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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78화 (178/463)

178화

“…….”

크다.

사내의 키는 무척이나 컸다.

눈을 맞추려면 마른 비가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넓다.

마른 비도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지만, 남자의 어깨는 마른 비보다도 반 뼘은 넓었다.

견갑(肩甲)을 얹어놓은 듯한 어깨는 직각에 가깝게 뻗었는데, 아무리 봐도 한족의 체형이 아니었다.

칼도 안 들어갈 것처럼 두툼하게 발달한 흉근.

육체 강화를 위해 고련을 거듭한 흔적이었다.

밝다.

이게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었는데, 사내의 머리칼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당가가 보이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황금빛 들판.

그 찬란한 빛깔이 풍성한 머릿결에 담겨 있었다.

“색목인(色目人)?”

여규는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원 치하에서 몽골인, 한인, 남인 이외의 서방계 각국 사람을 가리키는 그 말은 피부색이나 눈동자의 색이 다른 이들을 총칭한다.

사내의 머리칼은 황금빛이었고, 피부는 백옥처럼 하얬다.

하지만 색목인의 직접적인 의미와는 맞지가 않았는데, 그의 눈동자는 한족과 같은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사내를 한마디로 규정한 건 설지굉이었다.

“섞였군. 혼혈이다.”

이국적인 외모에 놀랐지만, 사실 겉모습 따윈 중요하지 않다.

시선을 강제로 붙잡아 두는 존재감.

사내에겐 강렬한 무(武)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스윽―

아무런 말없이.

사내는 여규와 설지굉을 차례로 바라봤다.

심혼을 빨아들일 듯한 검은 눈동자는 그들보다도 검었다.

“음…….”

설지굉이 낮게 소리를 삼켰다.

그리고 여규는 그의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독특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지만, 동시에 편안하다.

따스하게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포용력이 눈빛에서 전해진다.

부드러우나 여리지 않다.

은은한 눈빛 안쪽에서 수라장을 헤쳐 온 투사의 관록이 엿보였다.

‘아냐. 그것보다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강렬한 무의 체취를 덮는, 고결하고 거룩하게까지 느껴지는 무언가.

성스럽다?

아마 그런 표현이 적당하리라.

어둠 한가운데 우뚝 선 남자는 외모만큼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와~ 정말 크다!”

몽환적인 느낌에 취한 여규와 설지굉을 현실로 끌어당긴 건 마른 비였다.

“키만 보면 우둔한 땅 아저씨랑 비슷하겠는데?”

마른 비는 눈을 반짝이며 사내를 살피고 있었다.

갑작스런 등장에 긴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마른 비의 얼굴에 떠오른 건 짙은 호기심이었다.

“그런 머리색은 처음 봐. 진짜 멋지다! 당신, 어디서 왔어?”

마른 비가 해맑게 웃으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그런 마른 비를 이채로운 눈길로 바라봤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야. 따스하고 포근하고. 이게 뭐지? 주술이랑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달라.”

흥분한 마른 비는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고요히 서 있던 사내가 나지막이 물었다.

“제가 무섭지 않으십니까?”

“응? 무섭다니? 왜?”

“고향에서도, 이곳에서도, 모두가 저를 꺼리더군요. 제 외모 때문에.”

마른 비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어디가 어때서? 난 당신처럼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뭘 말하는 건지 알겠어. 하지만 그건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야. 그리고 외모보다는 당신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걸?”

사내는 신비로운 눈길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그 눈이 조금 커졌다고 하면 착각일까.

“당신은… 정말 특이한 분이군요. 당신의 기운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좀 더 일찍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지금부터라도 달라지면 되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른 비가 씨익 웃으며 오른 주먹을 내밀었다.

“마른 비야. 우리 친구 하자.”

사내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친구라는 말에 격동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눈빛을 빛내며 주먹을 마주 댔다.

“미카엘. 한어로는 미가륵(米迦勒)이라 합니다.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게 있어 머나먼 서역에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아까 그 사람, 뭐였지?”

여규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만찬을 즐기는 마른 비에 반해 설지굉과 여규는 젓가락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마른 비의 합석 제의를 거절하고 가버린 후였다.

“웅? 꿀꺽-! 푸하~ 맛있다! 규야, 뭐 해? 밥 안 먹어?”

“……그 사람을 보고 나서 이상하게 밥 생각이 없어졌어. 뭐랄까.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본 듯한 느낌? 엄청난 무언가를 봐버린 기분이야.”

여규는 혼란스런 얼굴이었다.

마른 비가 들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깊게 생각할 것 없어. 똑같은 사람이야. 한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네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 사람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거야. 나도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부족의 주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뭔가가 있더라.”

“비아, 너는 별로 감흥이 없나 보다. 난 그 사람을 보고 나서 식욕이 없어졌어. 충격이라도 받은 건가?”

“흠…. 그래? 그 정돈가? 네가 그렇게 느낄 정도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서워할 만도 하겠다. 난 비슷한 걸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서 그런지 딱히…. 할멈보다는 대하기 어렵고 엄숙한 느낌이었지만.”

마른 비는 다시 닭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규의 옆에 앉은 설지굉도 식사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응? 뭐야? 할아버진 왜 안 먹어? 설마 할아버지 같은 사람도 압도된 거야?”

음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설지굉이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분위기가 독특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 봤자 인간이다. 정 찝찝하면 칼춤 한번 추면 되지. 그럼 신비고 나발이고 저 멀리 사라진다.”

“흠. 아마 이기기 힘들 텐데.”

“뭐라고?”

설지굉이 고리눈을 뜨며 마른 비를 노려봤다.

