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59화 (159/463)

159화

“그게 무슨 말이냐.”

매서운 눈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저는 족장이 될 의지도, 마을에 남을 생각도 없어요. 저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요. 운남을 넘어 저 북쪽의 땅에 가보고 싶어요. 새로운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 역동하는 삶……. 저는 제 세계를 넓히고 싶어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공기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질식할 듯한 침묵.

수십 명이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떠난다고? 한족의 땅으로? 부족을 버리고?”

노을은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

성년식만 끝나면 당연히 마른 비와 함께하리라 생각했다.

어릴 때처럼 붙어 다니며 맛있는 걸 먹고, 장난도 치고, 숲을 탐험하고, 별을 보며, 추억을 쌓아갈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 그가 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평생을 함께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날 버리고?”

노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건 의지와 다르게 튀어나온 말이었고, 평소의 노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기도 했다.

극심한 충격에 사로잡힌 노을은 멍한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미안해. 노을아. 하지만 난 꼭 가보고 싶어.”

산과 안개걸음은 마른 비를 이해했다.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

패기와 도전 정신으로 충만한 시기다.

자신들도 저 넓은 북쪽의 땅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그건 이성적인 판단일 뿐, 감정은 그렇지 못했다.

족장이 되고 싶었고, 부족을 훌륭히 이끌고 싶었다.

저 너른 하늘처럼 역사에 남을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능력이 부족했고, 자신이 족장의 그릇이 아님을 받아들이며 연하의 동생을 인정했다.

한데 그 녀석은 그 자리를 차버리고 떠나겠단다.

산과 안개걸음은 복잡한 심경에 입을 열지 못했다.

“역시 비아 넌 끝까지 사고뭉치야. 난 네가 족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진작 알았다.”

매서운 눈이 나지막이 말했다.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분한 어조였다.

착각일까?

마른 비를 깎아내리는 말과 달리, 그의 눈빛에 스민 건 격려처럼 보였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분위기 다 깨는군. 준비가 되면, 꾸물대지 말고 바로 떠나라.”

그는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매서운 눈이 그렇게 말한 이상, 토를 달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의 혼란한 심정을 삼키며,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뭘 그리 뚫어져라 보는 거냐.”

사내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에 앉아서 울고 있는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으로 노인이 다가왔다.

“노을이? 노을이를 보고 있었나?”

“……네.”

그믐이 의외라는 얼굴로 새벽 어스름을 돌아봤다.

“도통 이성에는 관심이 없던 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 좋다는 여인들도 마다하고 수련밖에 모르던 나무토막이 그런 눈을 하고 있어? 성년식 기간 동안 저 꼬맹이한테 빠지기라도 한 거냐?”

그믐은 스스로의 농담이 만족스러웠는지 작게 웃었다.

금복인이 마을을 찾고, 아이들이 복귀한 이후, 그믐은 급격히 전쟁 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어진 어스름의 대답에 크게 당황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으엉?!”

진심으로 놀랐는지 그믐의 눈이 커졌다.

수리의 눈의 차기 수장.

자신의 뒤를 이을 남자.

그믐은 어스름을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그리고 그믐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열일곱 살이란 나이 차를 긍정하며 그를 응원할 순 없었다.

노을에게 있어 어스름이란 걸출한 부족의 전사이자 웃어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농을 걸어도 재미없는 대꾸만 하던 놈이 회심의 한 방을 날려주시는군.”

그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고,

“저도 지금 깨달았어요. 진심입니다.”

어스름은 진지한 얼굴로 그믐을 바라봤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 않느냐. 좋은 여자가 쌔고 쌨는데 하필이면 처음 관심을 둔 대상이 노을이라니?”

“알고 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죠. 하지만 그런 걸 어떡합니까. 지난 2년간, 노을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경이적인 광경들이었죠. 저 어린 꼬마에게 존경심이 들더군요.”

