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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75화 (175/463)

175화

“내게 숙부가 되시는 분이오.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도 되겠소?”

“전해지는 느낌이 비슷해. 가슴에 있는 만이라는 글자와 화려한 의복. 우리 부족을 안다는 점. 그리고….”

마른 비가 청년의 우측 뒤편에 있는 땅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숨어서 호위한다는 점도 같네.”

청년은 진심으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대단해! 정말 대단하군! 구파일방의 장로분들 중에서도 알아챈 자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청년이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이리된 거 인사라도 나누세요.”

스르륵―

땅거죽을 헤치며 검은 옷의 사내가 솟아올랐다.

사람 한 명이 땅을 뚫고 나왔는데도 흙먼지가 튀지도, 소음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검은 수리 전사의 두더지 굴을 상회하는 지둔술이었다.

꾸벅.

마흔 후반? 아니면 오십 초반?

만금당의 적손을 호위하는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목례했다.

그는 미미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마른 비의 눈을 탐색하듯 응시했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많이 힘들 텐데 아저씨도 밥 좀 먹고 가.”

사내는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듯 청년을 바라봤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유령처럼 땅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허…!”

마른 비를 제외한 청년들은 사내가 사라진 후에야 멈췄던 숨을 토했다.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자.

저런 자가 목숨을 노린다면 그날로 목을 내놓아야 한다.

은신을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한 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제대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너 저자… 아니, 저분을 어떻게 알아챈 거야?”

여규가 하얘진 얼굴로 마른 비에게 물었다.

잠깐 본 게 전부고, 유일하게 드러난 건 눈뿐이었지만,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전해지는 느낌으론 전직 암살자가 아닌가 싶다.

아니, 확실하다.

알려줄 리가 없지만 들으면 기겁을 할 만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물의 별호가 튀어나오리라.

“솔직히 말하면 확신은 없었어. 주변 기운과는 다른, 이질감을 느낀 게 전부야. 거리가 가깝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느끼지 못했을 거고.”

마른 비가 여규의 물음에 대꾸했다.

그리고 청년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이름 정도는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어?”

“아차! 아직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려!”

청년은 깜빡했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과장되지만, 꽤 우스운 동작이어서 모두의 긴장이 풀렸다.

“내 이름은 금귀진이오. 그대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던 건 숙부께 와족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고. 숙부께서 과거에 회효라는 분과 인연을 맺었고, 얼마 전 청죽림에 방문하셨다는 걸 알고 있소. 당신이 사천 지부에 들를 때, 숙부께서 복귀하기 전이라면 당신을 신경 써달라는 서신을 받았지.”

기억을 더듬는 듯 금귀진은 눈살을 좁혔다.

“한데 분명 건우라는 이름이었는데? 마른 비라는 건 당신 부족 고유의 이름인가 보군. 사실 나도 확신은 없었소. 정황상 당신이 아닐까 추측했을 뿐. 이렇게 만날 줄 몰랐는데 재밌는 인연이로군.”

“그러게. 난 당신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어. 약속 날짜를 정했는데도 못 올 수 있다는 걸 보면, 할아버지가 영묘의 벽화에 푹 빠져 있나 보네.”

마른 비의 다음 행선지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다른 청년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럴지도. 숙부께 받은 서신 내용의 절반은 당신에 대한 칭찬이었소. 정말 놀라웠지.”

금귀진은 잠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숙부께선 기인이라는 평이 아깝지 않을 만큼 특이한 분이오. 아, 만나봤으니 아시겠군. 그분은 모든 이에게 쉽게 다가가지만, 마음을 주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지. 그런 분이 당신이 마음에 든다며 극찬하시더군. 서신을 읽는 내내 숙부가 쓴 게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오.”

“그랬어? 날 좋게 봤다니 고마운걸. 나도 할아버지가 좋아. 할아버지가 하는 일도 대단해 보이고.”

마른 비의 말에 금귀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백하듯 천천히 말했다.

