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 *
“끄응…….”
“일어났어?”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당영령은 퍼뜩 깨어났다.
상체를 일으키자 조금 전까지 대치했던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엇! 너…!”
마른 비에게 소리를 지르려던 당영령이 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는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벌인 일을 깨달은 것이다.
“아, 안 돼……. 독무…! 독무에 휩쓸린 사람들이 얼마나 돼? 많이 죽었어?!”
당가 비전의 절독을 몇 개나 쏟아부었다.
주변엔 수십 명의 청년들이 있었고, 그들에겐 자신의 혼합독을 중화할 능력이 없었다.
슬쩍 닿기만 해도 녹아내릴 독무의 향연.
최악의 경우, 구경하던 식구들이 몰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걱정 마. 아무도 죽지 않았어.”
마른 비가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죽은 사람이 없다고? 그, 그럴 리가….”
“진짜야. 네가 쓰러지자마자 녹수대라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독기를 제거했어. 당건휘라는 사람도 직접 왔는걸. 그 사람이 독 쓰는 사람들의 수장이라며?”
“녹수대가? 대주님까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 사람들, 처음부터 우리가 싸우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 아마 내가 궁금했던 거겠지. 그러다가 상황이 위험해지니까 나타나더라고.”
마른 비가 도무지 정이 안 가는 당건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 근본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느낌이 별로야. 뭐라 설명하기 힘든 찜찜함이….’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당영령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바람에 마른 비는 당건휘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단순한 비무였는데 그런 극독을….”
“괜찮아. 아무도 안 죽었으면 된 거야. 너 제대로 싸운 거 처음이지? 앞으로는 전투 중에 이성을 잃으면 안 돼. 특히 상대의 도발에 휘말리면 큰일 나.”
마른 비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당영령은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욕을 하고 두들겨 패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마른 비라는 사내는 비난 한마디 하지 않았다.
무공과 성품, 그릇의 크기까지.
당영령은 어린 줄만 알았던 그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완패를 인정한다.”
등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당운석은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았는지 배를 움켜쥔 채였다.
“후우… 네 살에 처음 나무로 깎아 만든 비수를 쥔 순간부터, 한시도 단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네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 그런데 이런 격차라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냐?”
당운석은 정말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마른 비는 있는 그대로 말해줬다.
“야생에서 혼자 살아남으면 돼. 그러다가 이백 명한테 쫓겨도 보고, 전장 한복판에 난입도 하고. 아, 맹수들이랑 단련도 했다!”
“…….”
맹수들과 단련?
그래,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짐승과의 단련은 상상해본 적도 없지만, 저 뒤에 퍼질러져 있는 백호와 말이 통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나머지는 말이 안 된다.
이백 명한테 쫓겨? 전장에 난입한다고?
이제 열여덟 살인데 그보다도 어린 나이에?
당운석은 마른 비가 수련 방법을 숨기는 거라고 여겼다.
하긴 만나자마자 비수를 뿌린 사람에게 기밀이나 다름없는 수련법을 알려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결례를 저질렀군. 비밀에 부쳐야 할 수련법을 묻다니. 그냥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고 해도 된다. 서운하지 않아.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응? 숨기긴 뭘 숨겨? 진짜야. 난 그렇게 힘을 키웠어.”
“음… 그래, 그렇겠지. 내가 잘못했다.”
마른 비는 당운석의 반응이 답답했지만, 굳이 말을 늘이진 않았다.
“우리 멋대로 싸움을 걸었지만, 사실 너를 부른 건 은비대주님의 부탁 때문이었어.”
겨우 진정이 됐는지 당영령이 조곤조곤 말했다.
“부탁? 아저씨가 뭐라고 했는데?”
“대주님은 지금 큰일이 생기셔서 시간을 낼 수가 없대. 미안하다고 전하고, 우리에게 너희를 안내해 주라고 하셨어.”
“안내라니? 어딜?”
울음을 그친 당영령이 방긋 웃었다.
