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마른 비의 도발을 들은 당문휘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옆에 시립해 있던 당하준은 그 도발을 참지 못했다.
“건방진…! 대주님! 제가 제압하여 무릎 꿇리겠습니다!”
스팟!
그의 양손이 번개처럼 움직이고,
쐐애애액―
은빛 궤적 여섯 줄기가 쾌속하게 쏘아졌다.
마른 비의 팔다리를 노리는 비수들이 허공에서 번쩍였다.
“다짜고짜 칼을 집어 던지네?”
스스스스―
하늘하늘 흔들리는 낙엽의 춤.
와족 비전 낙엽 가누기가 엄습하는 적의를 모조리 흘려냈다.
“제법이구나! 이것도 받아 봐라!”
마른 비를 간단히 제압하리라 예상했던 당하준은 공격이 실패하자 오기가 생겼다.
당문휘가 마른 비를 두고 강자라고 표현한 걸 들었지만, 그건 그저 허례일 뿐이라고 여겼다.
어딜 봐도 솜털 보송보송한 꼬맹이가 아닌가?
포위망에 가담하느라 마른 비가 뿜어낸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당하준은 이 천지분간 못 하는 야만인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하준! 멈춰라!”
당하준이 진심으로 싸울 작정이라는 걸 눈치챈 당문휘가 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출수를 끝낸 뒤였다.
“구환살?!”
이번 외침은 진규의 것이었다.
당가 비전 구환살(九幻殺).
각기 아홉 번의 변화를 보이는 아홉 자루의 비도는 상대를 현혹시키는 허깨비와 같다고 했다.
당가의 야장(冶場)에서 특수 제작된 비도를 사용하는 구환살은 너무나 유명하여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뭐가 이렇게 난잡해?”
순간 이동에 가까운 검치호의 기동을 경험한 마른 비다.
구환살은 대인 살상에 특화된 기예지만, 고대 괴수의 움직임에 비하면 힘과 속도가 턱없이 부족했다.
유일한 장점은 현란한 변화인데, 노을이 보여준 신묘한 수격에 비하면 그마저도 모자랐다.
‘뼈창.’
채채채챙!
자연기를 머금은, 날카로운 손끝이 아홉 자루의 비도를 정확히 요격했다.
“이럴 수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비기다.
피하거나 흘리는 것도 아니고 손끝으로 받아치다니?
구환살이 단번에 가로막히자 당하준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노옴!”
구환살이 가로막힌 이상 이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설 수 없다.
당가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은비대의 조장.
당하준은 남아 있는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잊지 마. 당신이 먼저 시작한 거야.”
그건 당하준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쾅! 하는 소리가 터지자 마른 비가 시야에서 사라졌고, 뒷목에 가해진 묵직한 충격과 함께 그의 의식이 꺼졌다.
“…….”
당문휘는 착잡한 얼굴로 둘의 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하준의 힘으로는 절대 저 청년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선공을 가했고, 일대일 대결이 시작된 이상 개입할 순 없었다.
“그를 죽이지 않은 점에는 고마움을 전하마.”
툭- 툭-.
언제부터일까.
팔을 늘어뜨린 당문휘는 오른손 검지를 자신의 허벅지에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건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고, 공격할 시점을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다.
“희한한 행동을 하네? 왜 손가락을 두드려?”
마른 비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고민하는 것이다. 싸울지, 참을지를. 가급적 싸우면 안 되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기도 하고.”
“음? 싸우면 싸우고, 아님 마는 거지. 뭘 손가락을 두드려? 미안한데, 그거 좀 바보 같아.”
툭-, 툭-, 툭.
“안 되겠군. 못 참겠어.”
당문휘의 준수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후아아악―
막대한 내공이 응집된다.
객잔 안의 공기가 당문휘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흐르고, 그의 손이 허공에 무수한 잔상을 남겼다.
굳건히 세운 몸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손이 물결치듯 휘도니, 그 형상은 마치 지상에 강림한 천수여래(千手如來)를 보는 듯했다.
“받아라.”
치리링-
손이 흐르는 궤적 위로 홀연히 나타난 수백 자루의 비수.
번뜩이는 은빛 광채가 날을 세웠다.
“이게 바로… 만천화우(滿天花雨)다.”
마른 비는 바짝 긴장한 채 자연기를 끌어올렸다.
전신을 두드리는 첨예한 살기.
보이지 않는 무형의 그물이 온몸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사방과 사우의 여덟 방위는 물론이고 머리 위까지.
