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응? 싸우자고? 갑자기 왜? 당신 누군데?”
마른 비의 물음에 여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오라면 나올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설마 겁먹은 거냐?”
“이보시오. 다짜고짜 찾아와서 싸우자니 이게 무슨 경우요?”
여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여인과 마른 비 사이에 끼어들었다.
위아래로 여규를 훑어본 여인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여규라는 사람이지? 점창파 봉검대 소속이라는. 당신도 나와.”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방을 나섰다.
마른 비와 여규는 이게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서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보시오. 나오라길래 나오긴 했는데 이게 뭐 하는 거요?”
숙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공터.
움직이기 편하게 잘 닦인 곳이지만, 정식 연무장은 아니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여인은 수십 명의 당가 무인들과 함께 마른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젊은 청년들로 구성된 그들은 마른 비가 다가오자 눈을 빛냈다.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저 꼬맹이가 은비대주님과 동수를 이뤘다고? 기껏해야 나랑 비슷한 또래인데?”
여인은 둘을 부른 이유를 꺼냈고,
‘아, 그것 때문인가.’
여규는 곧바로 상황을 짐작했다.
“너, 솔직히 말해. 객잔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오해는 하지 마. 네가 운남의 소수부족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냐. 며칠을 살폈지만 너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질 않아. 너 같이 평범한 꼬마가 대주님과 비겼을 리가 없으니 묻는 말이야.”
“나 꼬마 아닌데?”
“하! 덩치만 크면 다 어른인 줄 알아? 너, 거시기에 털은 났냐?”
스물도 안 된 명문세가의 여인이 입에 담기엔 참으로 민망한 말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도 좋았다.
이런 류의 말을 들은 남자들은 얼굴이 벌게져서 버벅 대곤 했으니까.
“털? 난 풍성한 편이야. 설마 당신, 아직도 안 났어?”
하지만 마른 비가 몇 수는 위였다.
“나, 나는…!”
났다고 하기도 뭐하고, 안 났다고 하기도 뭐하다.
여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푸들대기만 했다.
그때,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풍채 좋은 사내가 머리를 흔들며 걸어 나왔다.
“하아……. 영령. 그만해라. 듣는 내가 다 민망하니까. 말장난하려고 이들을 부른 게 아니지 않나.”
‘음… 상당한데?’
마른 비와 여규의 눈이 동시에 이채를 띠었다.
굳건한 걸음걸이로 걸어온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은비대 소속의 당운석이다. 올해로 열여덟. 비슷한 연배니 말은 편하게 하마. 이 녀석은 당영령이고, 녹수대 소속이지. 보다시피 골 때리는 여자니까 기분이 나빴더라도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괜찮아. 시원시원하고 좋은걸, 뭐.”
자연기가 전해주는 느낌이 하나같이 좋다.
마른 비가 당가에 와서 마주친 이들은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당건휘라는 자에게선 약간의 비틀림이 느껴졌지만, 공유환이나 호국영, 청목 같은 놈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집단을 이끄는 수장의 성향이 그 휘하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걸까?’
당가와 점창을 비교하며, 마른 비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 봐주니 고맙군. 우리가 너를 청한 이유는 간단해. 은비대주님은 우리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자 가장 닮고 싶은 분이나 다름없다. 네가 그분과 막상막하로 겨루었다고 하니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더군.”
가슴이 들썩이도록 숨을 들이마신 당운석이 마른 비를 노려봤다.
“너와 싸워보고 싶다. 내 도전을 받아다오.”
“야! 내가 먼저야! 어딜 끼어들어!”
당영령이 당운석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령. 대주님의 손님과 싸우며 독을 쓸 셈이냐. 뒤로 빠져라. 네 장기는 비무에 적합하지 않아.”
“누가 독을 쓴대? 저런 꼬맹이는 비도술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마른 비는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며 빙긋 웃었다.
“문휘 아저씨에게 당가에 대해서 들었어. 너희 둘의 장기가 칼 던지기와 독이지? 둘 다 상대해줄 테니까 싸우지 말고 차례로 덤벼. 아, 물론 최선을 다해서.”
마른 비의 도발 아닌 도발에 당가 청년들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먼저 간다.”
당운석은 반론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당영령을 단호하게 밀쳤다.
그의 양손에서 은빛 비도 열두 개가 번쩍였다.
