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71화 (171/463)

171화

“독?”

“그래. 독. 그 때문에 정파 무림의 엄청난 비난을 받고 오대세가에서 퇴출당했지.”

마른 비가 여규를 힐끗 돌아봤다.

여규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공격 방식에 대한 제한은 물론이고, 무기에까지 차별을 두는 정파 무림이 독을 사용하는 걸 두고 볼 리 없었지. 정파를 대표하는 다섯 가문 중 하나에서, 정파의 수치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오대세가에서의 퇴출은….”

오랜 세월 당가가 정파 무림에 기여한 공로와 그들이 보유한 막강한 힘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고도 남았으리라.

당가 내부에서조차 독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전대 가주와 후계로 낙점됐던 당천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삼십 년.

온갖 오명을 뒤집어썼고,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손가락질하지만, 당가는 비수와 독을 양손에 쥐고 가전무공의 한계를 극복해냈다.

“우린 후회하지 않는다. 어떤 허울 좋은 소릴 늘어놓든 결국 무림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있어야 해. 가문을 지킬 힘이 필요했고, 우린 그렇게 했을 뿐이다. 검이든 독이든 결국은 수단일 뿐이야.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우리에게 달린 거겠지.”

당문휘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여규 역시 당가의 결정을 십분 이해하는 쪽이었다.

“아버지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가주님의 결정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니라고. 용독술도 검처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요. 아버지도 한의 민초들에게 실질적인 보탬이 되기 위해 원 황실에 투신하신걸요. 독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당가의 몫이고, 저는 당가가 옳은 길을 가리라 믿어요.”

“고맙구나. 우리는 꼭 그리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꼭 시간에 비례하진 않는다.

서로를 바라보는 당문휘와 여규의 눈엔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인간들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던 별비는 마른 비에게 그르렁댔다.

〔징그럽게들 떠드네. 그만 떠들고 저 인간한테 소나 한 마리 더 잡으라고 전해라.〕

* * *

당가 정중앙에 자리한 가주의 집무실.

당천기를 중심으로 당문휘와 당건휘, 그리고 세가를 책임지는 핵심 중진들이 자리 잡았다.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수광 장로, 강남의 상황이 어떻소?”

“가주께서 예상하신 그대롭니다. 십 년이 넘도록 움직이지 않고 힘을 키운 ‘그’는 얼마 전 남쪽을 침묵시켰죠. 곧 동쪽과의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수광이라 불린 당가의 장로가 눈을 빛냈다.

현황 보고가 끝나자 모두가 당문휘를 바라봤다.

가주의 명으로 당문휘는 이번 일을 책임지고 추진하고 있었고, 진규 일행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뜻 있는 무인들을 초청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동쪽마저 평정한다면 그는 강남 일대를 제패하게 되겠죠. 북쪽의 주인이 있다지만, 둘은 긴밀한 관계니 실질적으로 하나의 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십 년 전, 그가 호언장담했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가주님의 안목이 옳았습니다. 그는 호랑이였어요.”

당문휘의 말에 묵묵히 듣고 있던 당천기가 입을 열었다.

“남쪽을 무너뜨린 이상 동쪽마저 집어삼키는 건 시간문제일세. 그는 십 년 전의 약속을 이행했어. 이제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을 보여줘야겠지. 은비대와 녹수대(綠手隊)는 언제든지 출진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알겠습니다, 가주님.”

회의를 주관하는 당천기는 마른 비와 여규 앞에서 웃던 인상 좋은 노인네가 아니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온 거대 무력 집단의 수장.

그에게선 사람을 부리는 노련함과 지도자로서의 위엄이 자연스레 배어났다.

“본가의 힘은 더 이상 축적할 수 없을 만큼 팽창해 있네. 삼십 년 전 꿈꾸었던 목적은 달성했지. 대신 우리는 명성과 평판을 잃었어. 모두 알다시피 중원 무림은 우리를 욕하고, 손가락질하네. 그리고 이대로는 무슨 짓을 해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할 거야.”

당천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눈이 정원에서 뛰놀고 있는 당가의 미래들을 담았다.

“정파인들조차 진녹색 무복을 보면 수군대며 멸시하기 일쑤라지. 난 더는 우리의 아이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걸 보고 싶지 않네. 저 아이들이 당가의 일원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길 바라네. 나는 이번 일에 본가의 사활을 걸 것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가주님. 수년간 총력을 기울여 천하 정세를 살폈습니다. 그가 정말로 강남을 통일한다면 힘의 무게추는 뒤집힙니다. 이 일은 성공할 것이며, 본가는 지금의 힘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과거의 그것을 뛰어넘는 명성을 이룩할 겁니다.”

당문휘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또한 그의 얼굴은 진규가 그랬듯 신념으로 빛나고 있었다.

“동시에 이건 한의 민초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정말 많은 것이 바뀌겠죠. 십 년 전, 모두가 고개를 저을 때 그의 제안을 수락한 가주님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당건휘가 삐딱한 말투로 말했다.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 형님은 여전히 그놈의 대의 타령이군요. 스스로 큰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에 취해선 안 됩니다. 우린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오직 세가의 이익을 염두에 두며 철저히 실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건휘, 네 말도 틀리진 않았다만, 우리의 본분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린 대의와 명분을 천금처럼 여기는 정파야. 그저 실리에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가 사파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

당문휘와 당건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같은 일을 진행하면서도 둘이 염두에 두는 부분은 판이하게 달랐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천기가 등을 돌리며 웃었다.

