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64화 (164/463)

164화

쐐애액―!

“큭!”

“으윽! 아악…!”

날카로운 비도들이 칼자국 사내 일행을 급습했다.

마른 비만 보고 있던 그들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못 하고 고꾸라졌다.

챙! 채챙!

오직 칼자국 사내만이 자신에게 날아든 비도 세 자루를 튕겨냈을 뿐이다.

“빌어먹을! 혼자가 아니었나! 스스로 미끼가 되어 우리를 끌어낸 것이로구나! 비열한 오랑캐 놈 같으니!”

검을 꼬나들며, 칼자국 사내가 분하다는 듯 외쳤다.

그의 오해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꺄아아악!”

“사, 사람 살려!”

눈앞에서 살인을 목격한 사람들이 객잔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로 밀치고 당기는 통에 문이 있는 쪽은 아수라장이었다.

요리와 술을 나르던 점소이들과 주방의 숙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서 부들부들 떨었다.

뚜벅, 뚜벅.

한순간에 한산해진 객잔.

천천히 걸어온 아홉 명의 사내들이 칼자국 사내를 포위했다.

장사꾼, 농부, 주정뱅이, 오랜만에 술 한 잔 걸치러 나온 친구들…….

심지어는 요리를 나르던 점소이도 있었다.

그들은 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평범한 자들이었다.

“네, 네놈들…… 한족이 아니냐!”

칼자국 사내는 절규하듯 고함을 질렀다.

자신의 일행을 공격한 자들이 같은 피가 흐르는 동포라는 사실에 분노한 모양이었다.

“뭘 새삼스레. 삼전검(三電劍) 진규. 당신도 아까 말하지 않았나. 더러운 오랑캐와 ‘하수인들’이라고.”

아홉 명 중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무심하다 못해 감정이 아예 없는 듯한 남자였다.

표정과 말의 어조가 그랬다.

흘리는 분위기로 봐선 아홉 명의 사내들을 이끄는 자였고, 실제 느껴지는 기운도 가장 강했다.

“난 당신이 이해가 안 돼. 중원이 원의 말발굽에 짓밟힌 지가 벌써 백 년에 가깝지 않나. 이제 와서 뭘 하려고? 무의미한 발버둥일 뿐이다. 그걸 왜 모르지?”

사내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말이라고…! 오랑캐 놈들에게 짓밟히는 동포들의 눈물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네놈은 위대한 문명의 후손으로서 긍지도, 자부심도 없는가! 미개한 오랑캐 놈들에게 언제까지 굴복하며 살 텐가!”

칼자국 사내, 진규는 피를 토할 듯 부르짖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들의 눈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위대한 문명? 그게 오롯이 한족이 쌓은 것이었던가? 뭐 그렇다 치지. 한데… 긍지와 자부심? 그게 밥 먹여주나?”

여전히 무심하고 무감한 어조였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돈을 지닌 쪽이 정의다. 나에게 돈을 줄 수 있는 쪽에 붙으면 되는 거야. 돈을 준다면, 개든 하수인이든 얼마든지 돼 주지.”

“썩어빠진 놈 같으니!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네놈들, 살수로구나.”

진규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리고 감정이 없어 보이던 사내는 처음으로 미소라고 할 만한 것을 지었다.

“그렇지. 잘나신 정파 나리들께서 쓰레기라고 무시하는 살수. 곧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 사람이기도 하지. 당신이 뒈진 후에도 떵떵거리며 잘 살 사람이기도 하고.”

본인이 살수임을 인정한 사내가 흐릿하게 웃었다.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린 양손에는 어느새 각기 세 자루의 비수가 들려 있었다.

“거 봐. 나 아니라니까?”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말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 난리를 촉발시킨 장본인.

아니, 진규가 멋대로 오해를 한 것이니 마른 비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등장과 도저히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던 언행은 진규의 초조함을 부채질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마른 비는 억울했고, 그래서 그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건 살수 조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까도 그러던데 더럽게 눈치 없는 꼬맹이군. 우리가 숫자도 적은 데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놈들이라 기회를 못 잡고 있었는데, 덕분에 쉽게 일망타진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보답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깔끔하게 죽여주마.”

