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대단한데?’
마른 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른 정도로 보이는 사내의 기도는 빈틈을 찾기 힘들 만큼 탄탄했다.
체구는 평범하지만,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꽉 짜인 몸에서 고련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침착한 말투.
언뜻 보면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였다.
“음……. 뒤를 밟히셨던 모양입니다. 삼전검 선배님.”
진녹색 무복의 사내는 장내를 한 번 훑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
그가 진규에게 포권을 건네며 말했다.
“살수들이군요. 인두겁을 쓴 인간 백정들이 감히…….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하도록 하지요. 뒤처리도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내는 막힘없이 말을 이어 갔다.
진규는 그가 무척이나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오오…! 정말 오셨구려! 그것도 은비대(銀匕隊)의 대주께서 직접…!”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연히 와야지요. 애초에 저희가 요청 드린 일이 아닙니까.”
사내는 작게 웃었다.
그러자 진규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쉬운 일일 리 있겠소. 사실 우리는 오면서도 반신반의했다오. 솔직히 그대의 가문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위험을 감수한단 말이오?”
진규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아직은 밑그림에 불과할 뿐이지만, 만약 ‘이번 일’이 성사된다면 미치게 될 어마어마한 여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그저 순수한 신념에 따라 움직일 수 있지만, 수백 명의 식솔을 거느린 거대 집단은 절대 그렇지 않다.
까딱하면 공동체 전체가 휩쓸릴 위험이 다분한 것이다.
모든 행동 방침을 가문의 이익에 따라 결정한다는 현 가주의 성향으로 볼 때, 사내의 가문에서 자신을 먼저 초청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저희 역시 한의 백성이 아닙니까. 당가는 이번 일에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당가?’
분명 당가(唐家)라고 했다.
무림의 명문세가를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사천 최강의 가문, 당씨 세가.
마른 비가 여규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정파의 무력 단체 중엔 구파일방 다음으로 강력한 집단들이 있으며, 그들은 친족으로 구성된 가문들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사천 당가는 무척이나 독특한 집단이라고 했는데, 그 뒷말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튼 그 당가의 인물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사내였다.
“역시 명문세가는 다르구려. 다른 이들도 당가처럼 적극 나서주면 좋으련만. 이 진 모,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 돕겠소!”
진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휘말린 마른 비는 이들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반면 마른 비에게 얻어맞고 벽에 박혀 있던 살수 조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쿨럭…! 삼전검,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당가와 접촉하기 위해서였나? 어이가 없군. 설마 당가가 끼어들 줄이야. 당천기, 그자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일까?
살수 조장은 거침이 없었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의 말은 진녹색 옷의 사내를 자극했다.
스팟!
가볍게 떨친 손.
하지만 그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섯 자루 비수가 하늘을 날고, 살수 조장의 몸에 깔끔하게 틀어박혔다.
“커, 커헉!”
겨드랑이, 낭심, 무릎의 연골, 갈비뼈 사이와 쇄골.
비수들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유발하는 지점에 박혀 있었다.
“어디 쓰레기 같은 살수 놈이 감히 가주님의 존함을 입에 담느냐.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하면 지옥을 보게 될 것이야.”
진녹색 옷의 사내가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살수 조장은 위축되지 않고 비아냥댔다.
“큭…! 흐흐, 은비대주 당문휘. 당신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 당가주가 끔찍이 아낀다는 당가의 비밀 병기. 약관도 안 된 나이에 사천과 귀주에서 이름을 날리던 회안검을 꺾었다지? 외부에 노출된 건 그때 한 번뿐이지만, 당가를 주시하는 자들은 당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
“더러운 살수 놈이 혓바닥 한번 길구나. 내가 너에게 살려 달라는 애원을 듣는 게 빠를지, 네가 자살하는 게 빠를지 내기라도 해볼 테냐?”
“흐흐흐. 쿨럭…! 애송아, 까불지 마라. 어차피 살 생각 따윈 없다. 당가 내부의 일을 처리하며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다지? 너는 오늘 처음으로 당가주의 질책을 받게 될 거야.”
“…….”
“여기 온 게 우리뿐이라고 생각했나? 아까 객잔 밖으로 나간 사람들 틈에 일개 조가 섞여 있었다! 당가는 이제 멸문을 걱정해야 할 것이야!”
살수 조장은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당가 최고의 기재에게 처음으로 곤란을 겪게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문휘는 피식 웃었다.
“하준.”
“예, 대주님.”
평상복 차림의 남자가 당문휘의 뒤편에서 솟아올랐다.
그의 옷엔 핏자국이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보고하라.”
“넵! 총 아홉 명. 이놈들과 같은 숫자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넓게 포진하여 지켜보다가 민간인 틈에 섞여서 빠져나가는 놈들을 일망타진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차 포위망에서 자살하려는 놈들을 저지했고, 셋을 생포했습니다. 고문하니 살막이란 이름이 나오더군요.”
살수 조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문휘는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듯 힐끗 쳐다봤다.
“중원 삼대 살수 집단치고는 입들이 너무 가볍지 않나? 우리와 엮이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테니 피라미들을 보낸 것이겠지만. 안 됐군. 즐거운 상상이 틀어져서.”
“그, 그래도 네놈이 당가의 복장을 한 채 객잔에 들어서는 걸 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이냐? 여기는 사천이다. 내가 내 집 안마당을 거니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 더군다나 난 여기서 지부대인과의 약속이 있었고.”
“지, 지부대인? 어디에 그런 자가…!”
지부대인이 이런 곳에 왔을 리 없다.
