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그렇군. 자네가…! 과연!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온 건가!”
마른 비 일행과 대화를 마친 금복인은 정원 한복판에 있는 정자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누군가란 여규가 식욕을 잃을 만큼 충격적인 존재감을 선보였던 미카엘이었다.
분위기로 봐선 둘이 처음 만난 것 같은데 서로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금벽아! 이리 와라! 얼른 와서 이 친구와 인사해라!”
허둥지둥 나타난 금벽파라가 미카엘과 마주했다.
검은 머리에 파란 눈.
금발에 검은 눈동자.
서역과 중원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둘은 보는 순간 서로의 고충을 짐작했다.
쭈뼛대며 서로에게 다가간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흐음. 설마 그믐 할아범이….”
마른 비가 놀랍다는 눈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금벽파라를 보고 있었다.
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자리를 피해준 금복인이 마른 비의 옆에 섰다.
“한눈에 알아보는구먼. 맞다. 그믐 아우가 금벽이를 제자로 받았지. 아니, 와족에는 제자라는 개념이 없으니 그건 틀린 말이군. 아무튼 그믐 아우가 금벽이에게 전투 기술을 전수했어.”
“할아범을 어떻게 설득한 거야? 어지간해서는 붙잡고 가르치지 않는데?”
금복인은 ‘다 수가 있지’라는 얼굴로 웃었다.
“일종의 거래라고 보면 된다.”
“거래?”
“그래. 그믐 아우가 가장 바라는 걸 내가 찾아줬거든. 그 대가로 금벽이에게 몸을 지킬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할아범이 바라는 거?”
그게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금복인은 마른 비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그믐 아우에게 아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나?”
“할아범한테? 아… 그러고 보니 얼핏 들은 거 같기도….”
“그래. 그 아들의 위치를 찾았다.”
“정말?!”
마른 비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그믐 아우가 중원으로 나간 이유가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하더구나. 20년을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다고 했어.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 넓은 땅을 무작정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찾아낼 가능성은 길을 걷다가 벼락 맞을 확률과 비슷할 거다.”
“그믐 할아범이 할아버지한테 부탁한 거구나!”
“그래. 그리고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금당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못 찾을 건 거의 없지. 워낙 오래된 일이라 많은 돈과 시간을 썼지만, 결국 찾아냈다.”
“와… 할아범의 아들이라니. 할아범이 중원으로 나간 게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구나! 나, 눈물이 날 것 같아.”
마른 비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어? 가만! 그럼 할아범도 중원으로 나오는 거야?”
그믐과 함께 중원을 여행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른 비는 기대에 찬 얼굴로 금복인에게 물었다.
“아니. 그믐 아우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막상 위치를 알게 되니 용기가 나질 않는 모양이야.”
“잉? 그런 게 어디 있어? 일단 만나고 보는 거지!”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차기 족장이 정해지고, 수리의 눈 수장의 자리를 물려주느라 그믐 아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다.”
“아, 차기 족장…….”
마른 비가 잠시 말을 흐렸다.
자신이 중원을 유람하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부족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누구로 정해졌어? 노을이지?”
“그래. 노을이 고 녀석, 정말 똘똘하더구나. 무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성도 착해. 그런 인재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최초의 여족장이 탄생하게 됐다며 와족은 축제 분위기야.”
“그럴 만해. 노을이 같은 여자는 없지.”
금복인은 ‘그걸 아는 놈이 그랬냐?’라는 표정으로 마른 비를 봤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동감이야. 내게 아들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매파를 보냈을 거다.”
“바위곰과 나무표범은? 산이 형과 걸음이 형이 잇는 거지?”
“그래. 그 둘 말고 누가 있겠니. 노을이, 산이, 걸음이가 아직 어려서 수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어스름은 곧 그믐 아우의 뒤를 이어 수장에 취임할 거다. 그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니까.”
“맞아. 어스름 아저씬 대단해. 지금 당장 수리의 눈 수장이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정비가 끝나면 와족은 더욱 강해질 거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소감은 중원의 내로라하는 무력 단체 어디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거라는 거야. 아니, 일대일로 붙어서 와족을 이길 세력이 있을지 의문이군. 신강에 웅크리고 있는 마교라면 모를까.”
와족에 대한 금복인의 평가는 후했다.
정파 최강의 무력 단체 중 하나인 점창을 무너뜨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외부인에게 부족에 대한 칭찬을 듣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마른 비는 갑자기 부족 사람들이 보고 싶어졌다.
“아무튼 그믐 아우는 당분간 중원으로 나오기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비아 너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했지.”
“말? 어떤 말?”
“아들에게 찾아가 보라고. 먼저 가서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갈게! 당연히 가야지! 내가 먼저 가서 할아범의 아들을 만나고 소식을 전할게!”
마른 비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믐이 아들을 찾게 돼서 정말 잘됐다는 얼굴이었다.
금복인은 마른 비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허허 웃었다.
“아들을 만나면 꼭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미안하다고. 그리고 보고 싶다고. 수리의 눈 수장의 자리를 넘기는 대로 찾아가겠다고.”
“꼭 전할게! 할아범과 할멈의 소식을…! 아…….”
잎의 노래를 떠올린 마른 비가 침울해졌다.
“그분은 할멈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있겠구나. 슬픈 일이야. 먼저 연락이라도 좀 하지. 가만히 생각하니 너무하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다. 잘 있다는 연락 정도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마른 비와 금복인은 동시에 우울해졌다.
“그분이 있는 곳이 어디야? 날이 밝으면 바로 출발할래.”
“바로 말이냐? 며칠 쉬다 가지 않고.”
