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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70화 (170/463)

170화

“어?! 그거 혹시 올빼미였어?”

마른 비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당천기는 눈살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올빼미라……. 너무 거대해서 올빼미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이렇게 날개를 펴면 안쪽에 검은 깃털이 있는?”

마른 비가 양팔을 날개처럼 퍼덕였다.

특징적인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당천기의 억양이 높아졌다.

“그래, 맞네! 분명히 그랬어. 마치 검은 태양이 뜬 것처럼 흑색의 깃을 지닌 새였지. 순식간에 휙 지나갔지만, 똑똑히 기억하네. 그리고 그 새가 뿜어내던 엄청난 기운…….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내공이 틀림없었어.”

“어둔 날개야. 그 올빼미의 이름. 우리 부족의 장로인 그믐 할아범의 반려수고.”

당천기는 의문이 풀린 표정이었다.

“그렇군. 믿기 힘든 광경이었고, 찰나의 일이라 내가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했네. 자네와 이 백호를 보고 그때의 기억이 살아났지. 반려수라……. 허허, 어지간한 일들은 모두 겪어 보았다고 자부했는데, 세상엔 아직도 놀랄 일투성이군.”

당천기는 마른 비와 별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노부의 이름은 당천기라고 하네. 미흡하나마 당가를 책임지고 있지. 우리 식구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점,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네. 상처가 나을 때까지 편히 머무르게나.”

“마른 비야. 운남 와족 출신. 사양 않고 잘 쉬다 갈게. 아, 할아버지가 가주랬지? 부탁이 있는데, 맛있는 걸 많이 주면 좋겠어. 사천의 음식은 정말 맛있더라구.”

“음? 맛있는 음식? 허허, 허허허!”

당천기는 유쾌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독특하군. 성격이나 품성도 그렇지만,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무언가가 있어. 흠… 무공은 아니고, 상단전과 중단전의 공능인가?”

당천기의 눈이 번쩍였다.

정파에서 내로라하는 세가의 가주답게 마른 비의 야수 친화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에이, 할아버지.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불편해.”

마른 비는 덮쳐오는 탐색의 눈길을 웃으며 받아넘겼다.

너른 하늘이나 그믐 같은 강자들을 어릴 때부터 봐온 그에게 당천기의 시선을 소화하는 것쯤은 어려울 게 없었다.

‘허어! 정말 대단하구나, 이 아이!’

당천기의 얼굴에 또 한 번 감탄이 떠올랐다.

‘이 아이와 문휘의 만남이 당가에게 축복이 될지, 아니면….’

당천기의 눈이 깊어졌다.

곧 전에 없던 격란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당가의 미래를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 펼쳐진다.

그 불투명한 날이 닥쳐왔을 때, 당천기는 이 걸출한 청년들이 당가와 우호적인 관계로 남길 바랐다.

“자네의 출중함이 이 늙은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군. 불편했다면 사과하겠네. 내 특별히 지시하여 사천의 별미를 준비하도록 하지. 시간 내줘서 고마웠네.”

당천기는 마른 비와 별비, 여규와 차례로 눈을 맞추고 숙소의 문을 나섰다.

“후아! 진짜 긴장했어!”

여규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을 풀며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을 해? 너답지 않게. 저 할아버지가 강해서?”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때, 전장의 한복판에서 와족 전사들을 상대하면서도 기가 죽지 않았던 여규다.

마른 비는 당천기 앞에서 딱딱하게 굳은 여규의 모습이 의외였다.

“뭐, 그것도 없지는 않지만, 내가 긴장했던 건 다른 것 때문이야. 가주님은 중원 무림에서 정말 유명한 분이시거든.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 가주님에 대해 많이 듣고 자랐어. 동경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여규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래? 그 할아버지가 유명한 사람이야?”

“그럼! 백년 간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만천화우를 복원한 분인걸!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흑사방(黑蛇幇)이란 사파의 무리가 사천에서 준동했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나 봐. 특히 방주의 무공이 엄청나서 청성파(靑城派)와 아미파(峨嵋派)의 검사들 수십 명을 혼자서 살해했대.”

