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막상 점창을 나오니 막막하더군. 갈 곳도, 찾아갈 이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십 년을 무림에 몸담았는데 말이야. ……헛산 거지.”
‘뭐지? 이 인간이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여규는 뜨악한 얼굴로 설지굉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여길 왜 왔냐고 물었나? 고증자, 그 정신 나간 노인네와 오래전에 마주친 적이 있었다. 바로 이 사천 지부에서.”
설지굉은 아련한 눈으로 독특했던 그 날을 회상했다.
“인연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의 스침이었지만, 평생을 반추해 봐도 난 그 정도의 인간관계도 형성하질 못했어. 점창을 나와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에 그가 떠오르더군.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신세를 질 생각으로 찾아왔다. 전해줄 말도 있고 말이야.”
“그, 그렇군요.”
설지굉이 그답지 않은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팽팽했던 공기는 느슨해졌지만, 여규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저자는 자신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공유환을 토막 친 사람이라는걸.
설지굉은 원한을 잊는 사람이 아니었고, 마른 비를 쫓다가 설검대와 팔 한쪽까지 잃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른 비를 붙잡은 여규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그때, 마른 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여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 오랜만이네. 같이 밥이나 먹을래?”
“비, 비아야!”
이게 무슨 헛소린가!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관계다.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 밥을 먹자니?
여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인간이 변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전쟁 이후, 설지굉은 봉검과 운검이 부를 때 말고는 거처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여규는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설지굉이 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람의 본성이 어디 가겠나.
여규가 아는 설지굉은 지금 당장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이었다.
“흐흐. 기를 쓰고 도망치던 게 3년 전인데. 감히 내게 그런 소릴 해? 많이 컸구나, 애송아.”
‘역시! 변하긴 뭘 변해!’
여규는 마른 비를 뒤로 물리려 했지만, 그는 굳건히 서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많이 크긴. 3년 전에도 내가 더 컸어. 당신 키 작잖아.”
왜소한 체구와 작달막한 신장.
불길하게 여겨지는 회색 눈동자.
설지굉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부분이다.
검갑을 쥔 노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네 녀석을 쫓다가 설검대가 몰살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악몽에나 나올 법한 괴수가 아니었다면….”
“칼이빨을 말하는 거지? 당신들은 검치호라고 하던가? 죽었어, 그놈.”
“……?!”
평온했던 설지굉의 기운이 크게 흔들렸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잠 못 들게 하는 기억.
10년을 키운 설검대를 몰살시키고, 그로 하여금 왼팔을 자를 수밖에 없게 한 괴수는 살아 움직이는 악몽이었다.
한데 그 괴물이 죽었다고?
설지굉이 눈을 부릅뜨며 발작하듯 외쳤다.
“죽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있어 그 괴물을 죽일 수 있단 말이냐!”
“누구겠어?”
마른 비는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설지굉을 바라볼 뿐이다.
3년 전엔 볼 수 없었던 차분함이 구구절절한 말보다 설지굉을 더욱 동요시켰다.
‘이 꼬마…!’
설지굉의 눈가가 잘게 떨려왔다.
익숙한 기운이 감지되어 정원을 가로질렀지만, 그는 마른 비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심정을 가누며 일단 마주했을 뿐이다.
한데 이 꼬마, 전과는 다르다.
타고난 분위기와 기질이 같을 뿐 내부에 간직한 기운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3년. 고작 3년이다! 그사이에 인간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다고?’
공간을 밀어내는 듯한 압력.
아니, 존재 자체를 우그러뜨릴 것 같은 압박이 사방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이런 건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검! 만약… 검을 뽑는다면?’
이긴다? 진다?
모르겠다. 그건 싸워봐야 알 수 있는 문제니까.
확실한 건 절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었다면 승산이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허나 전쟁을 겪은 후 자신은 크게 달라졌고, 그 변화는 무공의 진보를 이끌었다.
‘그런데도 밀리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기가 죽어서 물러섰으리라.
하지만 설지굉은 주눅 들지 않았다.
스릉―
손이 하나뿐이기에 엄지로 검을 밀어 올린다.
손잡이를 쥔 채 검을 휘둘러 검갑을 내버렸다.
내공을 응집시키자, 평생의 깨달음을 담은 잿빛 강기가 줄기줄기 타올랐다.
“꼬맹이. 조금 강해졌다고 감히 나를 위압하려 드는 거냐?”
화르륵―
회설강기(灰雪罡氣).
절정의 문턱을 넘은 설지굉의 검에서 무의 정화가 피어올랐다.
“까불지 마라, 애송아. 이 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거, 검강?!”
자부심 어린 선언과 소스라치는 경악이 교차한다.
여규는 활활 타오르는 잿빛 강기를 보고 기겁했다.
‘맙소사! 언제 검강을 다룰 수 있게 된 거지?’
가로막는 모든 걸 베어버릴 검술의 극치.
유형화한 기의 결정체는 고래로 절정을 넘은 검사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마른 비와 여규가 성장했듯 설지굉 또한 전쟁을 겪고 새로운 경지에 발들인 게 틀림없었다.
“와~ 그거 봉검, 운검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싸울 때 썼던 거잖아? 엄청 위험해 보이네.”
하지만 마른 비는 태연했다.
유형화한 기의 결정체?
너른 하늘이나 그믐은 물론이고 우둔한 땅, 매서운 눈도 구사하는 기술이다.
와족의 최상위 전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푸른 눈과 검치호조차 유사한 능력을 선보였었다.
중원의 무인들이 지고한 경지로 꼽는 강기는 마른 비에게 전혀 새로울 게 없었다.