“아냐. 얼른 만나서 소식을 전하고 싶어. 할아범이 20년이나 기다린 일이잖아.”
마른 비는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기세였다.
“그렇군. 알겠다. 그믐 아우의 아들이 있는 곳은…….”
* * *
다음 날, 마른 비는 만금당 사천 지부를 나와 동쪽으로 출발했다.
설지굉은 금복인 곁에 남았기 때문에 여규만 동행한 채였다.
설지굉은 검치호가 실존했다는 말을 전하며 금복인이 놀라길 바랐지만, 이미 청죽림에 들러 검치호의 이빨과 벽화를 확인한 금복인은 늦어도 너무 늦었으니 빨리 형이라고 부르기나 하라며 재촉했다.
마른 비는 설지굉에게 검치호를 사냥한 일을 이야기해주느라 밤을 새버렸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믐의 아들을 찾아갈 일과 이제부터 돌아보게 될 중원의 중심부가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다.
“3년 후라고 했지?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한가 보다.”
여규의 말이 마른 비의 주의를 돌렸다.
“그런가 봐. 대략적인 위치만 추측할 뿐 입구를 찾는 데만 1, 2년은 걸릴 거라잖아. 엄청 꽁꽁 숨겨져 있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 진시황.
수많은 이들이 찾아 헤맸지만, 진시황의 무덤은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1500년이 흐르도록 숨겨져 있던 그곳을 발굴하는 건 금복인 일생일대의 비원이었다.
그는 만금당을 떠나는 마른 비에게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며 손을 흔들었다.
중간에 변동이 생기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연락할 테니 걱정 마라, 도움이 필요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만금당의 지부를 찾아라,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3년 동안 마음껏 중원을 여행하고, 그의 일을 도와주면 된다.
아마 그 일이 마무리될 때쯤이면 부족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얼마나 즐거운 일들이 펼쳐질까, 마른 비는 이런저런 상상에 젖었다.
“그 사람, 남을 분위기였지?”
여규는 여전히 미카엘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일신에 축적한 힘부터 보기 드문 외모,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마른 비가 생각해도 잊기 힘든 남자였다.
그와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 그걸 못 물어봤네.’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깜빡 잊었다.
성도의 객잔에서 살수 조장이 당문휘에게 했던 말.
그는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당문휘가 회안검을 쓰러뜨리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회안검은 설지굉의 별호라는 걸 알고 있기에 놀랐었고, 그 일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막상 설지굉을 마주하자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 일을 떠올리지도 못한 것이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까먹는 건 아니겠지?’
언젠가는 당문휘와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가 갑자기 바빠져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자 아쉬움이 들만큼, 그는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천에 올라오자마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네.’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부족 사람들이 벌써 그립지만, 마른 비는 중원에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운남에 남았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경험과 인연을 얻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마른 비는 길을 재촉했다.
만금당을 나온 이후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금복인만이 아니라 당가에서도 사과의 표시라며 큰 금액을 건넸기에 여행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노잣돈은 풍족하다 못해 넘쳤다.
“와~ 너 무슨 돈이 이렇게 많냐? 집을 한 채 살 수도 있겠는데?”
마른 비가 끌러놓은 전낭을 보고 여규는 기겁했다.
그리고 이렇게 큰돈을 들고 다니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라며 전장(錢莊)에 대해 알려줬다.
어느덧 사천 동쪽의 끝자락까지 왔기에 마땅한 전장이 없었고, 둘은 귀주로 넘어가자마자 만금당 지부를 찾아 돈을 맡기기로 했다.
그로부터 엿새쯤 지났을까?
잘 먹고 잘 자며 여행을 즐기던 마른 비와 여규가 사천과 귀주의 경계를 넘었을 때였다.
오래도록 정비되지 않은 관도 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의 주홍빛 손길이 닿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이 우거진 길.
한 무리의 무인들이 마른 비와 여규의 앞을 막아섰다.
“아주 혈색이 좋다 못해 개기름이 번들거리는구나. 이 야만인 새끼야! 나를 건드리고도 네가 몸 성히 나다닐 수 있을 줄 알았냐?”
아, 맞다.
이런 놈이 있었지.
존재감이 너무나 미미해서 아예 잊고 있었다.
도강언에서 발차기 한 방에 기절했던 그자.
운가의 운이령이 씩씩대며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뭐야? 당신, 여태 우리를 따라온 거였어?”
이상하다.
감시를 받고 있었다면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을 텐데.
해답은 운이령이 주었다.
“사천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빠져나갈 길이 뻔하다. 가는 방향만 알면 길목을 틀어막는 건 일도 아니지. 뭐 하러 진땀을 빼며 뒤를 쫓겠나.”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아주 친절한 녀석이다.
동시에 멍청한 놈이기도 했다.
여전히 상대의 힘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가급적 싸우고 싶지 않아. 기회를 줄 테니까 돌아가. 분명히 말하는데 저번처럼 검을 뽑았다간 이번엔 살아남지 못할 거야.”
마른 비는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하지만 운이령은 그게 자신들이 두려워 허세를 부린다고 착각한 듯했다.
“난 운가의 적손이며, 정파의 무인이다. 무릎을 꿇고 사죄해라. 그러면 죽이진 않으마. 팔뚝 하나 정도로 나를 욕보인 죄를 사해줄 것이야.”
여전히 ‘적당히’를 모르는 놈이었다.
마른 비가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상하네. 너희는 예전의 그 암기를 발산할 수준이 아니야.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
“암기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아냐, 됐어. 그보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마른 비의 눈이 푸른빛을 담았다.
“이번에 덤비면, 너 진짜로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