“죽인다고? 나까지? 왜?”

마른 비는 물었고,

“그냥. 마음에 안 들거든.”

살수 조장은 또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만. 당신들, 살수라고 했지? 살수면… 돈 받고 사람 죽인다는 그 사람들?”

오래된 기억.

마른 비는 대리로 북상하던 중, 우연히 마주쳤던 화통달이 떠올랐다.

그리고 화통달을 죽이려 했던 검은 옷의 사내들도.

“맞아. 그때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들도 살수라고 했어.”

마른 비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할아버지가 치료했던 누군가가 할아버지에게 자기편에 들어오라고 했고… 그걸 거절하니까 적을 살릴 수도 있다면서 죽이려고 했댔어. 그때 보낸 사람들이 살수고.”

마른 비는 기억을 되살리느라 혼자 중얼댄 것이지만, 그 파급 효과는 컸다.

진규를 포위했던 아홉 살수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으니까.

“네, 네놈! 그것…! 괴의! 괴의의 이야기냐?”

“어? 당신, 화통달 할아버지를 알아?”

마른 비도 놀랐지만, 살수들은 혼이 빠질 듯한 표정이었다.

괴의에 대한 청부는 살막(殺幕)의 역사에서 치명적이자 끔찍한 실패로 기록됐다.

막대한 청부금을 받고 착수했고, 2년에 걸친 추적 끝에 곧 목을 딸 거라는 기별이 왔다.

그 후로 3년.

이쯤 되면 실패한 게 확실하다.

괴의를 처리하기 위해 보낸 살수조의 소식이 뚝 끊겼고, 괴의 또한 잠적했으니까.

괴의가 죽었을 수도 있지만, 살인에 성공했다는 증거를 들고 오지 못 하면 청부는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청부 실패에 대한 대가로, 의뢰자에게 청부금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지급하느라 살막의 허리는 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일조차 빠져나간 돈을 메꾸느라 받아들인 청부였으니, 살막의 살수들은 괴의의 일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한데 갑자기 튀어나온 야만인이 괴의를 습격한 암살자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더군다나 말투와 내용으로 보아 현장에 있었던 게 틀림없다.

모든 살수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마른 비에게 쏠렸다.

“네가 아는 걸 다 불어라. 아니면 곱게 죽지 못할 거다.”

살수들의 조장이 살기를 흩뿌리며 다가왔다.

“말하면 곱게 죽일 거야? 그럼 이래저래 죽는 건데 내가 말할 이유가 뭐야?”

마른 비는 여유롭게 웃었다.

살수가 뿜어내는 살기?

가소로울 뿐이다.

이들이 검치호 앞에서 숨이나 쉴 수 있을까.

마른 비는 화가 났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놈들이 백주대낮에 활보를 해?

더군다나 대화의 내용으로 짐작건대 칼자국 사내는 모르긴 몰라도 나름의 숭고한 목표를 지닌 사람일 거다.

‘대의라고 했었지? 저런걸.’

화통달의 경우와 같다.

이타심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걷는 자들.

돈 몇 푼 받고 칼질하는 놈들이 감히 그런 사람들을…….

살수가 무엇인지 떠올린 순간, 마른 비는 이들을 살려 보낼 생각을 접었다.

“너, 소속이 어디야? 말하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줄게.”

두 번째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마른 비는 죽인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몸에 밴 악취.

이자들은 살인 자체를 즐기는 자들이다.

지금부턴 갱생 불가능한 인간쓰레기들을 소거할 시간이었다.

“소협! 크나큰 결례를 저질렀소! 당장 도망치시오! 내가 시간을 끌겠소!”

오해가 풀리자, 진규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자신 때문에 애꿎은 청년이 목숨을 잃게 된 상황.

진규는 목숨으로 마른 비가 도주할 시간을 벌 작정이었다.

“걱정 마, 아저씨. 내가 이길 테니까.”

마른 비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마침내 개방한 대자연의 기운이 객잔에 들어찬다.

공기의 밀도 자체를 뒤바꾸는 자연기의 폭풍이 적들에게 휘몰아쳤다.

“뭐…… 냐, 이게…!”