“청성? 아미? 거기도 구파일방인가 그거야?”

“응. 당가와 더불어 사천에 위치한 정파의 세력들이야. 각 파의 장로들이 이끄는 검대조차 흑사방의 방주를 막지 못해서 사천의 적색분지(赤色盆地)가 그들의 피로 물들었지.”

“와, 그 방주란 사람 진짜 강했나 보다.”

문파마다 보유한 힘에 차이는 있겠지만, 구파일방이라면 마른 비도 대략적인 힘을 유추할 수 있다.

설지굉 같은 장로급이 이끄는 점창의 주력 검대.

어지간한 무인들은 그 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도륙이 날 터였다.

“응. 정말 강했대. 그래서 청성파와 아미파의 장문인이 직접 나서려던 때였어. 적색분지 끝자락에 젊은 시절의 가주님이 나타난 거지.”

“그리고는 방주란 사람을 해치운 거야? 아까 객잔에서 봤던 칼 던지는 기술로?”

“응. 만천화우가 백 년 만에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어. 흑사방은 그날로 지워졌고, 무림은 열광했지. 비아, 너는 직접 받아봤으니 잘 알겠다. 그거, 엄청 화려하다면서?”

마른 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런 기술은 처음 봤어. 비수라고 했나? 자루 없는 작은 칼들. 수백 개의 비수가 꽃처럼 피어나더라.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지 뭐야. 그게 막 폭우처럼 쏟아지는데…!”

여규는 눈을 반짝이며 만천화우를 묘사하는 마른 비에게 집중했다.

“은비대주님은 아직 만천화우를 대성하지 못했을 거야. 진짜 만천화우는 개인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고 들었어. 지니고 있는 모든 비수를 쏟아 부어서 한 명의 적을 격살하는 궁극의 살상기. 그야말로 당가 최후, 최강의 비기지.”

“음. 그 아저씨의 기술이 완전한 게 아니었구나. 그것도 엄청났는데. 거기서 수준이 더 올라가면 정말 까다롭겠는걸.”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궁금해졌는지 여규에게 물었다.

“나랑 싸운 아저씨랑 가주라는 할아버지. 그리고 은비대라는 무인들. 당가의 힘은 여규 너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강해. 그런데도 오대세가라는 다섯 가문에 들지 못한다고? 그럼 그 다섯 집들은 대체 어느 정도인 거야?”

“음… 그게 말이지….”

여규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전투와 병기에 관한 정파 무림의 고집, 그로 인한 당가의 추락을 마른 비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니까.

“비아, 너는 싸울 때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해선 안 되는 일?”

“응. 가령 낭심을 차면 안 된다던가, 여성의 가슴 부위를 공격하면 안 된다던가, 이빨로 귀를 물어뜯으면 안 된다던가 하는.”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마른 비는 별 희한한 말을 다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우선은 싸우지 않는 게 최선이지. 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됐고, 내 목숨이 위협받는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남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생사결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무인 대 무인의 싸움에서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는 건 웃기는 발상 같아. 약자를 인질로 잡거나 비열한 외적 수단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면, 무인끼리의 실전에선 모든 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허용이라는 말도 황당한데? 그런 걸 하면 안 된다고 금지라도 시켜?”

여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파 무림은 좀 그래.”

마른 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야, 그럼. 적한테 죽기 직전인데 ‘거시기를 차는 건 좀 거시기 하니까 난 그냥 죽을래.’ 하고 죽어?”

마른 비의 말이 재밌는지 여규는 키득댔다.

“설마. 그런 상황이 오면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하겠지. 하지만 정파에선 표면적으로나마 예의에 어긋나거나 치사해 보이는 행위들을 금지시켜. 싸움법은 물론이고, 무기까지도.”

“무기? 무기는 또 왜?”

“끄응. 이런 걸 네가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무림 역사 초창기엔 검, 도, 창, 활을 제외한 병기를 쓰는 자들은 무조건 사파로 분류됐었대.”

“…….”

마른 비는 이제 이해하기를 포기한 얼굴이었다.

