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63화 (163/463)

163화

서창(西昌), 감락(甘洛), 그리고 아안(雅安)을 지나 쌍류(雙流).

마른 비는 뻥 뚫린 관도를 따라 사천의 중심으로 접어들었다.

덕창 이후, 마른 비는 도시에 들르지 않았다.

별비를 혼자 두기도 미안했고, 마른 비 본인도 객잔의 침상보다는 산이나 숲에서 노숙을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별천지나 다름없는 도시를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평생을 야생에서 지내온 청년은 숲의 맑은 공기와 촉촉한 풀잎, 새들의 지저귐이 마음 편했다.

그렇게 이십여 일.

높은 고개 하나를 넘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마른 비를 맞이했다.

“우와아아아~!”

들판을 달리는 바람이 대지의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지평선 끝까지 뻗은 옥토는 황금의 들판과 같았다.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강우량이 식물의 생장을 도우니, 고래로부터 사천을 ‘천부의 나라’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캬! 가슴이 탁 트인다! 그치, 별비야?”

〔뭐, 그럭저럭 괜찮군.〕

별비는 운남을 벗어난 이후 처음으로 만족스런 기색이었다.

“어? 저길 봐!”

황금빛 들판 위에 자리 잡은 웅장한 성곽.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시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궁금하게 했다.

고대 삼국, 촉한의 도읍이었던 성도(成都).

그 유구한 땅을 마른 비가 밟았다.

“와…! 이런 건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초석을 올린 시기가 언제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대리고성의 두 배는 됨직한 성벽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단단히 서 있었다.

사람의 키의 몇 배에 달하는 성문과, 매끈하게 닦인 대로.

길의 좌우로는 처음 보는 양식의 건물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성도에 들어선 마른 비는 멍하니 선 채 완전히 다른 세계에 발 디딘 걸 실감했다.

“어지러워…….”

사천성의 중심지인 성도는 지금껏 본 어떤 도시와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북새통을 이루었고, 화려한 옷과 진한 냄새들이 시각과 후각을 마비시켰다.

전상에게 얻어맞았을 때도 어지럽진 않았는데, 마른 비는 일순간 현기증이 이는 걸 느꼈다.

〔정말 최악이군.〕

별비는 인간의 도시에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민가의 지붕과 골목 사이를 이동하는 별비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간혹 마주치는 사람들도 집채만 한 대호를 못 본 것처럼 지나쳤다.

와족 은신술의 절정에 다다른 어스름의 비기는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거리낄 것 없이 자연을 누비다가 계속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하니 더 짜증이 날 거야.’

마른 비는 별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까 봐 밖에 있으라고 했는데 체류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함께 가겠다고 들어온 것이다.

최대한 빨리 도시에서 나가야겠다고 다짐하며, 마른 비는 걸음을 옮겼다.

‘남쪽 정문으로 들어와서 대로를 타고 직진. 수로 위로 놓인 돌다리가 보일 때까지 쭉 걷다가 우회전. 시장 거리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가장 커다란 객잔. ……저거야!’

고풍스런 필체로 쓰인 현판에는 마른 비가 찾던 글귀가 쓰여 있었다.

파촉객잔.

여규와 만나기로 한 약속의 장소에 마른 비가 당도했다.

웅성, 웅성.

‘유명한 곳인가?’

객잔 안은 시끌벅적했다.

자리마다 사람이 꽉 들어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마른 비는 구석 자리 하나를 잡을 수 있었고, 현지인들에 맞게 제작된 조그만 걸상에 걸터앉았다.

삐걱.

마른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의자가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어? 이거 부서질 수도 있겠는데?’

진짜 부서지면 난감한 일이다.

마른 비가 재빨리 깃털 날리기를 발동하여 체중을 흩뜨렸다.

‘흠. 이 정도면 괜찮겠네.’

숨 쉬듯이 몸에 붙인 자연기의 운용.

의자가 주저앉을 걱정을 덜었으니 이제는 먹을 때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만나기로 했으니 여규가 오려면 시간이 제법 남았고, 마른 비는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들을 못 본 척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미리 여규에게 들어둔 음식들이 줄줄이 나오자, 침이 절로 넘어갔다.

“으와아~ 매워!”

고기와 면, 콩나물 등의 각종 야채와 고추기름이 어우러진 산날분(酸辣粉)은 양귀비가 아플 때 먹던 보양식이다.

한입 베어 물면 육즙이 자르르르 흐르는 첨수교(沾水饺)와 닭고기, 땅콩, 각종 야채를 볶아 만든 궁보계정(宮保鷄丁)이 달궈진 입안을 부드럽게 적셔주었다.

사천하면 마라탕(麻辣烫)도 빼놓을 수 없다.

각종 채소와 고기가 얼큰한 국물과 어우러지며 마른 비의 혼을 빼놓았다.

“나오길 잘했어. 청죽림에만 있었으면 이런 걸 못 먹었을 거 아냐? 크으, 진짜 최고다!”

마른 비가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두 종류의 시선이 있었다.

경멸. 그리고 경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서 네다섯 명이 먹을 양을 시켜놓고 요란하게 먹는 마른 비를 멸시하는 눈으로 힐끔거렸다.