“나도 숙부께서 하시는 일과 그분의 신념을 존중하오. 허나 그 때문에 본당의 식구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이 탕진되는 것도 사실이지. 그래서 난 당신과 달리 그분의 일을 좋아하진 않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당주께 숙부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여러 번 간언 드리기도 했지.”

금귀진.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만금당의 차기 당주로 거론되는 남자다.

위에 비상한 재능을 지닌 형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막내이자 늦둥이인 그가 유력한 차기 당주로 꼽히고 있었다.

그만큼 돈을 벌어들이고 관리하는 그의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가벼운 언행을 늘어놓던 처음과 달리,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자 그에게선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묵직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버님은, 아니, 당주께선 숙부를 지원하는 걸 중단치 않으셨지. 숙부께서 하시는 일에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철없는 동생의 꿈을 지켜주고 싶은 것인지 난 아직도 모르겠소. 이왕 이렇게 된 거 역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기시길 바랄 뿐.”

무의 언저리에도 발 들여 놓은 적이 없는 남자다.

하지만 금귀진에게는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일행을 압도했다.

마른 비조차도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아시겠소?”

금귀진은 물었고,

“응. 알 것 같아.”

마른 비는 대꾸했다.

“그렇군. 다행이오. 숙부께서 일을 도와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하셨다고 들었소. 그건 무척이나 중대한 작업이오. 외부로 새어나가면 중원이 요동칠 만큼. 그래서 난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소. 자칫하면 그 일의 여파가 본당까지 흔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확인한 소감이 어때?”

마른 비의 물음에 금귀진은 빙그레 웃었다.

“과연 사람을 보는 숙부님의 안목은 훌륭하오. 그 재능과 연륜을 본당을 위해 사용하시면 좋으련만. 방금 만났지만, 난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영 형과 월 소저만큼이나 당신을 믿소. 그리고 당신이 믿는 이들도. 내가 주저치 않고 이야기를 꺼낸 이유요.”

‘아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마른 비와 달리 여규는 금귀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중원인이라면 누구나 만금당의 금력을 알고, 거기서 비롯되는 그들의 힘을 안다.

지금 꺼낸 이야기가 퍼져나갈 경우 어떤 후속조치가 뒤따를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상대.

자신들을 믿는다는 말도 사실이겠지만, 금귀진이 안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만금당이 보유한 힘 때문이었다.

“음. 근데 당신, 저 사람도 믿어?”

마른 비가 한편에 누워 있는 운이령을 가리켰다.

진지하게 무게를 잡고 있던 금귀진은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우스워서 마른 비는 웃었다.

“큭큭. 당신 진짜 재밌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직 안 깨어났으니까. ……어? 일어났네?”

꿈결에 자신을 언급한 걸 듣기라도 한 걸까.

운이령이 움찔거리며 의식을 차렸다.

“커허어… 헉!”

막 일어나려다가 배를 감싸 쥐고 나뒹구는 그를 보며 웃음이 터졌다.

황급히 일어나서 주위를 살핀 그는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고, 곧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었다.

“그, 금 형! 언제 오신 겁니까? 이, 이건 그러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깜빡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오늘은 바빠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일행도 늘었겠다, 좋은 시간 되시기를. 그, 그럼 전 이만….”

운이령은 일어서다가 배를 얻어맞은 통증 때문에 또 한번 엎어지며 땅바닥을 굴렀다.

멋을 부리기 위해 들고 다니던 섭선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그는 도망치듯 일행에서 멀어졌다.

“휴…. 운 형에겐 미안하지만, 그는 믿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제외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들어도 별 소용없겠지만, 입이 가벼운 남자라 두고두고 신경 쓰일 뻔했군.”

금귀진은 작은 점이 되어버린 운이령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신들이랑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모이게 된 거야?”

마른 비가 월연과 영송, 금귀진을 보며 물었다.