“낫, 암기, 철퇴, 쇠스랑 같은 건 물론이고, 호조(虎爪), 거치도(鋸齒刀), 혈적자(血滴子), 륜(輪) 등의 기문병기(奇門兵器)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기들이 격이 떨어지거나 비겁하고, 또는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금지됐었어. 그런 걸 사용하는 자들은 행실이 아무리 올바르더라도 정파에 속할 수 없었지.”

“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무기라는 거, 결국 스스로를 지키고 상대를 효율적으로 쓰러뜨리기 위한 수단 아냐? 아예 맨손으로 싸운다면 모를까, 어차피 쇠붙이를 들 거라면 손에 맞는 걸 쓰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음…. 내가 쓰는 검을 예로 들어볼까. 정파에선 검을 고귀한 무기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유명한 검문들에선 검 외의 무기를 쓰는 무인들을 얕잡아 보는 경우가 많아. 점창은 최고수인 봉검, 운검 장로님이 도(刀)와 창을 쓰시니 그렇지 않지만.”

마른 비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파라는 사람들이 정말 그렇다면, 그건 진짜 이상한 거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거지,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어떤 방식으로 싸우느냐와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가 뭐가 중요해?”

마른 비의 말에, 여규는 빙긋 웃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협의의 정신과 신념을 지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런 걸로 쓸데없이 구분을 짓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아마도 우리는 사파와 다르다는 걸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본질이 아닌 엉뚱한 부분에 집착하게 된 거지. 본질이라는 건 평소에는 쉽게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

정파 무림의 허례허식과 이해하기 힘든 기준에 대한 반발.

여규는 어릴 때부터 고민해온 부분을 이야기했지만, 이 이상 가면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진다.

그는 아차 하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그런 분위기 때문에 이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당가는 사파로 분류됐어. 신묘한 경신술로 거리를 두고, 비수를 날려서 상대를 제압하는 게 당가의 싸움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가 나눈 논의들이 정파 무림 내부에서도 일었고, 협의의 정신을 지켜온 당가는 정파에 편입됐지. 심지어 막강한 힘을 인정받아 바로 오대세가에 추대됐어.”

“그런데? 지금은 왜 밀려난 거야?”

“그건 내가 말해주마.”

대화에 끼어든 자는 당문휘였다.

어깨에 붕대를 감은 그가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아저씨, 몸은 괜찮아? 가주 할아버지한테 무슨 보고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저씨… 라고 불릴 만큼 나이 차이가 나는 것 같진 않다만? 몸은 괜찮다. 보고도 이미 올렸어. 가주님은 지금 진 선배님과 면담 중이시지.”

당문휘가 마른 비에게서 여규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가 설명해도 되겠나?”

“네? 아, 그럼요. 경청하겠습니다.”

당문휘가 눈인사를 하고 다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무림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우리의 비도술은 처음엔 대단히 위협적이었지만, 차츰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지. 하수들을 상대로는 유용하지만, 비수를 흘리고 거리를 좁힐 능력이 있는 고수들에겐 통하지 않게 된 거야.”

“그럴 리가요! 당가의 비도술은 여전히 무림 최고의…!”

여규의 반론을, 당문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우리가 약하다는 게 아니다. 규, 네 말처럼 비도술만큼은 누구도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무공 자체의 태생적 한계가 명확해.”

지금 이 순간, 당문휘는 마른 비와 여규에게 대단히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대량 살상이 가능하고, 하수와 중수들을 상대로는 강력하지만, 고수들을 잡으려면 몇 수 위의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다. 절정을 넘나드는 무인을 잡으려면 만천화우와 같은 절대 비기를 터득해야 하는데,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당문휘는 잠시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즉, 고수들과의 결전에서는 효율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가전무공에 대한 냉정한 평가.

아마도 그것은 오랫동안 당가의 수뇌부가 고민해온 부분일 터였다.

“당가가 오대세가에서 제외된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지? 우리는 비도술의 단점을 보완하고 전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당문휘가 깊게 숨을 들이켜고, 또박또박 말했다.

“용독술(用毒術). 우리는 수십 년간의 연구 끝에 전투에 독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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