한족의 옷을 입고 있지만 마른 비의 생김새는 누가 봐도 이족의 그것이었고, 서툰 젓가락질과, 품위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식사 태도는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반면 소수의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른 비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길쭉하거나 두툼한 물건들을 몸 가까이에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천으로 싸여 있거나 몇몇은 상자나 곽에 보관된 채였다.

마른 비를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었던 그것들을 천천히 자신의 손이 닿는 곳으로 이동시켰다.

“푸아아…! 최고야. 진짜 맛있다!”

기어이 삼 인분의 요리를 더 시켜 먹은 마른 비가 배를 두드리며 감탄했다.

그의 얼굴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이 떠올라 있었다.

객잔의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포만감을 즐기던 마른 비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

후자.

경계의 눈초리로 마른 비를 바라보던 이들이다.

1층에 앉은 수십 명의 사람들 중 열두 명이 그 경우에 해당됐고, 마른 비는 정확히 열두 명, 스물네 개의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왜들 그렇게 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네?”

객잔 안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마른 비를 깔보고 무시했던 이들은 이미 자신의 식탁 위로 눈을 돌린 후였다.

그 열두 명만 계속해서 마른 비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은 객잔의 어수선함을 뚫고 마른 비가 읊조린 말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 중 열세 명만이 감지하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분위기로 봐선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데……. 나 수상한 사람 아니야. 경계하지 않아도 돼.”

마른 비는 묘한 기류를 정상으로 돌리고 싶어서 한 말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긴장이 증폭됐다.

어딜 가도 눈에 띌 신장과 체구.

어설프게 옷을 걸쳤지만, 터질 듯한 근육은 저런 천 쪼가리 한 장으로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분명히 평범한 자가 아닌데, 아무리 기감을 끌어올려도 그 힘을 가늠할 수 없다.

객잔에 있던 무림인들은 마른 비가 등장한 이후로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몸 주변에 둔 그것들, 무기지? 몸 안에 흐르는 기운도 그렇고,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당신들, 무인이네. 그것도 상당한.”

마른 비가 훑었던 시선을 거꾸로 돌리며 말했다.

“누굴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냐. 긴장들 풀고 밥 먹어도 돼.”

이런 상황에서 누가 긴장을 풀 수 있을까.

마른 비는 진실을 말했지만, 말이 더해질수록 그들의 의심은 한층 짙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무인들 중 몇몇은 마른 비를 노려보며 병장기를 감싼 천들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러지 마. 당신들,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당신들이 찾는 사람, 나 아니라니까?”

“우리 모두를 한눈에 꿰뚫어 본 안목. 심상치 않은 단련의 흔적과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무공. 우리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러고도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눈자위에 칼자국이 있는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마른 비가 입을 열었을 때와 같이, 소음에 묻힌 그의 말을 들은 건 마른 비를 포함한 열두 명뿐이었다.

“그거야 그냥 척 보면 아는 거지! 당신들, 객잔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잖아. 계속해서 눈으로 의사를 교환했고. 당신들이 날 쳐다보길래 나도 관심을 가지고 봤어. 근데 그 정도도 눈치 못 채는 게 말이 돼?”

마른 비가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내는 오히려 마른 비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굳힌 듯했다.

“음식에 정신이 팔린 척하더니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눈치챌 수도 없게 말이지. 어린놈이 보통이 아니구나. 이기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설령 우리가 오늘 여기서 뼈를 묻을지라도 우리가 품은 뜻은…….”

마른 비는 속이 터지는지 가슴을 팡팡 쳤다.

“아오~! 나 아무것도 안 했거든? 혼자 왜 그렇게 비장해? 갑자기 뼈는 왜 묻고? 나 당신들과 싸우기 싫어. 싸울 이유도 없고. 엄한 사람 붙잡고 이러지 마.”

객잔 안은 이미 조용해진 상태였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고 일어섰다.

사내는 눈썹을 씰룩였지만, 이 많은 사람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른 비를 강렬하게 노려봤다.

“며칠 전부터 뒷목에 끈끈하게 달라붙던 감각……. 꼬리가 붙었다는 건 짐작했다. 네놈들의 이목을 피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고. 한데 이토록 대담하게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우리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단 말이지?”

차앙!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보자는 듯 사내가 힘차게 검을 뽑았다.

나머지 열한 명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각자의 병장기를 빼들었다.

“자신이 있으니 모습을 드러냈겠지. 우리가 여기서 몰살할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너만은 반드시 데리고 갈 것이야!”

“잠깐만! 왜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다짜고짜 이러는 건데?”

마른 비에게는 미치고 폴짝 뛸 일이었다.

사내의 귀엔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편히 잠을 잔 날이 오래되었는지 사내의 눈엔 실핏줄이 선명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자에게서 드러나는 극심한 불안과 초조.

마른 비는 사내를 보며 설검대에게서 도망치던 2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동지들이여! 더러운 오랑캐와 하수인들에게 피의 철퇴를!”

칼자국 사내를 필두로 열한 명의 무인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얼떨결에 공격을 받게 된 마른 비는 벌떡 일어서서 응전 태세를 갖췄다.

“아! 진짜 미치겠네! 나 아니라니까?!”

그때, 객잔 구석구석에 앉아 있던 자들이 탁자를 뒤엎으며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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