아차 싶은 마른 비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그럼 왜 안 먹는 건데?”

잠시 입을 닫았던 설지굉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괘씸해서.”

“괘씸하다고? 뭐가?”

“만금당. 너한테는 이런 만찬을 내주면서, 나한테는 소면에 간단한 식사나 던져줘? 성질 같아선 이것들을 단칼에….”

마른 비가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설지굉을 말렸다.

“아니야, 할아버지. 그러지 마. 그러는 거 아니야.”

한참을 마른 비가 먹는 걸 지켜보던 여규는 뒤늦게 배가 고팠는지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탄력을 받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설지굉도 합세하여 그릇을 모두 비울 때쯤,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아야아아아!”

체통이라곤 저 멀리 던져버린 호들갑.

만금당 안에서 저럴 인간은 딱 한 명뿐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내가 왔다, 아우야!”

헐레벌떡 뛰어온 금복인의 얼굴은 새카맸다.

무더운 운남에서 한참을 지내며 그을린 모양이었다.

활짝 웃으며 뛰어온 그가 흠칫하며 멈췄다.

“응? 이게 누구야? 지굉 아우?”

“여전하시군. 18년이 지나서 잊은 모양인데, 한 번만 더 나를 그따위로 부르면 사생결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눈빛과 착 가라앉은 목소리.

설지굉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봐, 아우. 입술에 두부 조각 묻히고 그런 말해봤자 별로 무섭지 않은데?”

“…….”

설지굉이 오른팔 소매로 입 주변을 훔쳤다.

“아무튼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난 누구도 형님으로 모실 생각이 없으니까. 갑작스럽겠지만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잠깐만.”

금복인이 설지굉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끄덕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

몸을 숨기고 있는 전흠이 금복인에게 전음을 보낸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금복인의 얼굴이 음흉해졌다.

“자네, 점창을 나왔다면서?”

“그렇소.”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무작정 이곳 사천 지부로 찾아온 거고. 내게 신세를 지기 위해서. 맞나?”

“…….”

“형이라고 해봐.”

설지굉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어디 감히 그따위 걸 빌미로 무인에게…!”

“갈 곳 있어?”

“…….”

“난 자네가 썩 마음에 들어. 마침 실력 있고 믿을 만한 무인이 필요한 참이었지. 본당의 정보력과 와족의 입을 통해서 자네의 근황을 들었네.”

금복인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게 자네의 힘을 빌려주게. 조건만 맞으면 자네를 고용하겠어.”

“뭐, 그런 거라면….”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한 조건은 딱 하나야. 따라해 봐. 형.”

“…….”

“어서. 혀어엉~.”

“혀, 혀….”

전 같으면 칼부터 뽑고 봤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달라지지 않았나.

그깟 형이란 호칭이 뭐라고.

다들 가까운 사이에 하는 관계 정립이 아닌가 말이다.

또한,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다.

금복인이 일생을 바친 일을 무시하고 떠났고, 아무 연락도 없다가 18년 만에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받아주려 한다.

금복인 같은 이는 세상에 드물 터였다.

‘그래.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다. 까짓거 눈 한번 딱 감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려고 애쓰다가, 설지굉은 보았다.

금복인의 음흉한 미소를.

“이런, 썅! 도저히 못 하겠다! 당신 혼자 그런 호칭을 강요할 뿐이지, 누가 당신을 그렇게 부른단 말이오!”

“나오게.”

스스슥―

금복인의 부름에 땅속에서 전흠이 솟아올랐다.

전에는 감지하지 못했을 고수.

회설강기를 터득한 지금에 와서야 겨우 존재를 눈치챈 은신의 대가였다.

설지굉의 눈썹이 꿈틀했다.

“보여주게.”

“……형님.”

대단히 부끄러운지 전흠은 바로 사라져 버렸다.

금복인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설지굉을 바라봤다.

“봤나?”

“…….”

“예가 또 필요한가? 비아야.”

두 노인의 대화가 웃겨 죽겠다는 듯 마른 비는 깔깔대고 있었다.

“아하하! 이게 뭐 하는 거야! …응? 나? 나는 왜?”

“보여줘라.”

어릴 때와 달리, 이제는 마른 비도 제법 눈치란 게 생겼다.

금복인과 설지굉을 번갈아 본 마른 비가 씨익 웃었다.

“형.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난 잘 모르겠는데?”

설지굉의 얼굴이 애처롭게 구겨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평생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호칭이라니 시간이 필요할 테지.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네. 지굉 아우.”

금복인은 즐거워 보였다.

설지굉을 골탕 먹이는 게 못 견디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가 낄낄대더니 옆에서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 여규를 돌아봤다.

“오. 자네가 점창의 기대주라는 여규인가? 고검의 아들이라고?”

“크, 크흠. 네, 맞습니다. 점창의 여규가 고증자 어르신께 인사 올립니다. 중원 7대 기인의 명성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네. 반가워. 만금당에 잘 왔네! 비아의 가장 친한 친구라지? 그럼 이대로 이야기를 진행해도 되겠구먼.”

중원에 나온 마른 비에게 만금당에 들르길 부탁한 이유.

금복인이 평생토록 꿈꿔 온 숙원을 꺼냈다.

“우선 일을 도와주게 된 비아와 지굉 아우에게 고마움을 전하네. 이건 고고학에 일생을 바친 내가 십여 년간 준비한 일이야. 나와 금벽이는 오랜 연구와 집요한 추적 끝에 간신히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네.”

“위치? 무슨 위치?”

떨떠름한 표정의 설지굉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금복인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 진시황.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무덤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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