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엄청난 격전을 코앞에서 지켜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진규가 당문휘를 쳐다봤다.
“내가 살수들과 한패라고 확신했으면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었겠지. 하지만 당신의 공격에는 살기가 없었어. 투기만이 가득했지. 내 몸에 그 작은 칼들이 박힐 때도 죽이지 않으려고 위력을 죽였잖아.”
“난 살인귀가 아니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 아닌 이상 살인을 자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딱히 위력을 죽인 것도 아니야. 네가 그 이상한 내공으로 비수들을 저지하지 않았나.”
“뭐, 그건 그렇지.”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당문휘는 말을 이었다.
“내공을 실체화한 푸른 창….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군. 그런 걸 어떻게 만들어 낸 거냐. 아무튼 그 창으로 공격할 때, 네가 먼저 급소를 비낀 걸 알고 있다.”
당문휘가 피가 철철 흐르는 왼쪽 어깨를 짚었다.
“네가 몸통이나 얼굴을 노렸다면 난 죽었겠지.”
“엄살은. 공격을 멈췄으면 피할 수 있었잖아.”
“공격을 멈출 순 없었지. 그럼 지는 거잖나.”
당문휘가 작게 웃었다.
“흐음.”
마른 비가 털퍼덕 주저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나랑 싸우고 싶었구나?”
그 말을 듣자, 당문휘의 눈이 커졌다.
그는 편하게 앉은 마른 비를 바라보다가 똑같이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럴지도. 난 당가의 비밀병기니 최고의 기재니 떠받들어지며 평생을 살아왔다. 한 번의 실수나 패배도 허용되지 않는 삶이었지. 세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답답했다.”
격전을 치른 뒤에 찾아오는 당사자들만의 유대감일까?
당문휘는 뜬금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오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처럼, 당문휘는 쌓였던 속내를 꺼냈다.
주위를 둘러싼 은비대원들은 당문휘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침음을 삼켰다.
“내 의지보다는 외부의 기대와 시선에 강제로 부응해야 하는 삶……. 생활은 물론이고 말과 행동 하나하나까지 모범이 되어야 했지. 내부는 물론이고, 저 살수 놈의 말처럼 외부에서조차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으니까. 말로 표현하니 쉽지만, 그건…….”
“으윽. 듣기만 해도 싫어. 부담감에 내 위가 다 아프다.”
마른 비가 가슴 부위를 쓸며 질색을 했다.
“하하! 그런 솔직한 반응이라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차기 수장. 아까 저 살수가 가주라고 표현했던가? 그거지?”
당문휘는 마른 비가 자신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그래. 아니, 그랬어. 아버지가 족장이다 보니 어릴 때는 부족 식구들이 나한테 거는 기대가 컸거든. 난 당신과 달리 엉망이라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너처럼 출중한 자가 기대를 받지 못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마른 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난 원래 엉망이었다고 했잖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힘을 키우는 데 관심이 없어서 단련도 안 하고 교육에도 안 들어갔어. 맨날 혼나고 꾸중만 들었지.”
“뭔가 계기가 있었나 보군. 네 부족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네 나이에 그 정도의 힘을 쌓은 자가 또 있을 거라고는 믿기 힘들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거 같은데?”
“아, 얼마 전에 족장 결정전을 했는데 내가 제일 세긴 했어.”
“그렇군. 그럼 너도 차기 수장이….”
“아니, 난 때려 쳤어.”
“……?”
당문휘는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하하! 왜 그런 얼굴을 해? 난 당신과 달리 엉망이라고 했잖아. 차기 족장으로 내정됐는데, 때려 치고 나왔어.”
“그게… 가능한….”
“안 될 건 또 뭐야. 나보다 훨씬 잘할 사람들이 있고,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때려 친다…….”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발상이었다.
평생 동안 가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살아왔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당문휘가 살아온 세계에선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 따윈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건대 자신이 정말 가주가 되길 원하는 것인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당신, 이런 이야기를 아무한테나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나한테 하는 거야?”
마른 비가 물었지만, 당문휘는 생각에 잠겨 대꾸하지 않았다.
마른 비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몸에 박힌 비수들을 뽑고, 자연기로 지혈을 하며 기다려줬다.
“이제 알겠군. 내가 왜 너의 도발을 참기가 힘들었는지. 왜 너에게 강렬한 호승심을 느꼈는지. 한 번도 충동에 몸을 맡긴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꽤 시간이 지났을 때, 당문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니, 호기심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삶의 궤적……. 거기서 우러나는 자유분방함. 그리고…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묘한 끌림. 아마도 그게 나를 움직인 것 같군.”
“엉? 뭐라고?”
당문휘가 고심 끝에 내놓은 말이었지만, 비수를 뽑는 데 집중하고 있던 마른 비는 듣지 못했다.
아마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하하하!”
당문휘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유쾌했다.
뿌리도 다르고,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꼬마지만, 그에게 알 수 없는 친근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됐다. 별로 중요한 말 아니니까. 아무튼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 네 말대로 난 네가 살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해. 하지만 내 심증만 가지고 널 놓아줄 순 없어. 이번 일은 세가의 명운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으니까.”