“명승지. 너희, 사천이 처음이라며? 성도 주변엔 볼 곳이 많아. 우리가 구경시켜 줄게.”
성도 남쪽에 있는 무후사(武侯祠)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었다.
마른 비는 사당을 처음 봤지만, 부족의 영묘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닫고는 새삼스런 눈길로 구석구석을 살폈다.
여규는 마른 비에게 제갈량에 대해서 침을 튀기며 설명했는데, 촉한의 승상이자 역사에 이름을 새긴 위대한 지략가를 소개하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도가 사상은 말이지….”
도가의 사원인 청양궁(靑羊宮)은 노자(老子)의 출생지다.
대리의 숭성사삼탑을 볼 때까지 불교를 몰랐던 마른 비가 노자를 알 리 없었다.
여규는 자신이 아는 걸 전부 토해냈고, 마른 비는 게걸스럽게 지식을 흡수했다.
“허, 참. 보면 볼수록 희한한 조합이네.”
당영령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혀를 찼다.
당운석과 당영령은 말 그대로 안내만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여규가 워낙 아는 것도 많고 설명도 잘해서 그들이 나설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점창의 이대 제자와 운남 원시 부족의 청년.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둘은 모든 면에서 죽이 척척 맞는 단짝이었다.
“영령아. 저 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지 않냐. 민족과 문화, 소속을 뛰어넘어 저토록 가까워질 수 있다니. 부러운 관계군.”
당운석이 질문을 퍼붓는 마른 비와 성심성의껏 대꾸하는 여규를 번갈아 봤다.
“그러게. 정말 희한한 조합이야. 저 둘은 성향도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친해진 걸까?”
당영령의 눈은 깔깔대며 웃는 마른 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당운석이 그녀를 힐끗 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뭐냐. 저 녀석한테 반한 거냐?”
“뭐,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미쳤어, 너?”
당영령은 헛소리하지 말라고 외쳤지만, 그녀의 얼굴은 빨개져 있었다.
“너 같은 말괄량이가 남자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다니. 다른 애들이 알면 기절을 하겠군.”
“아니거든?! 반하긴 뭘 반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몰래 빼돌린 술을 마신 날이었지, 아마? 석 잔 마시고 얼굴이 벌게져서는 ‘인연은 어느 날 갑자기 운명처럼 찾아오는 거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게 누구였더라?”
“야! 그, 그건 그냥…!”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진 녀석이다. 중원을 다 뒤져도 우리 나이에 저만큼 강한 녀석은 드물 거야. 그릇도 크고, 성격도 티 없이 맑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도 저런 녀석을 찾기는 힘들 거다.”
“흠, 흠. 그치? 괜찮은 녀석 같아. 뭐랄까……. 처음엔 그냥 철없이 맑기만 한 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냐.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어보면 뭔가 엄청난 일들을 겪은 거 같은데, 타고난 천성을 잃지 않았어. 쉽지 않잖아. 그런 건.”
당영령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른 비를 보고 있었다.
그녀를 곁눈질한 당운석이 피식 웃었다.
“이미 갔네, 갔어.”
“아, 씨! 가긴, 뭘 가! 아니라고! 그냥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한 거야!”
“흠. 녹수대 역대 최고의 기재가 이족 청년에게 반해버린 건가. 극독을 있는 대로 집어 던지다가 두들겨 맞고 기절한 후에 말이지. 네 말처럼 운명 같은 상황이긴 하다.”
“이 새끼가 진짜!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당영령의 눈은 마른 비를 쉴 새 없이 훔쳐보고 있었다.
일이 벌어진 건 도강언(都江堰)에서였다.
사천성 서북의 민강(岷江)과 타강(陀江)의 줄기가 갈라지는 곳에 있는 고대의 수리시설.
도강언이 사천성에 끼친 이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농작물의 생장을 촉진시켜 풍부한 생산량을 확보하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1600여 년 전에 이 대수리시설을 건설한 촉군(蜀郡)의 태수 이빙(李泳)과 그의 아들 이랑(二郞)은 사천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와아~ 진짜 엄청나다!”
