.
‘까다로워!’
마른 비는 이런 식의 대응을 본 적이 없다.
힘과 속도를 차단하는 정확성.
노을은 단 하나의 투로조차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더 이상 가다듬을 수 없을 만큼 절제된 동작들은 그저 눈부실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검치호를 사냥할 때와 같은 단타 중심의 연계기.
산 허물기, 뼈창, 악어 이빨, 거목 쪼개기에서 소낙비까지.
공격 사이의 틈을 최소화한 기술들이 연달아 쏟아졌다.
파고들 틈을 찾지 못한 노을은 연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익!”
이대로는 진다.
계속 물러나다 보면 허점이 보이기 마련이고, 틈을 내주는 순간 끝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노을은 무리해서 반격을 준비했다.
‘지금!’
마른 비는 노을이 초조해한다는 걸 눈치챘다.
수많은 전투를 겪은 마른 비는 충분한 경험을 쌓았고, 축적된 경험은 싸움이 길어질수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노을이 피해를 각오하고 다가선 순간, 몰아치던 마른 비는 훌쩍 물러났다.
“……?!”
노을의 눈에 의아함이 차오른 순간.
쾅!
마른 비는 전진했다.
번갯불, 그리고 중선오격.
그믐의 살상기까지 꺼내야 할 만큼 노을은 강했다.
속도 하나에 모든 걸 쏟아부은 결정타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쉭, 터턱, 쉭― 쾅!
피하고, 막고, 또다시 흘렸다.
하지만 마지막 한 방은 그러지 못했다.
발차기가 턱에 걸리자, 노을은 그대로 날아올랐다.
털썩.
꿈틀대는 어깨.
경련하는 다리.
일어서고자 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의지와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노을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으… 으윽…!”
싸움은 끝났다.
마른 비는 다가가서 노을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벌떡!
경련하던 노을은 일어섰다.
눈이 풀려 있지만, 3년간 투쟁해 온 본능은 그녀에게 돌진을 명했다.
노을의 몸이 하얗게 빛나고, 막대한 자연기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어? 어어…? 노을아? 정신 차려, 노을아!”
외로운 투쟁을 감내하며 쌓은 전투 본능.
그건 아마도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한 수일 터였다.
그녀의 주위가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얘지고, 푸른 자연기가 명멸했다.
‘이건… 그냥은 못 막아!’
저 어마어마한 자연기.
의식이 날아가자 체내에 웅크리고 있던 음애고설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잠력을 격발했다.
순수한 설원의 정수가 마른 비를 향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노을이가 위험해!’
저대로 두면 무제한적으로 기운을 끌어 쓰다가 쓰러질 거다.
의식이 없으니 위험에 대처하지도 못한다.
‘제길…!’
방법이 없다.
일단 기운을 상쇄하고 노을의 안전을 확보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 노을을 죽일 순 없었다.
마른 비는 최악의 경우 팔다리 하나 정도는 내줄 각오를 했다.
“뢰창.”
우르르릉―!
검치호를 사냥하기 위해 만든 기술.
하늘을 울리는 우레와 인간의 전쟁 병기를 모방해 만들어낸 자연기의 창이 마른 비의 앞에 떠올랐다.
“뭐, 뭐냐? 저게!”
와족의 전사들은 경악했다.
단순히 육체 강화와 기술의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자연기를 활용하는 게 아니다.
저런 건 와족 역사상 딱 한 명만이 선보였다.
모두가 너른 하늘을 돌아봤고, 너른 하늘은 심각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이런…!”
후아아악―
너른 하늘의 양손에 대자연의 화기와 냉기가 생성됐다.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자연기를 실체화한 둘이 대견하고 놀랍지만, 딱 봐도 아직은 제어가 미숙하다.
게다가 노을은 의식이 날아간 상태였다.
저대로 놔두면 어느 한쪽이 죽거나 크게 다칠 터.
그리고 아들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희생할 각오를 한 듯했다.
너른 하늘이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휘아아악―
마른 비가 구현한 우레의 창.