“음. 계속해 봐.”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순 없지만, 네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네 신분을 확실히 해줄 무언가가 없나?”
“내 신분…….”
혼자서 중원에 나온 마른 비가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있었다.
마른 비의 신분을 증명해줄, 확실한 배경을 지닌 사람이.
기가 막힌 시점에, 난장판이 된 객잔의 입구로 그 사람이 들어섰다.
“뭐야? 이거? 화탄이라도 터진 건가? 이게 웬 난리야?”
천으로 감싼 검과 작은 봇짐을 든 여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규야! 왔구나!”
마른 비가 반가움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통증에 낑낑대며 도로 주저앉았다.
“흐익? 이런 맙소사! 비아, 너 왜 온몸이 피투성이야?”
여규가 깜짝 놀라며 마른 비에게 달려왔다.
여규는 마른 비를 부축하고 상처를 살피는 동시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객잔 내부를 훑었다.
온몸이 바스러지거나 비수가 꽂힌 채 죽어 있는 두 부류의 사내들.
그리고 부상을 입고 누워 있는 사람들.
그들을 돌보는, 눈자위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
벽에 틀어박혀서 기절해 있는 남자.
그리고… 평상복을 입은 사내들에게 부축을 받는 진녹색 무복의 사내!
“……응? 사천 당가?”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여규에게 쏠렸다.
천으로 감쌌지만 검이 분명한 물건과 백색의 단정한 무복.
당가의 인물들이 그 옷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점창파?”
양측의 얼굴에 혼란이 이는 순간이었다.
상황을 수습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외부에서 포위망을 형성했던 은비대원들은 예기치 못한 변수에 대한 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하고, 객잔 내부에 있었던 민간인들을 일일이 어르고 달랬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란 완벽히 차단하는 게 불가능하기에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꾸며 던져줌으로써 가끔씩 일어나는 무림인들의 다툼 정도로 위장했다.
객잔의 수리비를 넉넉히 지급하여 불만을 없앴고, 사천에 깊숙이 뿌리내린 당가의 위세를 이용하여 모든 부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까지도 원천 차단했다.
별다른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살수 조장을 포박하고 본가로 압송할 준비를 했다.
진규의 일행을 극진히 대우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문제는 마른 비였다.
여규의 등장으로 살수들과 연관이 없다는 건 확인되었지만, 일방적으로 그를 몰아가고, 먼저 공격까지 했다는 건 큰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비수가 박혀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금창약이나 발라주고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진심으로 사죄하지. 우리 사정이 어쨌든지 간에, 네게 벌어진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불찰이야. 부디 용서해 주길 바란다.”
당문휘는 마른 비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마른 비는 진심 어린 사과를 외면하는 옹졸한 남자가 아니었다.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마른 비에게, 당문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겪은 일에 대해 사죄할 수 있는 기회를 다오. 금전적 보상은 물론이고,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당가에 머물러 주길 바란다. 본가의 의원들은 어떤 명의에도 뒤지지 않는 의술을 지녔지. 그들이 성심성의껏 상처를 돌볼 거야. 본가가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마.”
“아니, 뭘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서 그냥 잘 먹고 푹 자면 나아.”
“잘 먹고 푹……. 내 말 명심하도록 해. 무인에게 몸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야.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 너 같이 뛰어난 자라면 더욱.”
당문휘는 마른 비를 절대 그냥 보내지 않을 기세였다.
그리고 여규도 당문휘의 초청에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해. 비아야. 네가 튼튼한 건 알지만, 이번 건 결코 가벼운 부상이 아니야. 특히 허벅지는 상처가 꽤 깊어. 전문적으로 의술을 닦은 분들에게 보이고 치료를 받는 게 좋아. 네 덕분에 나도 당가 한 번 구경해 보자.”
운남을 처음 벗어난 건 여규도 마찬가지였다.
첫 중원행이었기에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한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당가라면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집단이고, 평생 가도 당가에 접근도 못 해보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당문휘의 초청에 응하면 마른 비의 상처도 치료하고, 당가를 구경할 수 있으니 여규에겐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그래. 그렇게 해라. 이건 내가 원하는 거다. 너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도 왼쪽 어깨에 구멍이 뚫렸으니 한동안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해. 나와 같이 가자.”
당문휘는 마른 비와의 인연이 좀 더 이어지길 바랐다.
그런 그에게, 여규의 전음이 전해졌다.
「맛있는 거! 맛있는 걸 준다고 하세요, 대주님! 그럼 껌뻑 죽을 거예요!」
「……고작 그런 걸로?」
여규를 힐끗 본 당문휘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커, 크흠. 마, 맛있는 걸 주마.”
“진짜?!”
그 한마디로 마른 비의 망설임은 단박에 날아갔다.
당장 가자고 하는 마른 비와 허탈한 표정의 당문휘, 즐거워하는 여규.
그때, 그들의 정겨움을 깨는 존재가 등장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멋대로 외부인을 본가에 초청하다니 어이가 없군!”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남자를 필두로 진녹색 무복을 입은 당가의 무인들이 객잔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