“최선을 다하라고 했으니 사양하지 않고 가마.”
스팟! 쐐애애액―!
연환십이참(連環十二斬).
손도끼라고 해도 무방한 비도 열두 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당운석은 당가의 젊은 층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고, 그의 경지는 조장인 당하준에 못지않았다.
십여 년의 세월을 따라잡는 재능.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른 비는 당하준을 손쉽게 눕힌 남자였다.
티티티티팅!
교룡갑, 그리고 범의 앙심.
마른 비는 떨어져 내리는 비도들을 손가락만으로 모조리 날려버렸다.
당가 청년들의 눈에 경악이 어리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당운석은 이를 악물었다.
“하아앗!”
휘아아악―
추혼만리신법(追魂萬里身法).
당가의 적들을 지옥 끝까지 따라가 죽인다는 비전의 경공이다.
또한 적들이 거리를 좁히는 걸 허용치 않고 원거리 요격을 가능케 하는 당가 전투술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것도 받아봐라!”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
날카롭게 갈아낸, 못을 닮은 암기들이 세차게 쏟아졌다.
당가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암기지만, 마른 비는 태연하기만 했다.
“이건 너무 가볍잖아.”
쾅!
진각이 터지고,
후아아악!
자연기가 오른 주먹에 집중된다.
허리춤부터 뻗어나간 정권은 간결하지만 강렬했다.
“바위 부수기라고 해.”
대기를 밀어버린 주먹은 암기들을 흩뜨리며 당운석에게 쇄도했다.
추혼만리신법으로 이동 중인 그를 정확히 겨냥한 일권이었다.
“커헉!”
무형의 주먹에 복부를 얻어맞은 당운석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쓰러졌다.
“궈, 권풍?!”
당가의 청년들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자리에 서서 당가의 기대주를 침몰시킨 자.
자신들과 같은 또래지만, 이건 도저히 비벼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자연기를 실체화하는 마른 비에게 무형의 권풍 정도는 가벼운 운동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에겐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지였다.
“분명히 네가 쓰라고 했어. 후회하지 마라.”
당영령의 눈빛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공의 경지?
승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인 건 맞다.
강자가 약자를 제압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니까.
그 불변의 진리를 뒤집기 위해 도입한 독술이다.
무공의 고하에 관계없이 인간은 독을 흡입하면 죽는다.
수백 년간 쌓아온 명성을 포기하면서 얻은 힘.
당영령이 가볍게 손을 뿌렸다.
스스스스―
내공으로 일으킨 바람이 독분을 밀어낸다.
뱀, 전갈, 두꺼비 등의 독물에서 뽑아낸 독부터 야생의 독초로부터 추출한 식물성 독에 이르기까지.
자연으로부터 얻어낸 십여 가지의 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마른 비를 휘감았다.
“으… 매워.”
죽여선 안 되기 때문에 독의 농도를 조절했지만,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정상이다.
하지만 마른 비는 고춧가루를 들이마신 사람처럼 콜록대기만 했다.
‘뭐야, 이놈? 독이 안 통해?’
당영령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없다.
선조들이 수십 년을 연구하여 얻어낸 독술이 통하지 않을 리 없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틱, 틱! 푸화아아악―!
뭘 어떻게 한 걸까.
당영령이 양손 엄지를 튕기자 마른 비의 머리 위에서 독구름이 생성됐다.
척 보기만 해도 치명적인 녹색의 구름이 내리깔리며 마른 비를 뒤덮었다.
“콜록, 콜록! 어우, 목 따가워.”
마른 비는 손을 휘휘 저으며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왔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당영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 질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지만, 그녀는 정신을 부여잡고 또 한번 하독했다.
스스스스―
바닥으로 내리깔린 검은 연기는 기존에 있던 성분들과 뒤엉키며 새로운 독을 생성했다.
즉석에서 배합하여 만들어내는 혼합독.
당영령의 독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뛰어난 지를 엿볼 수 있는 한 수였다.
“그만해.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그 한마디에 당영령의 이성이 끊어졌다.
그녀의 손이 품을 훑자, 작은 유리병 여러 개가 들려 나왔다.
“죽어!”