노을의 본능이 뿜어낸 설산의 기운.
너른 하늘은 서리불꽃을 융합하기 전의 화기와 냉기로 양쪽을 한꺼번에 막아섰다.
퍼어어어엉―!
폭음이 터지고, 후폭풍이 휘날린다.
마른 비와 노을의 기운을 정확하게 가늠하여 둘 모두를 상쇄한 너른 하늘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후우……. 이 녀석들, 뭘 먹고 다녔길래 이런 기운들을……. 이 나이에 잘도 이런 위험한 것들을 만들어 냈구만.”
말과는 달리, 정신을 잃은 둘을 양팔에 안은 너른 하늘은 대견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기절에서 깨어난 마른 비는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디서 뭘 하고 다니다가 이제 온 거냐, 검치호 사냥은 어땠냐, 치사하게 혼자서 뭘 처먹은 거냐, 그 번쩍이는 자연기의 창은 누가 가르쳐 준거냐…….
점창에 혼자 다녀왔단 이야기를 했을 때, 매서운 눈은 사정없이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정신 나간 꼬맹이가 거기가 어디라고! 그놈들이 회까닥 돌아서 널 해치면 어쩌려고 거길 기어 들어가!”
버럭 화를 내며 노발대발하지만, 결국은 마른 비에 대한 염려의 표현이었다.
마른 비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죄송하다고 꾸벅였다.
“검치호가 정말 있었는가? 그놈을 직접 보았어? 진짜로 그놈을 사냥한 게야?”
처음 보는 한족의 노인이 떨리는 눈으로 묻자, 마른 비는 검치호의 송곳니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금복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그 기형적인 이빨을 들여다보았다.
“훨씬 단단해. 내가 캐냈던 뼈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치… 수천 번 담금질한 철 이상의 강도가 아닌가. 이건 단순히 세월의 풍화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화? 또는 변이? 모르겠다, 모르겠어. 네가 사냥한 검치호는 과거의 종을 아득히 뛰어넘는 어떤 것인 게 분명하다. 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금복인이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 노을이 다가왔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어떻게 된 건지를 물었고, 자신이 벌인 일을 깨닫고 마른 비에게 달려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비아야! 3년 내내 매일같이 싸우며 발버둥 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가 깃들었나 봐. 절대 널 해치려는 게 아니었어. 내 마음…… 알지?”
마른 비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그녀에게, 마른 비는 말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그렇게 될 때까지 싸운 네가 대단하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됐어. 턱은 괜찮아?”
따뜻한 말에 노을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턱이 못 견디게 아팠다.
그때, 조용히 다가온 여울이 노을의 어깨를 짚었다.
“노을아. 상처 치료하자. 나 술법에 꽤 익숙해졌거든. 이대로 두면 너 턱 돌아가겠다. 상처가 심해.”
훌쩍이는 노을에게 여울은 말했다.
“그리고…… 독수리 발톱에 채인 그 흉터들도. 전투의 훈장이긴 하지만, 여자한테 그런 건 치명적이잖아.”
“휴, 흉터요? 이렇게 오래된 것들도 없앨 수 있어요, 언니?”
“그럼. 네가 성년식에서 돌아온 날부터 이것저것 시도해봤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없앨 수 있을 것 같아.”
노을은 또 한번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다가와서 복잡한 표정으로 둘을 내려다보던 산과 안개걸음이 입을 열었다.
“따라잡았다 싶었는데 더 멀어졌네.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비아, 네가…… 우리 중 최고다.
“그래. 아까의 움직임과 기술들. 그리고 그 자연기의 창……. 뭘 어떻게 하면 그런 걸 만들어내는 거냐? 무서운 꼬맹이 같으니라고.”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라. 정식으로 차기 족장이 되었는데 인사는 해야지.”
“족장? 누가? 내가?”
마른 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고, 모두는 할 말을 잃었다.
매서운 눈은 뭐 이런 꼴통이 다 있냐고 또 한번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모두가 킥킥대며 왁자지껄 떠드는 동안, 마른 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 때, 마른 비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족장이 될 생각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