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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62화 (162/463)

162화

“······누구?”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볼이 퀭했고, 짐작되는 나이에 비해 키와 덩치가 작다.

하지만 볼품없는 외모에 비해 눈빛 하나만큼은 형형하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았다.

절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아이였다.

“날 불렀어?”

마른 비가 소년에게 물었다.

“그래, 당신. 정말 대단하네. 순식간에 들개 패거리를 다 때려눕히다니. 어디서 왔어?”

방금 전, 마른 비가 장팔을 비롯한 사내들을 간단히 제압하자 시장 거리엔 소요가 일었다.

그들은 패악한 짓거리를 일삼는 자들이었고, 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덕창의 길거리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다.

수년간 보호비의 명목으로 금품을 뜯기고 괴롭힘을 감내해온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큰 두려움을 느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던 자들을 한순간에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 사내.

척 봐도 핏줄이 다른 야만인이고, 정체 모를 외지인이다.

통쾌함과 고마움을 느낀 사람이 많았지만, 누구도 마른 비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이 아이의 눈빛엔 두려움이 없었다.

마른 비는 소년이 점점 궁금해졌다.

“운남. 운남에서 왔어. 할아범은 아무에게나 출신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너는 왠지 괜찮을 것 같네. 와족의 마른 비야.”

자연기가 전해 주는 느낌이 상당히 괜찮다.

그래서 마른 비는 주저 없이 오른 주먹을 내밀었다.

“뭐야, 그게? 뭐 하자는 건데?”

소년은 난생처음 보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주먹을 마주 내밀었다.

“인사? 이거 인사 맞지? 별 희한한 인사법이 다 있네.”

말과 달리 소년은 와족식 간이 인사법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웃었다.

“운남에서 왔을 거 같았어. 여긴 사천의 중심부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남쪽에서 외지인들이 많이 오거든. 당신의 생김새나 발달한 몸으로 볼 때 운남의 소수 부족일 거 같았어.”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아서 기분이 좋은지, 소년의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와족이란 부족은 처음 듣지만. 보통은 장족이나 하니족이 대부분이거든.”

“응. 우리 부족은 운남을 벗어나지 않아. 할아범 한 명을 빼고는.”

볼품없는 외형과 달리 소년의 말투에선 영리함이 묻어났다.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하기도 바빠 보이는데, 덕창에 들어오는 소수 부족들에게까지 관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

“난 단이수야. 당신에게 말을 건 이유는 일단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들개 패거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일단’이라고 한 걸 보면 다른 것도 있나 보네?”

“응. 당신과 작은 거래를 하려고.”

“거래?”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마른 비는 소년의 다음 말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 내가 가진 정보와 당신이 가진 돈을 바꾸고 싶어. 당신의 걱정을 덜어줄 내용이 있거든. 그리고 당신, 운남을 벗어난 게 처음이지?”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 정도는 딱 보면 알아. 사천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일 텐데 뭐든 물어봐. 내가 답변할 수 있는 부분이면 알려줄 테니까. 그리고 당신의 만족도에 따라서 내게 돈을 줘.”

대담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기회를 스스로 만들 줄 아는 아이이기도 했다.

큰돈을 가지고, 운남을 벗어나 처음으로 이족의 땅에 들어온 청년.

궁금하고 불안한 마음이 클 거다.

거래에 응하면, 하다못해 숙소나 객잔에 대해 물어보더라도 한두 푼이라도 벌 수 있다.

하지만 들개 패거리가 그랬듯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궁금한 거 없는데?”

“······.”

단이수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흠칫했다.

“뭐, 뭐든 좋아. 하다못해 길 안내라도 할 수 있어. 난 금액을 제시하지도 않았잖아. 그냥 당신이 주고 싶은 대로 주면 돼.”

단이수에게선 그제야 나이에 걸맞은 미숙함이 묻어났다.

마른 비가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당황한 것이다.

“길은 좀 돌아가더라도 내가 찾으면 되고, 딱히 묻고 싶은 것도 없어.”

“어··· 그럼 안 되는데······.”