마른 비는 목청껏 소리 지르며 감탄했다.
성도의 성벽이나 번화가도 엄청났지만, 이 수리시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인간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자연을 이용한 결과물.
지금껏 본 문명의 역작들 중 가장 놀라운 작품이었다.
“어때? 대단하지?”
당영령이 마른 비의 옆에 서며 말을 건넸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당운석의 언급 때문일까?
이상하게 전과 같지 않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대다 못해 터질 듯이 날뛰는 건 그녀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운석이 요 예쁜 자식. 밥 한 번 사줘야겠어.’
당운석은 도강언에 가까워지자 간식거리를 사온다며 슬그머니 발을 뺐다.
도강언의 풍광에 넋을 놓고 있던 여규를 억지로 끌고서.
“응! 정말 대단해! 이빙이라고 했나?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걸 만들었다며? 그 사람은 사천의 숙수들보다도 위대해! 존경하기로 했어!”
어째 비유가 영 이상하지만, 아무튼 마른 비는 도강언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당영령도 오늘부터 이빙을 존경하기로 했다.
“큭큭. 맙소사. 이빙과 숙수를 비교한단 말인가. 살다 살다 별 참신한 헛소릴 다 듣는군.”
작심하고 이죽거리는 말투였다.
고개를 돌린 곳엔 테두리를 금색으로 칠한 섭선을 든 남자가 웃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군요, 당 소저. 그간 잘 지내셨소이까?”
스물 초반?
객관적으로 매우 잘생겼다고 할 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영령은 사내를 보는 순간 속이 느글거렸다.
‘운가의 운이령! 이놈이 왜 여기에?’
“그러게요, 운 공자. 오랜만이네요.”
유쾌하지 못한 기억.
당영령은 억지로 웃었다.
“작년에 있었던 사천 후기지수들의 회합 이후 처음이군요. 항상 붙어 다니던 당운석은 어디에 떼어놓고, 웬 야만인과 산책을 즐기시는 겁니까? 그놈이 제 어깨에 꽂은 비수 때문에 한참을 고생했지요. 다시 보면 꼭 갚아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자신감일까, 아니면 허세일까.
무인으로서 창피한 기억을 운이령은 대놓고 언급했다.
당가의 명성이 추락한 이후, 천북제일무가(川北第一武家)인 사천 운가(四川雲家)는 대놓고 사천제일세가 자리를 노려왔다.
최대한 외부에서 사건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당가의 무인들과 달리 운가는 당가를 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고, 결국 폭발한 당운석이 운이령과 격돌했던 것이다.
양가는 한창 때의 아이들 다툼으로 선을 긋고 개입하지 않았지만, 어느 쪽도 그 일을 잊었을 리 없다.
분위기로 보아 운이령은 패배한 이후 절치부심하며 힘을 키운 모양이었다.
“헛소리 운운하는 막말부터 시작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은 여전하시네요. 공자는 죽었다 깨도 운석이를 이기지 못해요. 그리고 야만인이라뇨? 그런 말이 실례라는 생각은 못 하세요?”
당영령은 차분하게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그녀가 세가 사이의 긴장 관계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당운석에 대한 언급은 물론이고 마른 비가 무시를 당하자 당영령은 날카로워졌다.
“어이쿠. 여성분과는 싸우기 싫습니다. 가벼운 농이었을 뿐인데 뾰족하게 반응하시니 난처하군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 능글맞은 반응.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무엇보다 지금 사과할 대상은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당영령은 마른 비가 기분이 상하진 않았는지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운이령이 뭐라고 떠들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 뒤에 있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당영령의 시선도 마른 비를 따라갔다.
그리고 보았다.
도가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색의 무복과, 불가를 상징하는 옅은 주황색의 승복을.
사천을 대표하는 구파일방의 이파(二派).
청성(靑城)과 아미(峨嵋)의 인물들이 마른 비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