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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76화 (176/463)

176화

“뭐야? 왜 그래, 비아야?”

여규도 마른 비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고, 그건 기감을 끌어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뭔가….”

마른 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찾기 위해 마른 비의 눈길을 따라간 여규는 기겁했다.

‘강 건너? 저기 있는 무언가를 느꼈단 말이야?’

강폭이 넓은 구간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론 도저히 탐지할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다.

여규는 마른 비의 감각이 엄청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비아야, 뭔가 문제가 있는 거냐?”

앞서 걷던 금귀진도 뒤를 돌아봤다.

마른 비는 말없이 한참 동안 강 건너를 노려보다가 눈에서 힘을 풀었다.

“잘못 느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스치듯 감각을 건드린 암기(暗氣).

하지만 그건 고개를 돌린 순간 사라져 버렸다.

가지를 드리운 버드나무 숲의 정경은 평화롭기만 했다.

“어떻습니까?”

금귀진이 강 건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땅속에 있는 호위가 전음을 보냈는지 금귀진은 혼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 아니, 나를 지켜주는 분께선 딱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시는군. 비아, 네가 술을 마시는 바람에 감각이 흐트러진 게 아닐까?”

마른 비를 높이 평가하지만, 금귀진은 자신을 호위하는 무인의 감각을 더 믿는 듯했다.

더군다나 마른 비는 방금 전까지 술을 마셨다.

처음엔 쓰다고 질색을 했지만, 한 잔 두 잔 들어갈수록 기분이 좋다며 난생처음 마시는 술을 꿀꺽꿀꺽 잘도 받아 마셨었다.

금귀진으로서는 마른 비가 취했다고 여길 만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자연기를 운용하여 술기운을 날려버렸다는 걸 금귀진이 알 리가 없었다.

『어때? 별비야?』

〔네 감각이 맞다. 나도 무언가를 느꼈어. 몸을 숨길 위치를 잘못 잡았군. 내가 저쪽에 있었다면 당장 잡아냈을 텐데.〕

금귀진이 자신의 호위무사에게 물었듯 마른 비도 기척을 죽인 채 숨어 있는 별비에게 물었다.

별비는 그의 감각이 맞았음을 확인해 주었지만, 반대편 강변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에 직접 ‘무언가’를 잡아낼 수는 없었다.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뭔가가 있었던 건 분명해. 하지만 사라져 버려서 찾을 수가 없네. 또 우리 주위를 맴돈다면 그때는 잡아낼 수 있을 거야. 일단은 계속 가자.”

마른 비는 금귀진을 호위하는 자의 의견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건 곧 자신의 감각이 그를 능가한다는 말이나 다름없기에 매우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언가가 있었다는 건 확실하니까.

금귀진은 자신의 호위무사가 무시당했다고 여긴 건지 살짝 얼굴을 굳혔지만, 굳이 불편한 충돌을 감수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도 마른 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일…? 분명히 일이라고 했어. 일로 시작하는 유명한 암살자의 별호가….’

여규는 둘의 뒤를 따르며 금귀진이 뱉다 만 호칭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길로 쭉 가면 된다.”

도강언을 나와 성도의 시내로 들어선 마른 비 일행은 대로 한복판에 섰다.

무언가를 잔뜩 실은 짐마차들이 줄줄이 서 있는 곳으로 이동하며, 금귀진은 손가락으로 동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는 만금당의 일을 처리하는 중에 잠시 들른 것이었고, 다시 가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사천 지부에 기별을 넣어 놓았다. 숙소로 안내할 테니 거기서 쉬고 있어라.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너에게 가마.”

금귀진의 통통한 얼굴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응. 고마워, 형.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마른 비와 여규는 고마움을 전하고, 만금당 사천 지부로 바삐 이동했다.

걷는 내내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감지되는 기운은 없었다.

무언가가 있더라도 한 번 발각된 이상 신중을 기할 터.

마른 비와 여규는 쓸데없이 힘을 빼지 않기로 하고, 그대로 만금당의 문을 두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소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리 기별을 받은 사천 지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무려 당주의 동생인 금복인과 차기 당주로 유력한 금귀진이 신경 쓰는 손님인 것이다.

마른 비에 대한 대접은 말 그대로 최상이었다.

“사천의 음식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소협을 위해 사천 최고의 숙수들을 준비시켜 두었지요. 물을 데워두었으니 피로를 풀면서 기다리시면 만족스런 저녁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능숙한 몸짓으로 마른 비와 여규를 안내했다.

매일 쓸고 닦은 듯 먼지 한 톨 찾아보기 힘든 복도를 지나자 멋들어진 정자가 딸린 정원이 나왔다.

만금당의 손님들을 위한 숙소는 정원을 중심으로 둥글게 자리 잡은 형태였고, 마른 비에게 배정된 건물은 그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다.

“와~ 진짜 좋다! 고마워, 아저씨.”

“별말씀을. 그리고… 함께 다니는 맹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편히 모습을 드러내도 됩니다. 다만 다른 손님들이 놀랄 수 있으니 외부로 나오지만 않게 해주시길.”

실내의 넓은 공간에는 막 도축한 고기가 놓여 있었다.

금복인은 서신으로 별비에 대한 조치까지 지시해둔 모양이었다.

참으로 세심한 배려였다.

스르륵―

“헉…!”

고기가 자신의 몫임을 짐작한 별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안내했던 사내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죄, 죄송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 제든 저기 매달린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편히 쉬십시오.”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별비의 위용에 사내는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만금당의 접객을 담당해온 그는 별의별 방문자들을 경험했었고, 그 노련함 덕분에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씻을 물을 준비해 뒀다고 했지?”

