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운이령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뭐, 뭐지?’
뱀을 만난 개구리가 움츠러들듯.
감당할 수 없는 기세가 육신을 옥죈다.
무인의 본능은 생존을 위해 후퇴를 권고했고, 운이령은 그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곧 수치심에 휩싸였다.
‘이, 이런 빌어먹을!’
짐승이라면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갔을 텐데.
인간에겐 자존심이라는 부차적 감정이 있고, 때때로 그것은 본능과 이성을 몽땅 마비시킨다.
세가의 식구들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인 운이령은 오기가 치밀었다.
“이… 새끼가! 내가 죽는다고? 끝까지 오만방자하구나!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거냐?”
차앙!
운이령은 기세에서 밀린 걸 만회하겠다는 듯 과장되게 검을 뽑았다.
허나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칼끝에 인생을 건 무인들이다.
그들이 운이령의 상태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여규는 피식 웃었고, 운가의 무인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른 비는 눈에서 힘을 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비웃지 않을 테니까 그냥 돌아가는 걸 추천할게. 방금 한 말도 잊겠어. 그래도 정 싸워야겠다면, 일대일로 붙자.”
“뭐, 뭐라고?”
“네가 일으킨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 동원한 거, 보기 안 좋다는 거 알잖아.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상할 테고. 그러니까 일대일로 붙고 깔끔하게 끝내자. 이기든 지든 그게 덜 창피하지 않겠어?”
마른 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이기도 했다.
당가와 종종 문제를 일으키긴 하지만 운가는 엄연히 정파에 속한 가문이었고, 여럿이서 소수를 핍박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그건 운이령 뒤에 선 무인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창피를 당했다고 해서 따라오긴 했지만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내가 혼자였어도 이랬을까?’
마른 비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자신이 혼자였어도 이들이 이런 표정이었을지.
운가의 무인들이 주저하는 진짜 이유는 옆에 있는 여규 때문이 아닐까?
중원에서 구파일방의 이름은 불필요한 충돌을 막아주는 방파제나 다름없었고, 마른 비는 한족의 세계에서 소속 집단 혹은 개인의 이름값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
마른 비가 생각에 잠겼을 때, 운이령 또한 고민에 빠졌다.
치욕을 갚겠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혀서 달려왔지만, 찜찜한 건 사실이었다.
죽인다느니 팔을 자른다느니 했지만, 사실 그게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안다.
사과를 받고,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을 뿐.
얻어맞고 기절하긴 했지만, 저 야만인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운이령이 여규를 힐끔거렸다.
점창파의 제자가 옆에 있는 이상 막나갈 수도 없지 않은가.
적당히 뻗대다가 저자가 개입하는 순간 사과를 받고 끝내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다.
직접 붙어본 결과 마른 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쯤에서 그냥 사과를 받고….’
운이령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쩌다 보니 다투게 됐지만 불필요한 살생은 피하고 싶다, 정중히 사과하면 사천을 대표하는 정파의 후기지수답게 아량을 베풀고 물러나겠다…… 상황을 유연하게 마무리 지을 말들이 뇌리를 스쳤다.
“네가 한 짓은 사생결단을 내고도 남을 일이지만, 정중히 사과한다면 내 특별히….”
거기까지였다.
운이령의 말은.
아니, 그의 인생은.
후우웅― 짝! 퍼어엉!
바람이 불고, 인간의 머리가 터졌다.
끝까지 허세를 부리던 운이령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뭐… 뭐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 운 공자! 이게 무슨…!”
운가의 무인들은 방심했다.
명분도 부족했고, 현실적으로도 싸움을 벌이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마른 비가 운이령에게 건넨 제안을 들으며 적당히 마무리 되겠구나, 마음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절묘한 틈을 노린 한 수.
언제 출수한 건지도, 무엇이 날아든 건지도 모른 채 그들은 운가의 적손을 잃었다.
“우, 운 공자…! 이걸, 이걸 어떻게……. 가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이… 더러운 야만인 새끼가 방심하게 해놓고 암습을…!”
“죽여라! 점창이고 뭐고 둘 다 죽여! 이건 전면전의 선포나 다름없다!”
차차창!
운가의 무인들이 절규하며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한번 눈이 뒤집혔다.
운이령을 살해한 장본인이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전방! 분명히 저쪽에서 암기가 번뜩였어! 한데 곧바로 사라져? 방금 뭐였지? 검도 아니고, 비수도 아니야. 훨씬 길고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마치 뱀 같았는데?”
“채찍! 비아, 네 말대로라면 그건 채찍이야!”
뻔히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여규는 보지 못했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휙 지나가고, 운이령의 머리가 터졌다.
쾌속하다는 말도 부족한 암격.
심지어 공격이 날아든 방향도 가늠할 수 없었다.
“채찍? 뭐야, 그게?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지?”
채찍의 끝부분이 목표물을 타격하는 순간의 속도는 음속을 뛰어넘는다.
인간이 최초로 이루어 낸 음속 돌파.
무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와족에서 자란 마른 비가 채찍을 알 리 없었다.
“굉장히 다루기 힘든 무기야! 한계도 명확하고! 그래서 정상급 무인 중에 채찍을 쓰는 사람은 없어! 편(鞭)으로 유명한 고수들은 있지만, 절대 이 정도는 아닐 텐데…!”
휘두르는 게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일격.
여규는 혼란스런 얼굴이었다.
“어디서 개수작이냐! 이 숲속에 너희와 우리 말고 누가 있단 말이냐!”
운가 무인의 일갈은 그럴 만했다.