“너희 둘은 어릴 때부터 사사건건 부딪치는구나. 대의와 실리. 무엇이든 좋다. 둘 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니까. 그것들은 상충할 때가 많지만, 때론 부합하기도 한다. 이번 일이 그런 경우야.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다른 쪽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거라. 너희 둘이 조화를 이룬다면 그건 본가의 큰 복이 될 게야.”

삶의 깨달음이 우러나는 말이었다.

속마음이 어떨지는 몰라도 당문휘와 당건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똑똑.

세가의 중진들이 둘의 의견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와라.”

무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 당천기에게 조그만 전통을 건넸다.

밀봉 여부를 꼼꼼히 확인한 당천기가 검지만 한 길이의 전통에서 밀서를 꺼냈다.

“음…….”

당천기의 표정은 밀서를 읽어나갈수록 점점 심각해졌다.

“그의 전언입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당문휘의 낯빛이 굳었다.

“직접 읽어보아라.”

당문휘와 당건휘는 밀서를 건네받아 읽기 시작했고, 곧 경악하여 고함을 질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아버님! 아, 아니 가주님! 이자, 미친 거 아닙니까? 이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다니…!”

아직 밀서를 읽지 못한 세가의 수뇌부는 궁금한 얼굴이었고, 당천기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요구인 건 맞다. 하지만 무서운 건 그 계획이 매우 그럴듯하다는 점이야. 게다가 거기 적힌 게 사실이라면 나머지 둘에겐 이미 승낙을 받아냈어. 협검과 마교라니……. 허허, 협검이야 그렇다 쳐도 마교를 무슨 수로 끌어들인 것인가.”

당천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안목이 틀렸구나. 호랑이 따위가 아니었어. 이자는… 용이다.”

당문휘가 날카롭게 외쳤다.

“거절하십시오, 가주님! 이건 그냥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십 년 전만 해도 저자세로 요청했던 자가 감히 이런 요구를…!”

“우리가 그렇듯 그자도 우리의 처지를 간파한 거겠지. 그리고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그는 자신이 장담했던 일들을 모두 이루어냈어. 지금은 그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 이제 아쉬운 건 그가 아니라 우리야.”

“그래도 안 됩니다!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말지, 이건, 이건…!”

당문휘의 얼굴은 애처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문휘, 너도 알지 않느냐. 다른 방법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세간의 평판을 뒤집을 수 없다. 지난 삼십 년간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보지 않았더냐. 사파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도, 뿌리 깊게 박힌 인식은 바뀌지 않았지.”

“아버, 아니, 가주님! 절대 안 됩니다! 원래 약조한 내용만 이행해도 충분히…!”

당천기는 손을 들어 당건휘의 말을 막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 않느냐. 남은 하나의 역할은 본가에서 맡는 게 적격이야. 만약 우리가 거절하면 그는 또 다른 적임자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가가 기울인 모든 노력들이 퇴색되겠지. 허허, 선택의 여지를 준 것처럼 보이지만, 기가 막힌 외통수로구나.”

역시 세상일은 뜻대로 흐르지만은 않는가.

당가의 명운을 건 도박이었지만, 상황이 진행될수록 안전하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마지막에 이런 변수를 들고나오다니.

당천기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직은 지켜볼 일이다. 그가 말한 상황이 만들어지려면 뭐 하나 누락되는 일 없이 모든 게 맞아 들어야 해. 그리고 거기까지는 그가 모든 걸 준비하겠지. 만약 그리된다면…… 난 승낙할 것이다.”

당천기를 설득하기 위한 말들이 머리를 맴돌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당문휘와 당건휘가 눈을 꾹 감았다.

‘반대를 무릅쓰고 용독술을 도입한 건 전대 가주님과 나의 결정이었다. 세가가 미래를 확보할 힘을 얻었으니, 남은 건 잃어버린 명성과 우리의 자리를 되찾는 것뿐이야. 허허, 내가 벌인 일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겠지.’

세가를 위해 평생을 살아온 노인은 이미 각오를 끝낸 뒤였다.

* * *

“슬슬 나가볼까?”

마른 비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삼일? 사일?

배터지게 먹고, 늘어지게 자며 보낸 시간이다.

마른 비는 당가에서 더없이 편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좋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지루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당문휘는 하루에 한 번 와서 얼굴만 보고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돌아갔고, 마른 비와 여규는 숙소에서 뒹굴거려야만 했다.

당가 의원들의 세심한 치료와 경이적인 회복력 덕분에 상처도 거의 아물었으니, 마른 비는 오늘 중으로 당가를 나갈 생각이었다.

똑똑. 벌컥!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들어오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문을 밀치며 방으로 들어섰다.

열일곱? 열여덟?

진녹색 무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척 봐도 대단히 날렵해 보이는 여인은 별비를 보는 순간 움찔했지만, 곧 이를 악물고 마른 비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네가 ‘마란 비’냐?”

“아니, 마른 빈데.”

잠시 정적이 흘렀고, 얼굴이 벌게진 그녀는 뒤돌며 고개를 까딱였다.

“마란 비나 마른 비나. 아무튼 밖으로 나와. 한판 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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