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사람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스르륵―
“……?!”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다.
충분한 거리를 뒀기 때문일까?
당가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당문휘조차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풍경이 흔들리고, 새하얀 털이 햇볕을 흩뜨리며 일어난다.
언덕 아래에서 집채만 한 흰 호랑이가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냐 저 짐승은?!”
당가의 무인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지만, 본가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은비대원들은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채 마차를 호위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마교 유일 살수이자 무림 역사상 최고의 암살자라는 음살이라면 모를까.
당가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감지하지 못한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황급히 비수를 뽑아드는 그들 앞으로 마른 비가 나섰다.
“당황하지 마, 아저씨들. 내 친구야.”
“친구라니? 저 맹수가?”
당하준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응. 자세히 설명하자면 긴데……. 우리 부족은 평생을 함께할 동물을 한 마리씩 벗으로 삼아. 저 녀석이 내 반려수고, 이름은 별비야. 운남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는데….”
마른 비는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바짝 긴장해 있던 은비대원들이 비수를 내린 건, 여규가 마른 비의 말을 확인해준 후였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무기를 집어넣진 못 하고 있었다.
“허어……. 넌 정말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반려수라니. 저건 단순한 맹수가 아니잖나. 어떻게 짐승이 이런….”
당문휘의 눈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은비대원들보다 월등히 강한 만큼 그는 별비가 지닌 힘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빨려들 것 같은 푸른 눈과 만물을 위압하는 강대한 기운.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지만, 이 짐승은 기를 운용할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음. 원래는 나만 들어가려 했는데, 별비가 안 된다고 박박 우겨서. 그렇다고 이대로 갈 수도 없잖아.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건 예의도 아닌 데다 그랬다간 난리가 날 거야. 저 안에서는 분명히 발각될 테니까.”
별비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다.
아무리 어스름의 은신을 몸에 붙였다고 해도 자연지형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지 않는 이상, 절정을 넘나드는 고수들의 이목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를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마른 비를 혼자 보낼 수는 없는 일.
오는 내내 설득했지만, 결국 마른 비는 별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장담하는데, 별비는 얌전히 나만 따라다닐 거야. 그러니까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
“저도 보장할게요. 별비는 창산에도 머무른 적이 있어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둘의 말에, 이번엔 당문휘의 얼굴에 난처함이 떠올랐다.
당가의 무인들 중 상당수는 눈을 비비며 별비를 쳐다봤고, 몇몇은 당문휘에게 절대 들여선 안 된다는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그 부산스러움을 가만히 지켜보던 별비가 마른 비에게 의지를 전했다.
〔다 떠든 거냐. 그럼 빨리 가자. 너는 아까 맛있는 걸 배 터지게 먹었겠지만, 난 아무것도 먹질 못했어. 이 우매한 녀석들에게 들어가자마자 소 한 마리 내오라고 전해라.〕
당가 무인들의 놀람이 서서히 가라앉는 걸 보고, 별비는 움직였다.
육중한 몸체가 언덕을 타고 가까워지자, 은비대원들의 긴장도가 다시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결국 보다 못한 당문휘가 별비를 멈춰 세웠다.
“자, 잠깐! 너, 저 영수와 대화가 가능한 거지? 천천히 오라고 해라, 천천히! 우리가 적응할 시간을 좀 줘! 후우… 이대로 들어갔다간 난리가 나겠군. 먼저 사람을 보내서 알려야겠다. 꼭 같이 들어갈 수 있게 할 테니 우리가 준비할 시간을 좀 다오.”
당문휘는 골치가 아픈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별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끼이익―
당가의 정문이 열렸다.
요새와 같은 외형대로 튼튼한 성문까지 완비된 구조였다.
성문 너머로 진녹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당가가 폐쇄적이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성벽에 성문까지 보유하고 있을 줄이야. 이건 마치… 하나의 축소된 왕국을 보는 느낌이야. 중원 어느 문파를 가도 이렇진 않을 거야.’