마른 비와 여규를 기다리며 주변을 샅샅이 훑었고, 운가의 무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설마 자신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그 누군가에게 마른 비를 추적할 실마리를 주었으며, 암습을 시도할 쾌적한 환경까지 제공했다는 걸 알면 거품을 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들도 봤잖아! 우리가 아냐! 우린 가만히 있었다고!”
마른 비가 운가의 무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리쳤다.
“너희 둘이 아니라면 너희가 숨겨놓은 누군가겠지. 여긴 사람 구경을 하기 힘든 곳이고, 너희가 오기 전에는 분명히 우리밖에 없었다.”
지휘자로 보이는 무인이 어금니를 씹으며 그르렁댔다.
운이령과 돈독한 관계였는지 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점창이고 나발이고 갈가리 찢어 죽여라!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전부 내가 진다!”
지휘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운가 무인 열다섯 명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또 다른 열 명은 그들의 뒤를 따르며 암습을 대비했다.
“스물다섯! 죽일 각오로 싸워야 해, 비아야! 운가는 봐주며 싸울 만큼 만만치 않아!”
“제길! 대체 어떤 놈이…!”
마른 비와 여규도 이를 악물며 싸움을 준비했다.
‘집중해!’
싸움이 시작된 이상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 숨어 있을 암습자도 대비해야 한다.
제대로 살피진 못했지만, 마른 비의 감각에 걸리지 않을 만큼 상대의 은신술은 출중했다.
모든 감각을 열어젖힌 마른 비가 진각을 내리찍었다.
쾅!
“규야! 내가 먼저 갈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그건 상대를 일일이 쓰러뜨릴 필요가 없으며, 적의 예봉을 꺾는 것만으로 충분하단 뜻이었다.
운가의 무인들을 밀어내되 암습을 대비할 수 있는 간결한 기술.
응집된 자연기가 어깨를 기점으로 뿜어지니, 산 허물기가 운가의 초격을 뭉갰다.
“크아악!”
“커헉…!”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튕겨져 나간 여섯 명.
나머지 아홉 명은 주춤했으나 겨우겨우 산 허물기를 버텨냈다.
휘리릭―
암습이 없다?
그럼 그대로 들어간다.
좌측으로 회전한 몸이 거리를 지우고, 적들에게 바짝 붙은 마른 비가 팔꿈치를 수평으로 긁었다.
빠가각! 챙강! 쩌정!
턱뼈를 부수고, 검을 분질렀지만, 결국은 방어에 막혔다.
무소의 뿔이 멈춰선 순간, 남은 여섯 명이 달려들었다.
“규야.”
“알아. 맡겨 둬.”
무리할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주적은 숨어 있는 암습자이기 때문이다.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
마른 비는 여규에게 전면을 맡기고 사위를 경계했다.
퓨퓨퓨퓻―
3년 만에 보는 사일검이다.
찌르기 하나에 모든 걸 내건 극쾌의 검.
봉검이 준비한 단환을 복용하고, 여휘에게 지도를 받은 여규는 부쩍 성장해 있었다.
“컥!”
“아악…!”
“쿠헉!”
찌르기 일수에 한 명씩.
사납게 들려들던 운가의 무인들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여규의 검은 그들의 오른쪽 쇄골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꿰뚫었다.
“휘유~ 대단하네. 그 속도로 찌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지?”
점창의 차세대를 견인할 재능.
여규의 성취는 마른 비가 혀를 내두를 만큼 탁월했다.
빠악! 빡!
무소의 뿔로 정리하지 못했던 두 명을 마저 때려눕힌 마른 비가 다시 전면을 주시했다.
“또 한 번 이대로.”
여규의 역량으론 암습을 막아낼 수 없다.
짧게 후려치는 단타로 운가 무인들의 공격을 끊어내고 결정타를 맡긴다.
그리고 자신은 암격을 대비한다.
마른 비는 뒤이어 날아드는 열 명을 향해 정권을 장전했다.
“이노오오옴!”
열다섯이 허무하게 무너졌음에도 위축되지 않는다.
과연 천북제일세가의 정예라 불릴 만한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으니, 장로급이 따라오지 않은 이상 이 정도 숫자로 여규와 함께 하는 마른 비를 제압할 순 없었다.
“죽어라아아!”
검의 그물이 펼쳐졌으나 마른 비는 유유하게 검격을 헤집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운가의 무인들을 보지 않고 숨어 있는 암습자를 찾는다.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무력의 차이였다.
쾌애애액―!
“응?”
아차! 암습자를 신경 쓰느라 깜빡했다.
저쪽에도 대주급의 무인이 존재한다는걸.
뒤에서 마른 비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지휘자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많이 쳐줘야 당하준에 필적하는 무력이다.
이 정도 공격에 당할 거라면 애뢰산에서 이미 고혼이 됐으리라.
『전부 멈춰.』
와족 비전, 야수 제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던 열 명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찰나의 틈새.
그 정도면 여규가 파고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사일검이 적들의 쇄골을 꿰뚫고, 마른 비가 내지른 올빼미 사냥이 언령을 버텨낸 운가 지휘자의 어깨를 쑤셨다.
아니, 곧 그렇게 될 터였다.
후우우웅―
‘온다…!’
암습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규야! 엎드려!”
쫘자자자작!
진로를 가로막은 운가 무인 다섯 명의 허리가 양단됐다.
채찍에 실린 힘은 무지막지했고, 전혀 속도가 줄지 않은 채 마른 비를 덮쳤다.
운가의 무인들을 이용해 만든 필살의 덫.
암습자는 오직 이 순간만을 노렸던 게 틀림없었다.
‘범의 앙심! 교룡갑!’
전신에 깃든 자연기가 육체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극속의 암격.
마른 비는 감으로 허공의 한 점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