미리 말을 맞춰놓고 움직인 것일 뿐.
살수 조장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굳혔다.
‘오대 세가에서 제외되고, 당가가 예전 같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놈들, 중원의 이목을 피해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냐!’
지부대인에게 이런 사적인 부탁을 할 정도라면 당가의 영향력을 다시 가늠해야 한다.
더군다나 구파일방의 일원인 청성(靑城)과 아미(峨嵋)가 있는 사천을 자신의 앞마당이라고 표현하는 저 배짱.
‘그 일’ 이후 중원의 질타를 받고 가세가 기울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당가는 물밑에서 무언가를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음……. 대주께 궁금한 게 있소. 혹시… 우리를 미끼로 써서 이놈들을 끌어냈던 것이오?”
진규가 당문휘에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미리 평상복을 입은 은비대원들로 포위망을 구성하고, 지부대인과 가짜 약속까지 잡아 외부의 의혹을 차단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진규의 의심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워낙 중요한 일이다 보니 미리 준비를 했을 뿐입니다. 이 당문휘, 그런 비열한 짓을 벌일 만큼 그릇되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선배님께서 충분히 오해하실 만한 상황이지만, 절 믿어주셨으면 좋겠군요.”
당문휘의 얼굴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진규는 고개를 끄덕였고, 죽고 다친 그들의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가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이, 당문휘는 조용히 서 있는 마른 비에게 시선을 주었다.
“모든 상황이 명확한데…… 딱 하나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 정체가 뭔가.”
마른 비는 언제나 그랬듯 간단명료하게 대꾸했다.
“나? 마른 비.”
많은 이들이 그랬듯 당문휘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게 전부였다.
“……끝인가?”
“아, 출신을 묻는 거라면 운남의 와족에서….”
“이름과 출신이야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지. 아까 객잔으로 오면서 느꼈던 기의 폭풍. 자네 같은 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우연찮게 이 자리에 있었다고 여기기엔 설명이 너무나 부족해. 내가 묻는 걸 정말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모른 척하는 거라면 내 의심이 짙어지는 걸 각오해야 할 걸세.”
당문휘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마른 비의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아, 그게 궁금한 거야? 난 여기 친구를 만나러 왔어. 그랬다가 눈에 칼자국이 있는 저 아저씨가 당신과 비슷한 이유로 날 의심했고, 다짜고짜 공격했지. 거기 휘말린 게 전부야.”
“맞소이다, 당 대주. 내가 부족하여 저 청년을 오해했고, 그 바람에….”
당문휘는 손을 들어 진규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이자가 처음부터 살수들과 한패였다면? 일이 틀어질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이놈들을 전부 버리는 패로 사용하여 우리의 신뢰를 얻으려 한 거라면? 살수들의 방식을 잘 아실 겁니다, 선배님. 놈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죠.”
당문휘가 마른 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무력이라니. 전 운남에 이런 강자를 키워낼 소수부족이 존재한다는 걸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자가 우연히 여기에 있었다는 걸 믿는 것보다 살수들과 한편이라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진규가 눈을 크게 뜨며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일이 중대한 만큼 아무리 사소한 틈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른 비의 결백을 믿었던 진규도 어느덧 마른 비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 미치겠네, 진짜! 이 동네는 원래 이런 거야? 가만히 밥 먹고 있는데 살수라고 오해를 하지 않나, 도와줘도 한패라고 몰아가질 않나! 너무한 거 아냐, 당신들?!”
마른 비가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쳤다.
하지만 당문휘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했다.
“이해하기 바라네. 지금 자네는 의심할 여지가 너무 많아. 결백이 증명된다면 내 머리 숙여 사과하겠네. 그러니 일단 순순히 포박을 받고, 나를 따라서….”
“큭큭큭.”
살수 조장의 웃음이 당문휘의 말을 끊었다.
비릿하게 떠오른 그것은 두말할 여지 없는 비웃음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고 있군. 우리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사실이야. 한데 이 야만인 놈을 보고도 감이 안 오나? 이런 어벙한 놈이 살수일 것 같아? 고작 그따위 안목을 지닌 놈이 당문 최고의 기재라니……. 당가의 수준을 알 것….”
퍼억!
주절대는 살수의 얼굴에 마른 비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누가 너한테 입을 열라 그랬어? 살 만한가 봐? 그리고 그 야만인이란 표현 쓰지 말랬지? 돈 받고 사람 죽이는 놈이… 아차, 독환을 깜빡했구나.”
퍼억!
또 한번 작렬한 주먹이 살수 조장의 이빨을 모조리 분질렀다.
“커, 커허…! 이 야마이 노이…!”
빠악!
“너 살수 맞아? 말 한번 더럽게 많네.”
살수 조장은 피를 뚝뚝 흘리며 실신해버렸다.
떠버리를 침묵시킨 마른 비가 당문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황상 내가 의심되니 꽁꽁 묶어서 끌고 가겠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야? 날 끌고 가려면 당신이 내가 살수라는 걸 증명하는 게 먼저지.”
힘이 있는 자들의 일 처리는 항상 이런 식이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다.
일단 끌고 가서 조사한 뒤에 아닐 경우 사과하면 그만이라고 믿는 것일까?
당문휘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지만, 그도 명문세가 특유의 오만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
야만인이라 천대받는 원시부족의 청년이, 막강한 힘을 지닌 세가의 중진에게 선언한다.
“당신들,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알겠는데 영 글러 먹었어. 끌고 갈 수 있으면 끌고 가 봐. 단, 오늘 개망신당할 건 각오해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