마른 비와 여규는 별비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 두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여기에 몸을 담그는 거야?”

“응. 맞아. 이건 욕조라는 건데… 어? 설마 이거 대리석인가?”

놀랍게도 욕조는 대리석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것이었고, 그렇다면 십중팔구 창산에서 사들인 암석을 가공했을 터였다.

“와~ 대리석 엄청 비싼데, 이걸 통으로…!”

여규는 입을 쩍 벌린 채 욕조를 만지작거렸다.

여긴 만금당의 수많은 지부 중 하나였고, 손님이 잠시 머물다 가는 숙소일 뿐이었다.

그런 곳에 이토록 호화로운 욕조를 비치하다니.

중원의 상계를 양분한다는 만금당의 재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들어가면 되지? 으으~ 뜨끈뜨끈하고 좋다.”

옷을 훌훌 벗어 던진 마른 비가 물에 몸을 담갔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온수에 목욕을 하니 잠이 솔솔 밀려왔다.

“와… 비아, 너…….”

여규도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는데, 그의 시선은 마른 비의 하반신에 머물러 있었다.

“야생곡? 비아 너한테 들은 코끼리가 거기 달려 있네. 전상이구만, 전상.”

“하하, 내가 좀 튼실한 편이긴 해.”

처음 목욕을 같이 하게 된 둘은 킥킥대며 시간을 보냈다.

깨끗이 씻고 나오자 그들을 안내했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별비 앞에서 아까처럼 당황하지 않았는데, 그새 마음을 다스리고 적응한 모양이었다.

과연 만금당에서 접객을 맡길 만한 남자였다.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정원이 보이는 야외라 제법 운치가 있을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비단으로 짠 실내용 옷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만금당의 대접은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피부를 타고 사르륵 미끄러지는 비단의 감촉에 마른 비는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마른 비를 감동하게 만든 비장의 한 수는 따로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사천 전 지역의 특색 있는 별미들을 모아놓은 저녁상.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진 산해진미가 마른 비와 여규의 침샘을 자극했다.

“차가운 음료, 향이 좋은 차, 제대로 숙성시킨 술.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막내 도련님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소협께 저희가 준비할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제공하라고요.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사내는 우아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멍하니 서 있던 여규가 마른 비를 돌아봤다.

“와… 비아야, 난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고증자 어르신이 대체 뭘 부탁하려고 이렇게 엄청난 호의를 베푸는 거지?”

처음엔 마냥 좋았지만, 여규는 슬슬 걱정이 됐다.

유명한 무림 문파의 후기지수도 아니고, 심지어 한족도 아닌 마른 비에게 쏟아지는 과할 정도의 대우.

만금당은 금가를 중심으로 뭉친 상인 집단이며, 대저 상인이란 족속들은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

여규는 금복인이 마른 비에게 어떤 부탁을 할지 염려가 됐다.

“괜찮아. 할아버지는 내게 해가 될 일을 부탁할 사람이 아니야. 일을 하다 보면 위험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거야 뭘 하든 마찬가지잖아. 난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고, 도와주기로 했어. 할아버지도 그럴 거고. 마음 편히 받아도 돼.”

“며칠 본 게 전부라고 했잖아? 뭘 믿고….”

자연기가 전해주는 느낌.

마른 비가 금복인을 철석같이 믿는 이유였으나, 여규가 그걸 알 리 없었다.

여규는 마른 비가 걱정됐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천하의 만금당이 운남 촌구석의 꼬맹이를 이용해 먹기야 하겠어? 이런 산해진미를 언제 또 먹어 보겠냐! 그래, 먹자! 먹어!”

마른 비와 여규는 팔을 걷고 음식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첫술을 뜨기도 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원 저쪽에서 묵직한 기운이 어둠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고개를 번쩍 들고 그쪽을 노려봤다.

“……갑자기 뭐지? 근데 이거… 낯익어.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 기운인데….”

“어? 비아야, 너도 그래? 나도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야.”

뚜벅, 뚜벅.

둘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다가오는 그림자를 기다렸다.

정원을 가로지른 누군가가 가시영역에 들어왔을 때.

마른 비와 여규는 경악하여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 당신…!”

“아, 아니?! 왜… 아니, 어떻게 여기에?!”

휑한 왼팔과 작달막한 키.

노인임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형형히 빛나는 잿빛 눈동자.

설지굉이 어둠을 헤치고 마른 비의 앞에 나타났다.

“역시 너였군. 꼬맹이.”

어둠 한복판에서 잿빛 안광이 번쩍였다.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운은 정원에 만발한 꽃들을 모조리 말려 죽일 기세였다.

설지굉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른 비를 노려보다가 여규를 힐끗 보며 물었다.

“웃기지도 않는 조합이군. 네놈들이 왜 여기에 있나.”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 마른 비와 끔찍한 악연으로 얽힌 인물.

여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설검 장로님. 저희는… 아니, 비아는 고증자 어르신의 초청을 받아서……. 설검 장로님께서는 왜 여기에…?”

몇 달 전에 점창을 떠난 인물이다.

설지굉은 3년 전에 언급한 대로 사문이 안정되자 스스로 파문을 요청했고, 점창에서 받은 모든 걸 반납하고 운남을 떠났다.

그런데 뜬금없이 만금당의 객청에서 마주칠 줄이야.

설지굉이 등장한 순간, 여규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여규는 저도 모르게 마른 비의 손을 붙잡고 그를 자신의 뒤로 물리고 있었다.

그걸 본 설지굉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왜? 난 여기 오면 안 되나?”

“아,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너무 의외라서….”

설지굉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입술을 씰룩이더니, 결국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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