“당신, 그거 이제 막 터득한 거지? 기운의 중심부가 불안정해. 파괴력만 무식하게 높여 놓으면 뭐 해. 안 맞으면 그만인걸.”
그 말대로다.
모든 걸 가르는 살상력이 있어도 맞추지 못한다면 손에 익은 검기만 못하다.
실제로 검강을 뽑아 올린 설지굉의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강기의 제어가 불완전하다는 증거였다.
“당신이야말로 날 뭐로 보는 거야? 두 눈 뜨고 똑똑히 봐. 3년 전의 내가 아니니까.”
우르르릉―
자연기로 구현한 하늘의 창.
본질은 강기와 유사하나 대자연의 공능이 더해졌다.
마른 비가 뢰창을 뽑아들자 설지굉의 얼굴이 애처로울 만큼 일그러졌다.
‘이, 이런 미친…! 뭐냐, 저게?’
물리적 타격을 위한 내공의 응집체.
창의 형태를 띤 강기 주위로 듣도 보도 못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미세한 소음을 유발하며 공기를 진동시키는 그것은 음공 고수들이 적을 격살할 때 쓰는 기예와 흡사했다.
들어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신기술.
3년 전, 일찌감치 가능성을 알아봤던 소년은 감당할 수 없는 거인이 되어 있었다.
“크르르르…….”
설지굉은 또 한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른 비에게 주의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감지할 수 있었을까?
위협적인 맹수의 울음에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목젖에는 새하얀 발톱이 닿아 있었다.
칼날 같은 발톱의 표면에는 시퍼런 기운이 선명했다.
‘이, 이건 또 웬…!’
아무런 기척도 흘리지 않고 등 뒤를 잡은 맹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괜찮아. 하지 마. 별비야.”
설지굉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푸르게 번뜩이는 맹수의 눈동자.
허튼짓을 하는 순간 갈가리 찢어 놓겠다는 엄포가 생생히 전해져 왔다.
“3년 전의 당신 입장을 이해해.”
“……?”
갑작스런 말에 설지굉이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와 당신. 아니, 와족과 점창 모두 공지량이란 사람의 흉계에 휘말렸을 뿐이야. 당신의 입장에선 나를 쫓을 수밖에 없었겠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지만, 난 당신을 원망하고 싶지 않아.”
마른 비는 지긋지긋했던 추격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날 쫓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지. 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반격이었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을래. 그래도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진심이야. 늦었지만, 그들이 좋은 곳에 갔기를 바라.”
“……명복을 빌어준다는 거냐? 가만히 있는 널 죽이기 위해 달려든 자들에게?”
“응.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거잖아. 서로의 입장이 엇갈렸을 뿐이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에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기로 했어.”
전쟁을 겪기 전이었다면 위선 떨지 말라며 호통을 쳤으리라.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대장로들의 희생을 보았고, 그들의 아량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여규, 공유립, 원승이 보여준 신념과 협의를 목도했으며, 공지량의 주박에서 벗어난 점창이 정도를 찾아가는 걸 지켜봤다.
이제는 안다.
자신이 걸어온 인생이 사방이 꽉 막힌 협로(狹路)였다는 것을.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눈을 뜬 설지굉은 자신이 외면했던 수많은 길을 인식하고 있었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모른다.
직접 걸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가보지 않은 길들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지굉은 뽑아 올렸던 검강을 꺼뜨렸다.
“꼬맹이. 네 말은 틀렸다.”
“……?”
“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움직인 거야. 휘말린 부분도 있지만, 거기엔 분명 내 의지도 작용하고 있었다.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다.”
크게 심호흡을 한 설지굉이 평생토록 몇 번 해보지 않은 말을 꺼냈다.
“미안하구나.”
“……?!”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저 인간이 미안하다고 한 거야, 지금?
여규가 못 볼 걸 본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당신, 지난번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 조금 전에도 살기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잖아.”
마른 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정리된 거지? 그럼 이제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할아버지?”
설지굉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응. 계속 당신이라고 할 순 없잖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 싫어?”
“……아니다. 그렇게 불려본 적이 없어서 낯설 뿐이야. 할아버지라…. 나쁘지 않구나.”
닭살이 돋을 정도로 어색하지만, 생각보다 괜찮다.
한평생 누구도 불러준 적 없던 호칭을 죽자고 달려들던 꼬마에게 듣게 될 줄이야.
설지굉이 보일 듯 말 듯 작게 웃었다.
“세상에. 저 인간이 웃을 줄도 아네?”
얼이 빠진 여규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댔다.
“뭐라고?”
설지굉이 눈을 치켜뜨며 여규를 노려봤고,
“아, 아닙니다. 실언입니다. 죄송합니다, 설검 장로님.”
여규는 황급히 사과했다.
표정을 푼 설지굉이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설검 장로는 무슨. 점창을 나온 지가 언제더냐. 너도 편하게 불러라.”
“아뇨.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설검은 빼고 장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여규는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대꾸했다.
‘저 인간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가는 밥 먹다 체할 거야.’
여규는 회설강기보다 설지굉이 할아버지란 호칭을 요구하는 게 더 무서웠다.
“그럼 이제 밥 먹… 응?”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끼어든 불청객.
설지굉의 뒤편, 별비보다도 뒤쪽에 커다란 그림자가 우뚝 섰다.
찌이잉―
자연기가 강렬한 존재감을 알린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그것은 또 다른 운명이자 장대히 뻗은 물길일지니.
전혀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동시대를 가로지르는 남자의 출현이었다.
“당신…… 누구야?”
마른 비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