그저 신기해하는 마른 비와 달리, 여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성문을 통과하자 마중 나온 무인이 당문휘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주님. 부상이 심각하시군요. 특수한 상황이니만큼 가주께서 보고는 생략하고 바로 의원으로 이동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치료를 하고 계시면 그리로 가셔서 듣겠다고 하시는군요. 손님들께서도 쉬고 계시면 가주께서 직접 숙소로 방문하실 겁니다.”
“송구하군. 알겠네. 그리하지.”
여규는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중대한 일 때문에 이번 싸움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한데 가솔의 부상을 염려하여 우선 의원에게 보낸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방문하여 보고를 듣는다니?
게다가 자신들의 상황을 감안하여 숙소로 방문한다고 했다.
이치에 맞는 결정이지만, 공지량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점창이나 당가나 같은 정파에 속한 집단들이지만, 수장의 성향은 판이하게 달랐다.
여규는 문득 당가의 가솔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선 의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안내하는 무인은 마른 비와 여규, 진규 일행에게 정중히 포권을 건넸다.
“그리고… 음… 반려수라고 들었습니다만…… 방금 도축한 신선한 고기를 의원 마당에 준비해두었습니다. 살아 있는 짐승을 제공해 드리는 건 어렵다는 점, 양해해 주시길.”
침착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도 별비를 보고 동요를 감추진 못했다.
의원들은 마른 비를 앉혀 놓고는 만천화우가 꽂힌 부위와 비수가 후벼 판 허벅지를 능숙한 손길로 치료했다.
대충 금창약을 바르고 자연기로 눌러두었던 상처들에 전문적인 처치가 가해졌다.
깨끗이 씻고 맛있는 음식까지 먹은 후에 마른 비와 여규, 진규 일행은 숙소를 배정받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침상에 몸을 누이자 전투와 여행 중에 쌓인 피로가 한결 가시는 느낌이었다.
“여기 오길 정말 잘했어. 너무 좋다.”
마른 비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여규에게 조용히 물었다.
“규야, 느꼈어?”
여규는 마른 비를 힐끗 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어오면서 느꼈어.”
숙소는 당가의 북서쪽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배치는 내부에 머무는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주변 구조물들에 완벽하게 포위된 형태였다.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에는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는 무인들이 겹겹이 포진하고 있었다.
“비아야. 네가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 아직 우리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설령 확인이 됐더라도 어느 문파를 가든 이런 식으로 만약을 대비하는 건 당연한 거야.”
마른 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점창의 제자라고 하지만, 여규 또한 본인이 밝힌 것일 뿐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규가 스스로를 밝힌 순간부터 바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겠지만, 현재로선 오직 당문휘의 판단과 직감을 믿고 둘을 들인 거나 다름없었다.
“비아야. 만약에 빠져나가려고 하면 어떨 거 같아?”
숙소로 들어오며 가늠한 결과, 자신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별비와 함께하는 비아라면 어떨까.
여규의 물음에 마른 비는 생각에 잠겼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려워. 하나하나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포위된 상황이라 사방에서 몰아칠 거야. 별비와 같이 싸워도 힘들어. 어느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뒤에 겹겹이 준비된 무언가가 다가올 거야. 느낌이 그래.”
“너도 힘들다니……. 명불허전이네. 대주님도 그렇고, 은비대도 그렇고, 당가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어. 정말 대단해.”
점창의 주요 무력 집단들과 냉철하게 비교해본 결과다.
사용하는 무기가 다르고, 무공이 다르지만, 은비대는 결코 설검대나 풍검대, 호검대에 밀리지 않았다.
너른 하늘과 싸운 끝에 봉검대, 운검대가 몰살했고, 그 바람에 점창의 전력은 크게 반감됐다.
새로 구성한 봉검대, 운검대가 자리를 잡아가지만, 예전의 전력을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에 말인데……. 우리가 저걸 뚫으려면 너와 별비가 힘으로 밀어붙이고, 그 틈새를 내가 메꾸면….”