으르렁대며 걸어오던 살수 조장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나지 않는 막강한 기운.

약관도 되지 않은 야만인 청년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이런 기운을…!”

살수 조장이 입을 벌렸을 때, 마른 비는 전진했다.

쾅!

“커억!”

돌팔매에 얻어맞은 개구리처럼, 살수 조장은 날아가서 객잔의 벽에 처박혔다.

마른 비 외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커, 커허!”

살수 조장은 벽에 박힌 채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외쳤다.

“저, 전원 한꺼번에 달려들어라! 커헉…! 반… 드시 저놈의 입을 열어야 해!”

여덟 명의 살수들이 날아올랐지만,

『멈춰.』

그 한마디에 객잔이 평정됐다.

대자연의 정수를 얻고 난 후 가능해진 야수 제어의 물리적 간섭.

아니, 그건 원래 가능했다.

인간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확장됐을 뿐.

살수들의 육신이 공중에서 덜컥 멈추고, 수백 년 동안 다듬어진 와족의 기예가 작렬한다.

빠바바바박!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들어간 솔잎 털기.

초저공을 가른 발차기가 짐승만도 못한 인간 백정들의 하반신을 산산이 부숴 놨다.

“끄, 끄으윽…!”

꼴에 살수라고 신음을 참아보지만, 하반신이 생으로 갈리는 고통을 경험했을 리 없다.

머리부터 땅바닥에 처박힌 살수들이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며 벌벌 기었다.

“소속이 어디라고?”

마른 비가 냉정한 눈으로 살수들을 내려다봤다.

그를 아는 이들이 봤다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볼 만한 변화.

인간의 추악함을 알아버린 청년은 더 이상 모든 이에게 선할 수 없었다.

“웃… 기는 소리.”

끔찍한 통증 때문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살수 하나가 비웃었다.

그가 혀를 굴려 무언가를 꺼내려는 찰나,

빠바바바박!

또 한번의 솔잎 털기가 엎어져 있는 살수들의 턱에 꽂혔다.

어금니 안쪽을 깎아 만든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숨겨둔 독환.

마른 비는 이런 상황에서 살수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경험한 바 있다.

일곱 명은 이빨이 몽땅 부러져 독환을 깨물 수 없었고, 어쭙잖게 혀를 굴리던 사내는 이빨과 혀의 절반이 날아갔다.

“끄… 끄르륵.”

눈을 뒤집은 사내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어디라고?”

마른 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살수들을 내려다볼 뿐이다.

두려움이란 감정을 제거했다고 자신한 인간 도살자들이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정말 이러기 싫은데. 난 꼭 들어야겠어.”

그다음부턴 인간을 망가뜨리는 작업이었다.

사지가 부러지고, 가슴뼈가 함몰될 때쯤, 고통을 견디지 못한 한 명이 부르짖었다.

“제, 제바 그마…! 사마! 사마이오!”

“제발 그만? 그건 알아듣겠는데, 사마가 뭐야?”

이 순간, 가장 미치겠는 사람은 대꾸를 한 사내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빨리 죽기 위한 선택을 했는데 상대방이 알아듣질 못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구원자가 있었으니, 진규가 부정확한 그의 발음을 정정해 주었다.

“살막……. 살막에서 청부를 받은 건가. 쓰레기 같은 살수 놈들…….”

진규의 표정에 분노가 어렸다.

마른 비의 신위에 놀라 딱딱하게 굳었던 그가 정신을 차린 순간이었다.

“소협. 외람된 부탁인 줄 알지만, 이놈들, 우리에게 맡겨주면 안 되겠소?”

진규의 일행은 살수들의 급습으로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죽지 않은 자들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거동이 힘들었다.

하지만 살수들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선 불길이 이글거렸고, 마른 비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 그렇게 해, 아저씨. 난 저 대장 격인 사람을 보고 있을게.”

마른 비는 주먹을 내밀었고, 진규는 잠시 머뭇거리다 주먹을 마주 부딪쳤다.

그리고 진규가 살수들에게 으르렁대며 다가간 순간.

“거기까지.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이오?”

진녹색 무복을 입은 남자가 객잔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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