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60화 (160/463)

160화

사천

《“그다지 유쾌한 질문은 아니구려.”

딱―, 딱―.

시장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객잔의 3층.

진녹색 무복을 입은 남자가 탁자 위에 검지를 부딪치며 말했다.

“수왕에 대해 물을 사람은 많을 텐데 굳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궁금하오.”

호의도, 적의도 담기지 않은 어조.

지극히 담담하고 사무적인 말투였다.

하지만 눈빛과 태도는 조금 달랐다.

그는 마치 ‘내치기에는 껄끄러운 상대라서 어쩔 수 없이 면담에 응했다.’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했다.

“글쎄요?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사실 가주께 꼭 물어야만 하는 일도 아니죠. 그냥… 같은 객잔에 계시다고 하니 문득 묻고 싶어져서?”

이럴까 봐 월목대주가 기를 쓰고 말렸던 걸지도.

상대가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고, 내가 이렇게 반응하리라 짐작했던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저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편한 티를 내려면 처음부터 면담 요청을 거절하던가.

난 분명히 말했다.

별로 중요한 일 아니니까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된다고.

아니꼬운 마음이 들어서 내 말도 곱게 나가진 않았음을 인정한다.

“한 마디로 ‘그냥’ 보자고 했다, 그거로군. 당가가 언제부터 이렇게 한가한 집단으로 비춰졌는지……. 월검대주(月劍隊主)의 눈에는 본가가 그리 우습게 보이오?”

딱-, 딱-.

탁자에 부딪히는 검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온 천하가 다 아는 저 습관.

손가락의 속도가 한 번 더 빨라지고, 그러다가 멈추면, 출수가 시작되겠지.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

지금 날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

불쾌함이 한층 짙어졌다.

“저는 우습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가주께서 공연히 심통을 부리시는 건 아니고요? 아……. 혹시 전대 가주와 와족 사이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앙금이 남으신 겁니까? 제가 듣기로 가주께선 공명정대하고 사리 분별이 명확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그저 소문에 불과했던 건지 의문이 드네요.”

딱. 딱. 딱.

탁자와 검지의 부딪힘은 이제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격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삭월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다고 들었소. 절체절명의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음에도 신의가 두텁고, 의로우며, 심지가 곧은 이들이 남아 있다고 했지.”

“맞습니다. 좋은 이들이죠. 한데 그게 왜…?”

“그런 인재들이 모이는 이유는 달의 주인 때문이라고 들었소. 맞소이까?”

“네. 뭐, 월주께서야 당연히….”

“그럼 이건 어떻소? ‘삭월에 치명적인 오점이 있다면, 그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구는 달의 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그냥 지그시 웃어줬다.

“가주께서는 말씀을 참 어렵게 빙빙 돌리시네요. 정파의 저명한 고수이자 오대세가의 가주. 직분 때문에 직접 말하기 어려우신 모양인데, 제가 대신해드릴까?”

“…….”

“당신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지?”

딱. 딱……. 따악!

후아아악― 콰아앙!

사천성 성도(成都)의 유서 깊은 파촉객잔 3층이 통째로 날아갔다.》

혼세록 대담 편

「?!~?!!~! 당문휘 이 개새ㄲ」

「당가주 당문휘」

삭월 월검대주 육강패 저

마른 비는 입을 벌린 채 성벽 안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덕창(德昌).

사천 땅에 진입하여 북쪽으로 쭉 올라오니 나온 도시다.

으레 그렇듯 성벽 안에는 시장을 중심으로 민가의 밀집지역이 펼쳐져 있었고, 마른 비는 설레는 마음으로 구경을 시작했다.

사실 덕창은 번화했다고 보긴 어려운 곳이었다.

사천성의 성도인 성도(成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고, 성 바깥을 나가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자연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마른 비의 눈길을 끈 건 사람과 복식이었다.

대리에서도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운남의 토착 부족이었다.

하지만 여긴 한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걸친 옷은 운남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람과 옷.

마른 비는 자신이 운남을 벗어났다는 걸 실감했다.

〔놀다가 와라. 그 안은 들어가기도 싫다.〕

성벽 너머에서 별비가 의지를 전해왔다.

처음에는 새로운 곳을 탐험한다는 생각에 즐거워했던 별비는 도시에 접근하자 질색하며 물러섰다.

오만가지 인간 군상이 뿜어내는 악취와 불순한 자연기로 가득 찬 곳.

별비에게 있어 인간들의 도시는 쓰레기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온 김에 너도 한 번 구경하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그러려고 일부러 어스름 아저씨한테 은신 배운 거 아니었어?』

마른 비가 중원으로 떠난다고 하자 그믐이 찾아왔다.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알려주었는데, 그중엔 별비에 대한 조언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처음 운남을 넘었을 때 그믐은 어둔 날개를 대동한 채 도시에 진입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올빼미.

반려수를 모르는 한족들에게 그건 난데없는 괴수의 출현이나 다름없었다.

황급히 출동한 성문 수비군은 다짜고짜 어둔 날개에게 공격을 퍼부었고, 화가 난 그믐은 그들을 모조리 때려눕혔다.

그리고 그건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믐은 북쪽 땅을 여행하는 중에는 어둔 날개를 떼어놓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어둔 날개와 달리, 별비는 땅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은신이 필수적이었다.

지금도 별비가 마음먹고 몸을 숨기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 없지만, 그건 자연의 품에 안겨 있을 때나 통용되는 말이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

인간이 시야에 들어온 사물을 선별하는 지각의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

매리설산에서 노을을 공격한 회색 늑대들이 눈앞에 있는 어스름을 인식하지 못하게 했던 그 은신술이 필요했다.