“그런 거라면, 네가 사랑을 안 해봐서 지금 감정의 종류를 착각하는….”

“처음엔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저렇게 처절하게 강해지려고 할까. 궁금하더군요. 그다음엔 안쓰럽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내 존경심으로 변했죠. 그리고 지금은…… 그냥 옆에 있고 싶고,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믐은 평생토록 단련과 부족원들 밖에 모르던 이 사내가 지금 진심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죠. 상관없습니다. 그냥 이 감정을 인정하고, 드러내지 않으며, 곁을 지키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일들이 있겠죠. 그때마다 노을이의 힘이 되어 주려 합니다. 비아가 떠난다면 노을이는…….”

어스름이 깊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와족의 차기 족장이니까요.”

“골치가 아프군.”

그믐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엔 너른 하늘이 있었다.

“어쩔 거냐?”

“어쩌긴요. 존중해 줘야죠.”

너른 하늘이 씩 웃으며 말했다.

“……쉽게도 답하는군. 이 세상에 너처럼 속 편하게 사는 인간은 없을 거다.”

어쩔 수 없이 회상이 불어오는 밤이다.

오래전, 아들을 떠나보냈을 때.

장성한 아들이 고심 끝에 결정한 길을, 아비인 자신은 최악의 방식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하나의 부자가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

너른 하늘은 자신의 경우와는 다르게 아들이 선택한 길을 존중해 줄 모양이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시야가 넓었다면.

각자의 길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응원해줄 아량이 있었다면.

아들에 대한 믿음이 컸다면.

그랬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비아가 다시 성년식을 출발하기 전에 말해 줬습니다.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일생을 누리라고. 저야 비아를 옆에 두고 커나가는 걸 보고 싶지만, 그리고 제 뒤를 이어 족장이 되길 바라지만, 아들이 어디 아비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믿고 응원할 뿐이죠.”

“흥. 너 잘났다. 이 녀석아.”

입을 삐죽댔지만, 그믐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잘 봤다.”

금복인이 검치호의 이빨을 마른 비에게 건넸다.

지난 이틀간, 그는 금벽파라와 함께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검치호의 이빨을 살폈다.

하지만 남은 건 모르겠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간 사용해온 어떤 방법으로도 이 이빨의 성분을 알 수가 없다. 이건 어떤 짐승의 이빨이나 뼈와도 닮은 구석이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강도를 지닐 수 없겠지.”

“응. 엄청 단단해. 공격이 몇 번이나 제대로 들어갔는데도 금 하나 가지 않더라.”

마른 비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멸종했던 생물의 재림……. 이게 그저 하늘의 장난인지, 아니면 어떤 징조나 조짐일지……. 두고 봐야 알 것 같구나.”

“할아버지. 필요하면 그거 하나 가져도 돼.”

원래는 너른 하늘과 은빛여우에게 주려던 선물이다.

한 명이 유명을 달리했으니 남은 건 필요한 사람에게 가면 좋겠다는 게 마른 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금복인은 고개를 저었다.

“널 살리고 희생한 이의 복수를 위해서 검치호를 사냥했다고 들었다. 그런 걸 어떻게 받겠나.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물건에 깃든 의미지. 하나는 족장님께 드리고, 하나는 네가 보관하는 게 맞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더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게….”

“아니. 내 말대로 해라. 단순한 의미 때문에 그러는 게 아냐. 이 늙은이의 예감으로는 언젠가 네게 요긴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 같구나.”

금복인이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시간차를 두고 말했다.

“꼬맹아. 너, 중원으로 나간다고 했지?”

“응. 할아버지. 그럴 거야.”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무슨 부탁?”

“내가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해온 일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그걸 좀 도와다오.”

금복인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데? 도와주는 거야 어려울 게 없는데, 내가 도움이 될까? 난 사냥이랑 싸우는 거밖에 못 해.”

