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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68화 (168/463)

168화

“난리가 났다기에 달려왔는데 오자마자 이런 황당한 소릴 듣게 되다니…! 형님!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르는 외부인들을 어찌 본가에 들인단 말입니까!”

당문휘와는 전혀 다른 인상의 사내였다.

그가 침착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면, 이자는 성급하고 과격해 보인다.

나이는 비슷한 것 같지만, 외양부터 목소리까지 모든 면이 당문휘와는 달랐다.

‘굴러먹은?’

사내의 막말에 여규가 눈빛을 굳혔다.

“내 잘못에 대한 사죄의 의미다. 내가 오판하여 무고한 이를 상처 입혔으니 마땅히 그리해야지. 내가 초청한 이상 당가의 손님이고, 이들의 방문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굴러먹다니? 평소에도 내 누누이 당부하지 않았더냐.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당장 사과드려라, 건휘야.”

당문휘는 엄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건휘라 불린 사내는 움찔했지만, 당문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처음이야. 칼에 찔려도 태연히 임무를 완수할 것 같은 이 인간이 처음으로 한 실수. 어떻게든 이걸…!’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도 틈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인간.

당건휘가 보는 당문휘란 그러했다.

무공과 일 처리, 인간으로서의 됨됨이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있어 당문휘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세가의 모든 이들은 가주의 아들이자 직계인 자신을 제치고 방계인 당문휘를 차기 가주로 낙점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당문휘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에게 이번 일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당건휘가 오기 섞인 어조로 반발했다.

“형님이 벌인 일 때문에 신원도 확실치 않은 자들을 본가에 들이다니요? 그걸 누가 허락했단 말입니까? 성도에 있는 의원에 맡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미천한 야만인과 근본도 모를 꼬마를 어찌…!”

“이봐. 그 입 좀 닥치지 그래?”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여규가 당건휘의 말을 잘랐다.

그의 눈에는 과거 사형제들의 괴롭힘에 저항하던 시절의 독기가 차 있었다.

“말하는 본새하고는. 뭐 이런 돼먹지 못한 잡놈이 다 있어? 너, 당가 맞냐?”

여규의 대거리에 당건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뭐라고! 잡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근본도 없는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막말을 내뱉으려다가, 그는 보았다.

여규의 백색 무복과 왼쪽 가슴 위에 수놓인 봉우리 문양을.

당건휘의 눈이 못 볼 걸 본 것처럼 커졌다.

“……점창파?”

포위망을 지휘하다가, 당문휘가 성도 객잔 한복판에서 만천화우를 시전했다는 이야기만 듣고 무작정 달려온 참이다.

뭐라도 꼬투리를 잡으려면 그래야 했다.

그사이 도착한 여규에 대해 당건휘가 듣지 못한 건 당연했다.

“보, 봉검대?”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

그리고 점창 최강의 무력집단, 봉검대.

당건휘가 그 유명한 문양을 모를 리 없었다.

평소라면 객잔에 들어서는 순간 알아봤겠지만, 그는 이 일을 어떻게든 키울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 다른 걸 살피지 못했다.

“그래. 이 새끼야. 나 점창의 제자고, 봉검대 소속이다.”

여규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당건휘를 노려봤다.

왜 어딜 가든 이런 놈들은 꼭 하나씩 있는 걸까.

인간을 분류하는 천박한 잣대와 오만한 시선.

정파의 일원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오랜 경험을 통해, 여규는 이런 인간들을 다물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근본도 없다고 했겠다? 와~ 살다 살다 면전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긴 처음이네. 방금 그거, 본파에 대한 모욕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지?”

당건휘는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당가의 무인들도 술렁였다.

하지만 여규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시면 한탄을 하시겠네. 가주께서 워낙 뛰어난 분이셔서 당가는 머지않아 오대세가의 위치를 회복할 거라고 하셨는데. 당가의 신성이 좀 더 성장하면 십좌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흐뭇해하셨고. 근데 너는 우리를 그따위로 생각한단 말이지?”

좌중에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십좌?! 십좌의 자리를… 양보한다고?”

“점창파에서 십좌에 이름을 올린 무인이면…… 점창고검! 저 꼬마, 고검의 아들인가?!”

여규는 유치하게 자신의 배경을 들먹이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당건휘 같은 인간들을 찍소리도 못 하게 만드는 건 그들이 자부하는 힘과 세력, 그 이상의 배경을 들이미는 것이었다.

“점창파에, 고검의 아들이라니…!”

정파 최강의 무력 집단인 구파일방.

중원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히는 무인들, 중원 십좌.

반면, 오대세가에서조차 밀려난 당가.

당건휘의 표정이 한순간에 새카맣게 썩었다.

“고검…! 자네, 그 위대한 무인의 아들이었나!”

당문휘조차 놀란 얼굴로 여규를 바라봤다.

여규는 그 반응이 꽤 의외였다.

“위대……. 아버지가 원 황실에 투신하시는 바람에 중원에선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변절자라고……. 대주님께서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하실 줄이야. 솔직히 조금 놀랍네요.”

“무슨 소리! 그분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본 자라면 절대 그따위 망발은 하지 못할 걸세! 고검께선 황실에 몸을 의탁한 후에도 끊임없이 한의 민초들을 살피셨어. 그분께서 군부에 들어간 이후, 원의 군졸들이 한의 백성을 수탈하는 일이 현저히 줄었지! 변절자라니! 그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린가!”

당문휘의 얼굴에선 여휘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났다.

방금 전에 만났지만, 여규는 그가 이런 열변을 토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당문휘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당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하준이 여규의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마른 비를 곁눈질했다.