쨍강! 쨍강! 퍼엉! 화아악―!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 신선폐(神仙廢), 오보단장독(五步斷腸毒), 상린남영(祥鱗藍影)…….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나 쓰는 당가 독술의 결정체들이 줄줄이 터졌다.
“으, 으아악! 피해!”
“당영령! 정신 차려!”
“이런 미친…! 다 죽일 셈이냐!”
관전하던 당가의 청년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싸울 때 이성을 잃으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지잖아.”
콰앙!
천천히 움직이던 마른 비가 번갯불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그의 눈에 당영령의 모습이 확대됐다.
그녀의 얼굴엔 짙은 절망이 떠올라 있었다.
‘열심히 연구한 독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가? 괜히 미안해지는데.’
마른 비가 가볍게 수도를 내리쳤다.
독을 다루는 재능에 비해 무공이 떨어지는 당영령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마른 비는 풀썩 쓰러지는 그녀를 안고 독의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다.
휘휘휘휙―!
그때, 진녹색 무복의 무인들이 사방에서 솟아올랐다.
퍼어엉!
스스스스―
쨍강!
화아악!
흩날리는 독분의 문양을 왼쪽 가슴에 단 무인들.
조용히 싸움을 지켜보던 녹수대의 정예들이 당영령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가지 독에 맞는 해독제들이 뿌려지고, 공간을 잠식한 절독들이 중화되기 시작한다.
마른 비 근처에 멍하니 서 있다가 그대로 죽을 뻔한 여규는 녹수대 무인의 손에 이끌려 위험지대를 이탈할 수 있었다.
“후아…! 죽을 뻔했네! 저 여자, 뭐야 대체? 정신을 놓은 건가?”
멀리 떨어졌음에도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의 독기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한 줌 핏물로 녹아내렸을 터.
여규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바빴다.
‘진짜 위험하네. 이렇게 멀리 있는데도 독기의 지독함이 느껴져. 비아는 아예 독이 통하지 않는 신체가 된 건가? 독림에서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마, 만독불침(萬毒不侵)?”
여규도 놀랐지만, 당가의 무인들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공으론 상대할 수 없는 태산인데, 독까지 듣질 않는다니.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만독불침? 그럴 리가 있나.”
어느새 나타난 당건휘가 여독을 뚫고 마른 비에게 다가섰다.
양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그는 독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객잔에서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군. 당가의 적손이자 녹수대주인 당건휘다.”
객잔에서 사과하던 때와 달리 그는 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아직 감정의 잔흔이 남아 있었다.
“마른 비야. 그날 이후로 처음이네.”
틱, 틱, 따악- 딱!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당건휘의 양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른 비가 말했다.
“뭐야? 계속 독을 뿌리네? 싸우자는 거야?”
“아니. 가늠하는 것뿐이다. 독을 다루는 자에게 너는 호기심과 호승심을 불러일으키거든.”
“당신, 진짜 무례하구나. 뭘 하든 안 통해. 그러니까 그만하고….”
비틀-
“어?”
마른 비가 처음으로 휘청였다.
찰나였지만 당건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마른 비의 손짓 하나하나까지도 살피던 그의 눈이 번쩍였다.
“뭐지? 잠깐 어지러웠어. 서서 졸았나?”
금세 정상으로 돌아온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건휘는 미간을 좁힌 채 무언가를 궁리하는 표정이었다.
“영령의 폭주를 내가 대신 사과하지. 우리 녹수대에 없어서는 안 될 재능이지만, 실전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미숙해. 그녀의 실수를 너그러이 이해해주면 좋겠군.”
“걱정 마. 아저씨.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다행이군. 대원들에게 꼭 해독을 받도록 해. 네 몸에는 지금 온갖 종류의 독이 묻어 있을 테니까.”
당건휘는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태연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당건휘는 큰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형님에게 필적하는 무공에 독이 통하지 않는 신체. 저런 괴물이 고작 열여덟 살이란 말인가. 대체 운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봐라.”
“네, 대주님,”
당건휘는 뒤에서 솟아오른 무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당장 운남으로 떠나라. 본가의 모든 이목을 거사에 집중할 때지만, 이건 심상치 않아. 가서 저 꼬마와 그의 부족에 대해 알아 와라.”
“알겠습니다.”
당건휘는 멀어지는 무인의 기척을 느끼며 중얼댔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낸 건가. 일단 그걸로 위안 삼아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