“어떤 것을 보든 혹하지 않을 자. 세상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자. 뛰어난 실력과 감각을 지녔으며, 믿을만한 자.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일에 너만큼 적격인 사람은 없을 것 같구나.”

마른 비가 노을과 싸우는 걸 본 후다.

산과 안개걸음도 놀라웠지만, 마른 비와 노을은 아예 다른 차원의 싸움을 보여주었다.

마른 비가 뢰창을 뽑아 들었을 때, 경악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던 전흠은 마른 비가 ‘그 일’에 적합한 인재라고 확신했다.

“할아버지 표정을 보니 굉장히 중요한 일 같은데, 날 믿어?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사람을 보는 내 눈과 무공에 대한 전 아우의 안목을 믿는다. 네가 딱이야. 날 도와다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시원시원한 수락이었다.

금복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고맙구나! 고마워! 사례는 내 섭섭지 않게 하마!”

“됐어. 괜찮아. 그냥 도와줄게.”

“네가 이 오지에만 살아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모양인데, 저 윗동네에서는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네 시간과 능력을 빌리는 대가이니 그냥 넙죽 받아.”

“음…….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게.”

마른 비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었다.

그 미소가 마음에 든 금복인이 말했다.

“그리고 앞으론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라.”

“할아버지, 혹시 머리 나빠? 나이 차이가 이 정도 나면 그렇게 부르는 거 아냐.”

지극히 당연하지만, 누구도 한 적 없는 대답에 금복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인사, 안 해도 되겠니?”

너른 하늘이 얼굴에 울음 자국이 남은 노을에게 물었다.

그와 그믐을 비롯한 와족의 수뇌부를 제외하면, 마른 비를 배웅 나온 건 산과 안개걸음, 그리고 여울뿐이었다.

상당수의 부족원들은 족장의 자리를 걷어차고 떠나는 마른 비를 이해하지 못했고, 강하게 비난했다.

오히려 외부인인 금복인과 전흠, 금벽파라가 헤어짐을 더 아쉬워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별비와 함께 걷는 마른 비의 등이 손바닥만 해질 때쯤, 노을이 나타났다.

“네. 족장님. 인사 안 하려구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을은 멀어지는 마른 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 노을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그저 한 가지가 염려돼서 하는 말이란다.”

“……?”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니?”

너른 하늘의 마지막 말에, 노을의 눈이 멍해졌다.

그리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든 노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야! 이 바보 멍충아!”

저 멀리서 몸을 돌린 마른 비에게, 노을은 마음에 담은 말을 쏟아냈다.

“잘 다녀와! 건강하게!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해서, 멋진 남자가 돼서 돌아와! 이번에도 내 생각 안 하면 죽일 거야! 기다릴 테니까, 꼭 돌아와야 해!”

바보 멍청이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좋다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노을은 작게 말했다.

“……꼭. 꼭 돌아와.”

* * *

청죽림을 나선 마른 비는 여규와 만나기로 한 날짜까지 무얼 할지 고민했다.

여규는 점창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고, 맡은 일들을 처리하고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날 장소를 정했고, 먼저 그곳에 가 있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마른 비는 마음 편하게 아직 가보지 않은 운남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기로 했다.

화산열해에 들러 뜨거운 샘에서 몸을 풀었고, 옥룡설산(玉龍雪山)의 혹독한 추위를 맛봤다.

호랑이가 건너다닌다는 협곡, 호도협(虎跳峽)과 명영빙천(明永冰川), 토림(土林)의 절경을 구경했다.

그리고 약속 날짜가 한 달 가량 남은 시점.

마른 비는 마침내 원시의 땅을 넘어 문명이 지배하는 영토에 발을 들였다.

“이제 시작이야. 별비야.”

장대한 산맥 아래 굽이치는 강줄기.

그 강 건너에 인간이 쌓아 올린 성벽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난생처음 운남을 넘은 마른 비가 사천(四川) 땅을 밟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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