단이수는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곧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낀 마른 비가 웃으며 말했다.

“너 배고프지? 따라와. 밥 먹자.”

“어? 어, 정말? 난 아직 당신에게 아무것도 못 줬는데?”

“지금부터 맛있는 걸 파는 곳으로 안내해 주면 되잖아. 그리고 내 걱정을 덜어줄 내용이 있다면서? 그건 조금 듣고 싶네.”

단이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맛있는 국수를 파는 객잔을 알아!”

나이에 비해 비범하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마른 비는 단이수가 마음에 들어서 웃으며 뒤를 따랐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객잔이었다.

하지만 나름 알려진 곳이었는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마른 비와 단이수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 창가 쪽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네?”

마른 비는 국수를 들이마시듯 흡입하며 연신 감탄했다.

“그치? 여기 엄청 유명한 집이야. 토박이들만 아는 곳이라고.”

단이수도 무척이나 배가 고팠는지 벌써 두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후루룩―. 음, 음. 아주 훌륭해. 할아범의 조언대로 젓가락질을 배워두길 잘했어.”

와족은 모든 음식을 맨손으로 먹는다.

그믐은 마른 비가 마을을 떠나기 전, 손수 나무를 깎아서 젓가락을 만들어 주었고, 틈나는 대로 연습하라고 했다.

왜 이런 게 필요할까 싶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른 비는 그믐이 알려준 소소한 것들을 절대 잊지 않기로 했다.

“아까 말했던, 걱정을 덜어줄 정보라는 게 뭐야?”

마른 비는 국수 다섯 그릇을 비우고서야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줄기차게 국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른 비의 위장에 질렸는지, 단이수는 아연한 표정으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아까 당신의 전낭을 훔치려던 남자···.”

“당신 말고 그냥 이름 불러. 주먹 부딪쳤으면 친구야.”

“알았어. 비아, 네 돈을 훔치려고 한 소매치기를 혼내 주려고 할 때, 그 사람이 그랬잖아. 자기는 하오문 소속이라고.”

“하오문? 그게 뭐지? 그런 걸 말했던가?”

“뭐? 진짜 모르는 거였어? 하오문을?”

단이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운남에서만 살아왔기로서니 하오문을 모르다니!

자신의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게 다른 이에게는 무관심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하오문을 그리며 커온 단이수에게 그곳은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고, 거길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만 그런 게 아니다.

뒷골목 인생들에게 하오문은 피부로 와닿는 가장 강대한 집단이었고, 단이수가 아는 거의 모든 이들은 그곳에 들어가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였다.

“중원에 나오면서 가장 기본적인 조사도 안 한 거야? 어떻게 하오문을 모를 수 있지? 비아, 네가 아무리 강해도 중원에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집단들이 있어. 하오문도 그중 하나고.”

와족이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을 박살 냈다는 걸 단이수가 알 리 없었다.

마른 비의 무력을 가늠할 능력이 없기에 소년은 이 인상 좋은 청년이 걱정됐다.

“난 당연히 네가 하오문을 알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태연한 척하지만 내심 걱정이 많을 거라고 여겼고. 하오문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모두 두려워하거든. 구파일방이나 사파의 거대 방파들조차 하오문과 척을 지는 건 달갑지 않아 하는 게 현실이야.”

“구파일방이면 점창파가 속해 있다는 그거지? 정파라는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아홉 개의 문파와 한 개의 방파.”

“구파일방은 아네? 맞아. 아! 점창파가 운남에 있으니 구파일방에 대해서는 들어봤겠구나.”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점창에 대해서는 잘 알아. 가장 친한 친구가 거기에 있기도 하고.”

“점창에?! 가장 친한 친구가 점창파 소속이라고?”

단이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응. 운 좋게도 인연이 닿아서.”

“그렇구나. 그 친구의 직책이 어떻게 되는데?”

직책.

마른 비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물쭈물 대며 답하지 못했다.

“음. 직책. 그건 잘 모르겠는데.”