‘저자. 저 소수 부족의 청년과 한바탕 싸우고 난 뒤에 대주님의 무언가가 바뀌었어. 그 뒤에 대화도 나누었다던데, 대체 무슨 말을 나눈 거지?’

당하준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었다.

마른 비의 도발에 욱해서 달려들었지만, 얻어맞고 기절한 자신조차 지금에 와선 별다른 반감이 들질 않았다.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한한 매력을 지닌 청년이었다.

“고맙습니다, 대주님. 대주님 같은 분께서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제가 다 뿌듯하고 기쁘네요.”

당하준이 마른 비를 살피는 사이, 여규는 당문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당건휘를 노려봤다.

“대충 상황이 접수됐을 텐데 가만히 있네? 너, 사과 안 하냐?”

당건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다시없을 기회인데, 난데없이 웬 점창파가…!’

현 가주의 아들이 구파일방의 일원에게 근본이 없네 운운하는 막말을 지껄였다.

그때야 몰랐다고 쳐도, 실상을 알게 된 뒤에도 사과를 안 했다?

최악의 경우,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건휘는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오. 그대가 점창파의 제자인지 몰랐소. 방금 한 실언에 대해 깊이 사과드리오.”

“점창파의 제자인지 몰랐다? 내가 점창의 제자가 아니었으면 사과를 못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뭐, 좋아. 그 사과, 받아들이겠어. 그럼 이제 내 친구에게도 미안하다고 해야지?”

당건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비아야. 어떻게 생각해?”

여규는 당건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마른 비에게 물었다.

“‘미천한’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서 모르겠지만, 야만인이란 말은 알아. 그거 기분 나쁜 말이야. 나한테도 사과해, 당신.”

“……알겠소. 내가 그대들에게 결례를 저질렀음을 인정하오. 본인이 모자란 탓이니 부디 용서하시길.”

속마음이 어떻든 당건휘는 마른 비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당문휘를 흠집 내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왔건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만 당한 그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귀하의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이제 뒤끝 없이 앙금은 털어내도록 하죠. 그럼 은비대주님의 초청을 받아, 저희가 귀하의 가문에 방문해도 되는 거겠죠?”

여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흠잡을 데 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그게 더 속이 뒤틀렸지만, 당건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다시 한번 결례를 사과드리겠소.”

차기 가주로 확실시되는 이가 초청한 손님들이다.

당문휘가 성도 거리 한복판에서 만천화우까지 노출하며 일을 벌인 걸 책잡기 위해 온 것이지, 애초에 그들을 저지할 명분은 없었다.

당건휘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대동했던 무인들을 데리고 황급히 객잔을 빠져나갔다.

“자네, 겉보기와 달리 보통이 아니군.”

당문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익숙하거든요. 이런 일.”

여규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무 나쁘게 보지는 말아주게. 나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조금 엇나갔을 뿐 본바탕까지 나쁜 녀석은 아니야. 어릴 때부터 가주의 아들인 자신보다 사촌 형인 내가 항상 주목을 받았으니 건휘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가.”

여규는 별로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굳이 언급하여 당문휘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른 비와 자신을 보며 수군대는 당가 무인들의 시선을 느끼며, 여규가 쾌활하게 말했다.

“대주님. 그럼 이제 당가를 구경시켜 주실래요?”

은비대는 당가의 깃발이 걸린 마차 세 대를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다.

난생처음 마차를 타보는 마른 비가 신기해하며 감탄을 연발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른 비와 여규는 죽고 다친 진규의 일행과 마차를 나눠 타고 성도의 도성을 빠져나왔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평평한 땅 저편에 야트막한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언덕을 넘는 순간, 광활히 펼친 황금빛 벌판이 두 팔을 벌리고 일행을 맞아 주었다.

“와아아~!”

내리쬐는 햇볕 아래 반짝이는 대지.

원시림으로 뒤덮인 운남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광경에 마른 비가 탄성을 질렀다.

당문휘는 빙긋 웃더니 언덕 위에서 마차를 멈추고 주변의 풍광을 감상할 시간을 주었다.

“저기 산자락이 보이지? 저 아래에 본가가 자리 잡고 있다.”

벌판이 끝나는 곳에는 웅대한 산맥이 시야를 가리며 서 있었다.

천험의 산맥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사천의 대지.

성도를 병풍처럼 둘러친 산의 초입에는 완만한 비탈이 있었고, 사천 최강의 가문은 그 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여규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가라고 해서 큰 규모의 마을 정도를 예상했는데 저건…….”

여규의 놀람은 온당했다.

그건 작은 요새나 다름없었으니까.

성인남성 키의 서너 배는 됨직한 성벽이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나의 혈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위용.

산맥에 비하면 점에 불과한 당가가 마치 산맥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볼 만 하지? 본가를 찾은 이들이 모두 놀라더구나.”

선조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일구어낸 터전.

당문휘의 어조에선 자부심이 묻어났다.

“당가에 온 걸 환영한다.”

당문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마른 비와 여규를 돌아봤다.

“……?”

하지만 곧 그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당가를 구경하는 여규와 달리 마른 비는 얼굴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당문휘의 질문에, 마른 비가 난감한 어조로 대꾸했다.

“음……. 사실 내가 혼자가 아니거든.”

“그야 규가 있으니 당연히 혼자가 아니….”

“아니, 규 말고 친구가 또 있어.”

“친구가 더 있다고? 그럼 진작 말을 했어야지. 어디에 있는 거냐? 성도?”

“아니, 언덕 아래에.”

당문휘는 물론이고 뒤따르던 당가의 무인들조차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돌려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농담을 하는 거라면 알아듣게 해주겠니.”

“농담 아니야. 계속 우리 뒤를 따라왔어. 근데 그 친구가….”

마른 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언덕 아래를 바라봤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하다는 표정이었다.

“사람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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