“운가에서 집요하게 요청했지요. 앞으로 사천 무림을 이끌 후기지수들의 단합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청성에도 같은 내용의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월연과 영송은 생각만 해도 피곤한지 한숨을 쉬었다.

“우리와는 이익 관계로 얽혀 있는 터라. 운가의 자금줄인 천북표국이 만금당과 일을 같이한다오. 하도 서신을 보내길래 지나는 길에 잠시 들르겠다고 했었지.”

운이령을 떠올리면 피곤해지는 건 금귀진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당영령과 당운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보기에 개인적인 사심으로 가득 찬 자리였으나, 이런 기회를 통해 서로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도 사실이오. 그리고 운 형은 귀하들을 초대하지 않았지. 당가와 운가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솔직히 물읍시다. 당가는 어쩔 생각인 거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이다.

편히 마음을 놓고 있던 당영령과 당운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을 차린 건 당운석이 빨랐다.

“글쎄요. 본가는 언제나 그랬듯 제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저희는 항상 정파로서의 본분을 다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뿐이죠. 운가와 사소한 시비는 늘 있어왔고,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저희가 먼저 어쩌지는 않을 겁니다.”

“원론적인 답변이로군.”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걸 보건대 금귀진은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약관도 되지 않은 일개 대원들과 거시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흠흠. 가만히 생각하니 이런 면면들이 모이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깨달았소. 사천을 대표하는 청성, 아미, 당가에 이어 운남의 점창까지! 무림 문파는 아니지만, 본가도 상계에선 제법 먹어주는 편이니 한자리 묻어가겠소이다!”

거기까지 말한 후, 금귀진은 마른 비를 돌아봤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마른 비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난생처음 중원에 진입한 와족의 기대주가 언젠가 사고 한번 제대로 칠 것 같소! 그 유쾌한 날을 위해 술잔을 부딪칩시다!”

모두의 흥이 오르려는 찰나.

“어? 나 술 마실 줄 모르는데?”

아직 술맛을 모르는 와족의 애송이가 분위기를 깼다.

“여기서 바로 만금당으로 간다고?”

“응. 그게 나을 것 같아. 상처도 나았고, 문휘 아저씨도 바쁘잖아. 귀진이 형이 사천 지부 근처까지 데려다준 댔어.”

도강언을 나오며 마른 비는 작별을 고했고, 당영령의 얼굴에선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그리고 월연도 뭔가 주저주저하며 마른 비를 힐끗거렸다.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아쉬움을 드러내는 당영령에 반해 월연은 영송의 옆에 서서 꾸물대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 언젠가 또 볼 거야. 송이 형이랑 연이도.”

마른 비는 잠깐 합석한 것만으로 구파일방의 인물들과 말을 터버렸다.

예의와 격식을 중요시하는 그들에겐 동네 형 동생처럼 대하는 말투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조금 듣다 보니 의외로 정감이 있고 좋았다.

“잘 가라, 비아야. 언제고 청성산에도 꼭 들르려무나.”

영송도 어느새 동화되어 말을 놓고 있었다.

그를 아는 이들이 보면 놀랄 만한 일이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요?”

진짜 놀라자빠질 만한 일은 월연의 반응이었다.

무수한 남자들이 접근했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그녀가 마른 비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한 것이다.

모두의 눈이 커지고, 말을 건넨 월연도 흠칫했다.

자신이 한 말을 뒤늦게 인식한 듯했다.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보면 되지.”

마른 비의 말에 월연은 작게 웃었다.

모두와 인사한 마른 비는 금귀진을 따라 도강언을 벗어났다.

옆에서 걷던 여규가 마른 비를 올려다보며 짓궂게 웃었다.

“이야~ 인기 많다, 너?”

“응? 뭐가?”

여규가 몸만 쑥쑥 자란 친구에게 남녀 간에 오가는 오묘하고도 심오한 감정에 대해 강의를 해주려고 할 때였다.

마른 비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그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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