“어려울 걸세.”
“?!”
침상에 누워 있던 마른 비와 여규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섰다.
“크르르…….”
마른 비의 침상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별비도 벌떡 일어나 이빨을 드러냈다.
만개한 꽃잎 형태의 비수들이 그려진 문양.
왼쪽 가슴 위에 수놓인 은빛의 문양은 진녹색 무복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육십 초반에서 중반?
뒷짐을 진 노인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웠다.
젊은이 못지않은 각진 턱과 날카로운 눈매는 세월의 풍화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대단한 젊은이들이군.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출중함이라니. 우리 문휘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는데, 자네들 덕분에 천하가 넓다는 걸 새삼 깨달았네.”
부드러운 미소와 인자한 어조.
노인의 외견 어디에서도 긴장할 만한 구석을 찾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의 비수가 전신을 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 엄청나!’
여규도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아무런 기세도 발산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무섭다.
기나긴 세월, 고련을 통해 다듬어진 인간 자체의 예기.
다른 사람은 모를 수도 있지만 자신은 익숙하다.
아버지가 바로 이런 느낌을 주었으니까.
여규는 여휘가 술잔을 기울이며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십좌. 그들이 중원 최고를 다투는 무인들이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규야. 잊지 말거라.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강자들이 모래알처럼 많다는 것을. 십좌는 그저 서열 매기기 좋아하는 이들이 근래에 왕성히 활동한 무인들을 나열한 것일 뿐이야. 어지간해서는 무공을 드러낼 일이 없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 가주들의 경지가 어떨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중원은 물론이고 새외에는 천외천의 강자들이 즐비하다. 저 와족의 족장만 봐도 알 수 있지.’
눈앞의 노인은 결코 아버지에 못지않다.
아버지가 우위에 있더라도 그건 실전에서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일 뿐.
그리고 이 정도 기운을 뿜어내는 노인이라면 한 명밖에 있을 수 없었다.
자세를 바로 한 여규가 정중하게 포권을 건넸다.
“무림 말학, 점창파의 여규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마른 비와 별비의 감각에 걸리지 않고 이토록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든 자.
백여 년간 절전되었던 만천화우를 복원시켜 당문휘에게 안겨준 거인.
당가의 가주, 천수사(千手士) 당천기가 인자하게 웃었다.
“허허. 오래전 휘를 보았을 때 감탄을 금치 못했거늘. 자네는 아버지의 재능을 뛰어넘는군. 정말 대단해.”
“과분한 말씀입니다, 가주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극히 정파스러운 예가 오갔다.
하지만 중원의 예와는 담을 쌓은 마른 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우와아~ 할아버지가 가주야? 진짜 대단한데? 무서울 정도로 강해! 그믐 할아범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야!”
당천기가 그믐이 누군지 어찌 알까.
면전에서 다른 이와 비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반말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무례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당천기는 웃었다.
“자네로군. 문휘를 쓰러뜨린 청년이. 보고를 듣고 정말 궁금했지. 과연 그럴 만해. 대단하군.”
“에이~ 아냐. 나도 쓰러졌어, 할아버지. 비긴 거라구.”
“나이를 감안하면 문휘의 패배라고 보는 게 옳겠지. 운남에 자네 같은 이를 키워낼 소수 부족이 있었다니. 보고를 듣고 정말 놀랐다네.”
거기까지 말한 당천기는 마른 비 옆에 있는 백호를 바라봤다.
“영수로군. 기를 운용하는 짐승이라니. 정녕 믿기 힘든 일이야. 반려수라고 했나?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알겠어. 예전에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던 거야.”
“응? 잘못 보다니? 뭘?”
오랜 기억을 더듬듯 당천기의 눈이 아련해졌다.
“십오 년쯤 전이었나. 섬서(陝西)로 넘어가는 길목인 광원(廣元)에서 두 눈을 의심케 할 거조를 보았지. 그리고 그 발목을 붙잡고 날아가는 남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