야생에서 갈고 닦은 생존 본능은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기술이 있다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당문휘의 손끝에서 피어난 은색의 꽃들이 모든 방위를 메우고 비처럼 쏟아질 거라는걸.
‘이건… 못 피해.’
그렇다면 몸으로 받아낸다.
철골과 강피에 자연기를 흘려 넣어 육신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자연기의 막이 교룡갑을 발동했다.
외부에 자연기를 중첩시켜 두터운 성벽을 쌓았다.
‘그래도 뚫릴 거야.’
저건 가로막는 모든 걸 찢어발길 살육의 꽃이다.
어디로 도망치든, 움치고 뛸 공간마저 장악한 강철의 비가 숨통을 조여 올 거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우르르릉―
마른 비는 우레의 창을 꺼내 들었다.
‘몸으로 받아내고 적을 친다. 나만 당하진 않아.’
마른 비가 결심을 다졌을 때, 강철로 이루어진 꽃비가 내렸다.
퀴아아아악―!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손을 떠난 비수가 저렇게 휘어지는 걸까.
먼저 쏘아진 비수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후방을 점한 비수들을 시작으로, 마른 비를 둘러싼 모든 공간이 칼날에 잠식됐다.
표적에 닿는 순간까지 일치시킨 수백 자루의 비수가 시야를 꽉 채우며 마른 비를 덮쳤다.
“흐아아압!”
꽈광!
오른손엔 뢰창.
왼발은 진각.
힘차게 내리꽂은 야생의 발자국이 자연기를 수직으로 뽑아 올렸다.
역(逆), 뿌리내리기.
지하로 뻗어 나갈 기운이 지상으로 솟구치니, 내리꽂히던 비수들이 반발력에 부딪히며 일순간 주춤했다.
『오오오오오!』
자연기가 실린 함성은 절정에 이른 음공과 같다.
와족 비전의 전투 함성이 쩌렁 울리고, 강렬한 음파가 전방위를 휩쓸었다.
이중으로 중첩시킨 자연기의 벽.
하지만 비수들은 주춤했을 뿐 튕겨 나가지 않았다.
손을 떠난 지금까지도 내공으로 제어가 가능한 모양이었다.
‘충분해!’
다가들던 강철의 꽃들이 주춤했다.
그리고 마른 비는 기회를 놓치는 남자가 아니었다.
번갯불이 터지고, 그의 육체가 전진한다.
철판 같은 등이 전면을 향하니, 중첩된 자연기가 웅혼한 충격파를 내뿜었다.
성도의 객잔에서 울려 퍼진 천둥바위가 만천화우와 격돌했다.
‘뚫려라!’
콰카카카캉!
뚫었다?
아니, 뚫지 못했다.
전면을 메운 수십 자루의 비수가 튕겨 나갔지만, 그건 일부분일 뿐이다.
어그러진 공간 사이로 어금니를 깨문 당문휘의 얼굴이 비쳤다.
양팔을 앞으로 내민 그는 밀려나는 비수들을 전진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금이야!’
천둥바위가 두드린 강철의 벽.
균열이 생긴 그곳에 비장의 한 방을 꽂아 넣는다.
“으아아아!”
마른 비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뢰창을 집어 던졌다.
꽈르르릉!
푸르른 창이 공간을 헤집고, 우레를 모방한 파동이 비수들을 흩뜨린다.
대자연이 선사한 비기는 기어이 만천화우를 꿰뚫고 당문휘의 몸에 도달했다.
퍼어억!
뢰창에 담긴 공능은 소진되어 버렸지만, 인간의 육신에 구멍을 내기엔 모자람이 없다.
왼쪽 어깨가 뚫린 당문휘가 크게 휘청였다.
빠드득!
십 년. 최소 십 년은 차이가 난다.
가문의 지원을 한 몸에 받으며 힘을 키웠는데, 열 살 이상 어린 꼬맹이에게 무너지면 무슨 낯으로 식구들을 대할까.
눈에 핏발이 선 당문휘가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하아아압!”
멈췄던 비수들이 전진하고, 상정했던 표적에 작렬한다.
날카로운 강철의 비가 마른 비의 육신에 붉은 꽃을 피웠다.
퍽, 퍼퍽, 퍼퍼퍼퍽!
‘윽, 큭! 크윽…!’
자연기의 막이 뚫리고, 교룡갑이 허물어진다.