은신술을 가르쳐 달라 찾아온 마른 비를, 어스름은 어쩐 일인지 탐탁지 않아 했지만, 군말 없이 자신의 기예를 전수했다.

둘은 운남을 떠도는 내내 은신을 몸에 붙였고, 지금에 와서는 상당한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안 갈래. 거긴 들어가기도 싫다.〕

별비는 마른 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서 마른 비는 덕창의 시가지를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힐끔거린다는걸.

운남의 야생을 떠돌다 온 마른 비는 한족들의 기준에서 꾀죄죄한 걸 넘어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원래부터 웃통은 거의 벗고 다니다시피 했고, 하의 또한 짐승의 가죽을 무두질한 걸 대충 걸친 수준이었다.

그의 옆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혀를 차며 마른 비를 곁눈질했다.

심지어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우락부락하다 못해 터질 듯한 근육이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음. 내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나 봐. 일단 옷을 좀 사야겠다.”

마른 비는 시장 거리 한복판에 있는 포목점으로 향했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베와 무명, 비단들이 마른 비의 눈을 자극했다.

“아저씨. 여기서 옷을 팔아?”

마른 비의 질문을 받은 점원은 위압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꽉 짜인 근육과 두터운 어깨, 고개를 위로 젖혀야 마주칠 수 있는 큰 키.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구릿빛 활력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어디 심산유곡에 처박혀 살다 나온 야만인인지는 몰라도 이 인간이 난동을 부리면 남아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점원을 안심시키는 건 무지막지한 신체와 달리 청년의 눈과 인상이 매우 선하다는 점이었다.

그 점이 그를 안도하게 했고, 용기를 내서 본업에 충실할 수 있게 했다.

“저희는 옷감을 팔고, 옷을 만드는 건 침선장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원하시면 저희 가게와 거래하는 침선장을 소개해 드리죠.”

‘여기 사람들은 되게 작네.’

마을에 있을 때는 몰랐다.

와족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발달한 신체를 지녔고, 마른 비보다 큰 부족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 거리 어디를 둘러봐도 마른 비보다 큰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신체를 단련하는 무인들은 다르겠지만, 한족 범인들의 기준에서 마른 비는 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구나. 그럼 그렇게 해줘. 움직이기 편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과 비슷한 걸로 맞추고 싶어.”

눈대중으로 봐도 옷이란 걸 처음 사보는 눈치다.

점원은 크게 튀지 않는 색깔로 알맞은 크기의 옷감을 꺼내주었다.

“닷 냥입니다.”

마른 비가 품을 뒤져서 전낭을 꺼냈다.

마을을 떠나는 날, 금복인이 올라가서 쓰라고 자신의 전낭 중 하나를 통째로 쥐여 준 것이다.

그리고 만금당의 적손답게 그의 돈주머니 안에는 엄청난 금액이 들어 있었다.

‘헉!’

눈길을 잡아끄는 야만인의 행동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상당수는 저런 거금이 어디서 났는지 의아해하고 놀라는 데 그쳤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소리 없는 움직임들이 일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손님. 침선장을 찾아가시려면 옷감을 들고 이 길을 따라서…….”

점원은 마른 비가 자신이 일하는 가게에서 서둘러 멀어지길 바랐다.

툭.

벌써 세 번째였다.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마른 비의 눈엔 영 어색해 보이는 부딪힘이.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마른 비의 팔에 어깨를 툭 부딪쳤다.

“어이쿠. 이거 미안하게 됐소.”

저 미소도 어색하다.

입은 웃지만, 눈이 웃질 않는다.

가느다란 눈은 마른 비의 반응과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살피고 있었다.

“아니야, 아저씨. 괜찮아.”

그렇다고 별다른 위협이나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다.

마른 비는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마주 웃어 주었다.

피식.

마른 비의 대꾸를 들은 후에 나온 미소.

이번 웃음은 진짜다.

다만 기분 나쁜 비웃음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왜 이러는 거지?’

마른 비가 의아해하며 걸음을 디뎠을 때.

슈욱―

어지간한 사람은 눈 뜨고도 보지 못할 손의 움직임이 일었다.

마른 비는 고민하지 않고 그냥 낚아챘다.

우두두두둑―

“크, 크아아아악!”

왼손 팔목이 빠진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팔목이 덜렁거리는 사내도, 마른 비도 놀랐다.

사내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한 소매치기가 실패해서 놀랐고, 마른 비는 다가오는 팔을 가볍게 잡아챘을 뿐인데 팔목이 빠져서 놀랐다.

강대한 야생의 맹수들과 튼튼한 와족의 전사들.

그 외에 마른 비가 상대해 본 인간은 점창의 무인들이 전부였다.

그는 고작 이 정도 힘으로 인간의 팔목이 빠질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 아저씨. 미안해. 괜찮아?”

“끄… 끄어어. 내, 내 팔!”

“그러게 왜 갑자기 내 품에 손을 집어넣으려고 그래. 아니, 그거보다 아저씨 너무 약한데? 어떻게 사람 팔이 이렇게 쉽게 빠지지?”

마른 비는 진심으로 미안하고 궁금해서 한 말이었지만, 듣는 입장에선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하던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이, 이 야만인 놈! 이놈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내 팔을…!

안 그래도 시선을 끄는 마른 비에게 시장 거리의 모든 이목이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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