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청성파의 영송! 그리고… 아미파의 월연?!’
언제 다가왔단 말인가.
밉살스런 놈에게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다.
유구한 세월 동안 도가와 불가의 맥을 이으며, 독자적인 검술로 천하 구파의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청성파와 아미파.
두 거파를 대표하는 젊은 재능들이 마른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 일 년 만에 뵙네요.”
당영령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그렇군요, 소저.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청성파의 영송이 대꾸하며 월연과 함께 목례했다.
하지만 둘의 눈은 마른 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아를 알아봤구나!’
마른 비가 당가 내부의 숙소에서 머물 때, 당영령과 당운석은 그를 내내 주시했다.
하지만 그의 비범함을 눈치챌 수 없었다.
반면 영송과 월연은 대번에 마른 비의 걸출함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둘은 이채로운 눈길로 마른 비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있었다.
“이봐. 어딜 보는 건가?”
운이령이 눈썹을 찌푸리며 마른 비에게 말했다.
이쪽을 보지만, 자신을 보지 않는다.
바보가 아닌 이상 뒤에 있는 영송과 월연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건 운이령에게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음. 세상은 정말 넓네. 산이 형이나 걸음이 형에 비견할 만한 사람들을 이런 데서 만나다니. 중원에는 원래 이렇게 강한 사람들이 흔한 거야?”
‘그럴 리가. 얘네 구파일방 최고의 기재들이야.’
당영령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리고 여태껏 조용히 있던 월연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운 공자의 초청으로 일 년 만에 나들이를 나왔다가 엄청난 분을 뵙는군요.”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쯤 되었을까?
마른 비보다는 확실히 어리다.
월연은 머리를 밀지 않았는데, 그건 아직 그녀가 정식으로 승적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아미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로 불린다는 것.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녀의 뛰어남을 방증하는 일이기도 했다.
‘저 월연이 이런 극찬을…!’
당영령은 진심으로 놀랐다.
남자 승려들도 더러 존재하지만, 아미파는 기본적으로 출가한 여승들로 이루어진 문파다.
그리고 ‘아미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라는 건 명확한 사실을 내포한다.
차기 검후(劍后).
그녀는 중원 전체가 주시하는 검술의 천재였다.
또한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칠룡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런 월연의 극찬.
직접 붙어봐서 강한 건 알았지만, 당영령은 새삼스런 눈길로 마른 비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내는 울화가 폭발했다.
“이 야만인 놈이! 어딜 보냐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미파의 문규상 외출이 제한되는 월연을 고생고생해서 초청했다.
그건 청성파의 영송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한 명도 마찬가지였다.
운가의 힘을 총동원한 작업이었고, 미래의 인맥을 쌓기 위한 자리였지만, 사실 운이령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따위 야만인이 월 소저의 관심을 끌다니!’
저 신비한 눈빛과 하늘이 내린 듯한 미모를 보라.
차분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황홀할 지경이었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지만, 그녀는 아직 승적에 이름을 올리기 전이었고, 운이령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모든 걸 걸고 이 자리에 나왔다.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강언을 만남의 장소로 잡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내 말에는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으면서 이런 놈에게…!’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에게 월연의 칭찬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들었기 때문에 더욱 열이 받는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더 못나 보인다는 걸 알만한 남자였다면 애초에 월연이 그런 대우를 하지도 않았을 터.
하자가 있는 당사자만 자신의 흠을 모른다는 게 항상 문제의 핵심이었다.
“아, 미안. 뒤의 두 사람을 보고 놀라서. 절대 당신을 무시하려던 건 아니야.”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런 자들은 십 할에 가까운 확률로 ‘적당히’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사과도 받았겠다, 좋게 마무리하면 될 것을 그는 굳이 악수를 뒀다.
“그게 무시한 게 아니면 뭐란 말이냐! 네깟 놈이 감히 운가의 적손을 능멸하는가!”
차앙!
결국, 검을 뽑고 만다.
겁을 줄 겸 홧김에 뽑았지만, 운이령은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어? 뭐야? 운이령? 네놈이 왜 여기 있어?”
갓 구운 양고기 꼬치를 양손에 든 당운석이었다.
뒤에 있는 여규도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있었다.
칼을 뽑은 운이령과 그가 칼을 겨눈 상대.
당운석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그 칼 내려놔라. 그는 당가의 손님이야. 그리고 분명히 경고하는데, 그거 휘둘렀다가는 너 죽을지도 몰라. 상대를 좀 보고 덤벼라. 이 멍청한 새끼야.”
개인적인 감정이 넉넉하게 가미된, 진심 어린 당부였다.
그리고 운이령을 말린 건 당운석만이 아니었다.
“운 공자. 이게 무슨 행동인가요? 검을 내려놓으세요. 예의도 아닐뿐더러 그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
질투심에 눈이 먼, 피 끓는 스물 초반의 청년.
폭발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놈이 그리 대단하단 말이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질 않거늘! 난 믿지 못하겠소!”
운이령은 검을 수평으로 확 그으며 자세를 잡았다.
“야만인 놈! 결투를 신청한다! 네가 그리 대단하다면, 운가의 검 앞에서 스스로를 증명해 봐라!”
“운 공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그만두세요!”
영송도 낯빛을 굳히며 그를 말렸다.
“하아…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는데, 쟤는 왜 가는 곳마다 싸움에 휘말리는 거지?”