끝도 없이 내리꽂히는 비수가 마른 비의 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이대론 죽을지도…!’
강대한 적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수백 년의 세월을 녹여낸 기예.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만천화우의 위력을 죽였지만, 당가의 비기는 녹록치 않았다.
끌어 쓸 수 있는 자연기가 더 많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가정이었고, 무언가 수를 내지 않으면 인간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질 터였다.
‘윽! 크윽…! 생각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항상 활용해 왔던 게….’
마른 비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지형!’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은 파고들 수 없는 지면이 아니다.
두터운 목재를 덧대 만든 객잔의 바닥.
부디 예상이 맞기를 바랄 수밖에.
“으아아!”
콰앙!
있는 힘껏 내리찍은 진각이 객잔의 바닥을 허문다.
아래로 퍼뜨린 자연기가 목재를 부수니, 마른 비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아니?!”
깜짝 놀란 당문휘의 외침이 들렸다.
술과 물품을 보관하는 지하창고.
지하가 없는 건물이었다면 인간 고슴도치가 되었을 거다.
채채채채챙!
마른 비가 빠져나간 공간에서 비수들이 맞부딪히며 금속성을 울렸다.
‘바로 들어가야 해!’
마른 비는 지하창고의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솟구쳤다.
강대한 기운이 이글거리는 곳.
당문휘가 서 있는 바로 그곳으로!
휘리릭!
머리는 아래로.
곧게 뻗은 발은 하늘로.
마른 비가 가장 먼저 몸에 붙인 기술, 날짐승 떨구기가 지하창고의 천장을 부수며 치솟았다.
“워메, 워메! 삼 대를 이어온 객잔이…!”
객잔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절규가 들렸다.
퍼어억!
바닥을 뚫고 솟구친 발차기가 당문휘의 복부를 가격했다.
“커… 허!”
당가 최고의 기재라는 칭송은 허황된 게 아니었다.
당문휘는 그 와중에도 비수를 뽑아 마른 비의 허벅지를 찔렀다.
“아악!”
비명이 교차하고, 두 사내가 풀썩 쓰러졌다.
마른 비와 당문휘는 통증을 참으며 서로의 얼굴을 노려봤다.
“이게 무슨 난리…! 대, 대주님?”
밖에서 대기하던 은비대의 대원들이 객잔으로 달려 들어왔다.
만천화우가 터지고, 마른 비와 당문휘가 쓰러질 때까지는 고작 숨 몇 번 들이킬 시간에 불과했다.
기절한 당하준과 부상을 입은 당문휘.
은비대원들의 눈이 마른 비에게 고정됐다.
‘쓰러졌어? 대주님이? 저 야만인과 싸우다가?’
믿기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가 전체를 통틀어도 당문휘와 맞상대할 수 있는 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백여 년간 절전되었던 만천화우.
익힐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자가 없어 사장되었던 절기는 현 가주에 의해 복원되었고, 당문휘에게 전해졌다.
그 비기를 습득한 이래, 당문휘는 장로들도 상대할 수 없는 강자가 되었다.
당문휘가 만천화우를 완전히 깨우치는 날, 무림은 십좌의 한 자리를 당가에 내놓아야 할 것이라며 당가주는 껄껄 웃었다.
“이, 일단 저놈을 제압하라! 대주님과 1조장을 부축해!”
은비대원 중 하나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마른 비는 등판은 물론이고 온몸에 빼곡하게 비수를 꽂은 채였다.
줄줄 흐르는 핏물이 객잔의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만!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내 싸움이다! 끼어들지 마!”
당문휘가 비수를 뽑아 드는 은비대원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마른 비를 노려봤다.
“후우…! 발차기 한 번 묵직하군. 내부가 진탕돼서 움직이질 못하겠어…. 똑바로 말해라. 너, 살수들과 한패인가?”
마른 비가 낮게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몇 번을 말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날 따라가서 결백을 증명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냐. 왜 거부해서 일을 크게 만들지?”
“여기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니까? 그리고 당신이 따라오라고 하면 내가 가야 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고 있어.”
마른 비는 몸에 박힌 비수들이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친구. 친구라……. 누굴 만나기로 한 거냐? 그 친구란 자는 너의 결백을 증명해줄 수 있는 자인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이 멋대로 나를 살수들과 엮어 놓고선!”
마른 비가 짜증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아으… 아파 죽겠네. 당신, 좀 솔직해져 봐. 사실 내가 살수들과 연관이 없다는 걸 느끼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