단이수는 마른 비의 반응을 보며 친구라는 사람이 무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점창파의 제자라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사람이고, 그런 걸 자랑했으면 했지, 숨길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단이수는 약간 김이 샌 얼굴이었다.

“아무튼 힘으로는 중원에서 최고를 다투는 집단들이 하오문을 껄끄러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어. 우선 그들이 가진 정보력. 정파 최고의 첩보 단체가 개방이라면, 하오문은 사파를 대표하는 첩보 단체야. 개방이 정보의 양에서 우위에 있다면, 하오문은 질적인 측면에서 개방을 능가하지.”

“정보. 그거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들었어. 우리 부족에도 그런 일을 하는 전사들이 있거든.”

마른 비가 수리의 눈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맞아. 국가 간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무림 세력 간의 다툼에서도 정보는 가장 중요한 요소야. 하오문이 기녀, 점소이, 소매치기, 마부, 대장원의 하인, 도박사 등으로 이루어진 하류 집단이지만, 대놓고 무시 받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그들이 지닌 정보력 때문이야.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철저한 보복성, 바로 집요함이지.”

긴 이야기를 쏟아내서 지치는지 단이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하류 인생들이 모인 만큼 그들은 자기 인생을 챙기기에도 바빠. 그런 만큼 타 집단에 비해 결속력이 약하지. 하지만 그들은 동료가 핍박받았을 때 그냥 넘어가면 자신과 자신의 식구에게도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아. 그래서 하오문의 누군가가 피해를 입으면 그들은 기를 쓰고 보복에 나서지. 집단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단이수는 마른 비를 똑바로 바라봤다.

“난 네가 하오문을 모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그 소매치기의 말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우려를 덜어주고, 네게 돈을 받고 싶었던 거야. 들개 패거리는 하오문이 아니거든.”

마른 비는 하오문이 뭔지도 몰랐고, 그들에 대해서 알게 된 지금도 별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과, 단이수라는 소년을 친구로 사귀게 돼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마른 비가 품에서 전낭을 꺼내 은자 하나를 건넸다.

“받아. 이야기 값이야. 네 덕분에 맛있는 것도 먹었고, 정말 즐거웠어.”

“이렇게 많이? 고마워. 내 처지에 거절하는 건 허세야. 잘 쓸게.”

단이수는 사양 한 번 하지 않고, 냉큼 그 돈을 받았다.

마른 비는 싱긋 웃어준 다음 물었다.

“근데 넌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하오문에 관한 이야기들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야. 들개 패거리에 관한 것도 덕창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들이고.”

거기까지 말한 단이수는 신중히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난 크면 그놈들을 이 거리에서 내쫓고 싶었어. 정말 나쁜 놈들이었거든. 그래서 나랑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규합했지. 우리는 장차 이 덕창의 가장 큰 세력이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그런데 네 덕분에 일이 훨씬 빨라질 거 같아.”

돈을 위해 마른 비에게 접근했던 단이수는 어느새 마른 비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고마워. 그 말이 꼭 하고 싶네. 예전에 놈들에게 호되게 당한 날, 난 은원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오늘 네가 베푼 호의는 언젠가 네게 커다란 도움으로 돌아갈 거야.”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내 느낌일 뿐이지만, 넌 분명 잘할 거 같아.”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이어졌다.

운남 원시부족의 청년과 덕창 길거리의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뭐냐. 기분 좋아 보이네?〕

마른 비는 마지막으로 보수한 게 언제인지도 모를 관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별비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의지를 전해왔다.

『응. 기분 좋아. 처음엔 안 좋은 일에 휘말렸는데, 그 덕분에 좋은 친구를 만났거든.』

옷도 사 입었고, 맛있는 국수로 배도 채웠다.

무엇보다 단이수를 알게 된 게 마른 비는 기분이 좋았다.

북쪽 성문 바깥까지 배웅 나온 단이수는 친절하게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길을 일러 주었다.

여규와 만나기로 한 날짜까지 이십여 일.

길을 서두를 때다.

마른 비는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사천성의 중심지 성도(成都)가 마른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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