여규는 가볍게 한숨을 쉴 뿐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아무런 걱정이 담기지 않은 어조로 마른 비에게 말했다.
“비아야, 알지? 죽이지는 마. 살살해, 살살.”
“이, 이 새끼들이이이!”
여규가 운이령의 태도가 꼴 보기 싫어서 일부러 그의 화를 돋웠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동네는 왜 이렇게 다짜고짜 무기를 뽑아 드는 거야?”
마른 비는 눈살을 찌푸렸고,
“백호참마… 억!”
거창한 초식 이름을 내뱉던 운이령은 복부를 걷어차이고 기절했다.
“백호, 뭐? 그게 기술 이름이야? 하고 많은 것 중에 왜 하필?”
“…….”
마른 비가 투덜거리고, 정적이 흘렀다.
당연한 결과를 확인한 여규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간식 먹자. 비아야.”
그다음으로 움직인 건 당운석과 당영령이었다.
“작년에 이놈 눕히느라 꽤 고생했는데, 비아가 세긴 진짜 세네.”
“나는 보이지도 않았어.”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은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운 공자를 저렇게 쉽게…!’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자가!’
월연과 영송은 경악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당신들, 같이 먹을래?”
마른 비가 히죽 웃으며 월연과 영송에게 말을 건넸다.
“야, 비아야. 네가 산 거 아니잖아. 당 형이 샀으니까 허락을 구하고 합석을 물어봐야지.”
“아, 당연히 괜찮소. 두 분과 우린 구면이기도 하고.”
간식거리를 사러 간 사이 말을 텄는지, 여규는 당운석과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점창?! 점창파의 제자가 왜 이들과?’
마른 비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겼던 월연과 영송은 그제야 여규를 보고 또 한번 혼란에 빠졌다.
“그렇다네? 이리 와, 같이 먹자. 당신들, 전해지는 느낌이 진짜 좋아.”
서로를 돌아본 월연과 영송은 마른 비의 묘한 친화력에 이끌려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또 한 명의 청년이 쾌활하게 등장했다.
“미안하오! 일이 늘어나는 바람에…! 어? 넷이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나?”
가슴에 만(萬)자가 새겨진 화려한 의복의 청년이 일행에 합류했다.
두 개의 강줄기가 갈라지는 지점에 형성된 사구(沙丘).
유속이 느려지는 곳에 강물이 실어 나른 모래들이 퇴적된 지형이다.
시야가 닿는 지평선 끝까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강변에 드리운 버드나무의 조화는 모두의 탄성을 자아냈다.
“키야~ 최고다! 둘은 왜 안 먹어? 맛이 없어?”
마른 비가 양고기 꼬치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아미는 불가의 문파라서 육식을 금한다오. 본파는 그렇게까진 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대부분 육식을 꺼리는 분위기라.”
스물 초반의 영송은 검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순한 얼굴이었다.
“흐익? 고기를 안 먹는다고? 그럼 뭘 먹어? 풀?”
“그렇소. 화식과 육류를 끊고 채식을 하면 피가 맑아지고 탁한 기운이 쌓이는 걸 막을 수 있지. 익숙해지면 괜찮다오. 한번 도전해 보시겠소?”
“아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난 그냥 고기 먹다 죽을래.”
마른 비는 영송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우걱, 우걱-
조용하고 차분한 월연, 영송과 달리 모두의 눈길을 끄는 자가 하나 있었다.
사구로 이동하기 직전에 합류한 자.
통통한 체형의 청년이 마른 비 못지않은 식성을 자랑하며 말했다.
“음음. 아주 좋군. 본당의 전담 숙수들이 만드는 품격 있는 요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싸구려 음식이지만, 길거리 음식만의 저렴한 맛이 있어. 풍경도 기가 막히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군.”
“……재수 없는 말을 태연히도 하네.”
여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실소했고, 마른 비는 킥킥댔다.
그의 넉살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리 소개하자. 서로 이름은 알아야지. 얘는 점창파의 여규. 이쪽은 당가의 당운석과 당영령. 저쪽은 청성파의 영송. 그리고 아마파의 월연.”
“아마 말고 아미.”
마른 비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아마파라고 했을 때 월연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여규가 재빨리 틀린 걸 수정해주었다.
“여기 기절해 있는 사람은… 운가의 운아령이랬나?”
“운이령.”
여규가 또 정정해주었고, 마른 비는 머리를 긁적였다.
월연과 영송, 그리고 음식을 먹는 청년은 마른 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난… 운남에서 온 마른 비야.”
월연과 영송은 마른 비가 너무도 궁금했다.
그래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게 끝이었다.
출신이 어디고, 스승이 누구냐.
장기는 무엇이며, 대체 어떤 수련을 거친 거냐.
점창, 당가와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구파일방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자신들을 경악시킨 한 수.
단언컨대 월연과 영송은 지금껏 누군가가 이토록 궁금한 적이 없었다.
“소협은….”
월연이 참지 못하고 궁금한 걸 물으려고 입을 뗐을 때, 음식을 내려놓은 청년이 입을 닦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와족. 당신, 운남 청죽림의 와족 출신 아니오?”
모두의 고개가 청년에게 홱 돌아갔다.
“응. 맞아. 당신은 만금당 소속이지?”
“마, 만금당?!”
여규와 당가의 청년들이 눈을 부릅뜨며 그를 돌아봤다.
“맞소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른 비가 씩 웃었다.
“금복인 할아버지와는 무슨 관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