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부아아악!
“큭!”
왼팔로 막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채찍은 굉음을 흘리며 왼편으로 치솟았고, 아슬아슬하게 비켜 간 사신의 밧줄은 교룡갑까지 터뜨리며 마른 비의 팔뚝에 상처를 남겼다.
‘진짜 무지막지하네!’
속도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무기다.
공격자가 노리는 지점을 내준다면 뼈도 추리기 힘들 거다.
특히 채찍의 끝부분이 목표지점에 다다라 음속을 돌파하는 시점에는 피하거나 잡아채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대충 알았어.’
한 번 겪어보니 알겠다.
왜 극상승의 고수들이 채찍을 사용하지 않는지를.
여규가 채찍을 두고 한계가 명확하다고 한 이유를.
부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을 때, 마른 비는 그쪽으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아니?!”
깜짝 놀란 여규의 외침이 들린다.
마른 비는 그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전진했다.
‘역시!’
서서 맞이했을 때는 치명적이었으나 채찍의 안쪽으로 파고드니 무풍지대나 다름없다.
아니, 운가 무인들의 허리를 양단할 만큼 강한 힘을 담고 있지만, 이 정도는 마른 비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마른 비는 또 한번 팔을 수직으로 그어서 다가오는 채찍의 허리를 끊었다.
‘이제 어떤 놈인지 얼굴 한 번 볼까?’
번갯불을 튕겨서 거리를 좁히려던 찰나였다.
머리 위에서 위험이 감지됐다.
“큭!”
쐐애액― 콰앙!
옆으로 황급히 몸을 빼자 하늘에서 떨어진 채찍이 땅을 후려쳤다.
지면이 움푹 파일 만큼 강한 일격.
채찍의 중간을 때려서 궤도를 수정했음에도 암습자는 그걸 다시 제어한 것이다.
그리고 공격은 끝난 게 아니었다.
후우웅― 촤라락!
지면을 때렸던 채찍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마른 비를 쫓아왔다.
팔을 들어 막자, 채찍은 팔뚝을 뱀처럼 휘감았다.
‘뭐야, 이건? 검 조각?’
채찍에는 곳곳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있었다.
이런 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썼을까.
오직 인간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살상 병기였다.
촤아악―
암습자가 팔을 절단할 생각으로 채찍을 당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강피와 철골, 그리고 교룡갑을 몰랐다는 점에서 그의 패배는 예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그그극―
칼로 돌을 긁는 듯한 기음이 울리고, 마른 비의 팔을 휘감았던 채찍이 회수된다.
마른 비가 그걸 두고 볼 리 없었다.
“어딜 가! 이리 와!”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회수되는 채찍을 움켜쥐고, 힘껏 잡아당긴다.
우둔한 땅이나 산 정도의 상대라면 모를까, 마른 비는 어지간해선 힘에서 밀려본 적이 없었다.
“……!”
저 앞에서 사람 하나가 수풀을 뚫고 딸려 나왔다.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의 본능.
채찍을 놓으면 될 것을 암습자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마른 비의 앞에 훤히 위치를 드러냈다.
그리고 마른 비는 기회를 놓치는 남자가 아니었다.
쾅!
드디어 발동된 번갯불이다.
간격이 사라지고, 적의 모습이 확대된다.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암습자가 허공에 뜬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지? 도강언에서 강 건너에 숨어 있던 놈.”
놀라울 정도의 은신술을 지닌 자다.
전사로서의 역량은 어스름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은신술만 놓고 본다면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숨어서 적을 암격하는 데 특화된 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자는 살수였다.
휘리릭―
살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채찍을 놓고 몸을 휘돌리며 공격을 준비할 뿐이다.
양손에 각기 다섯 자루의 비수가 들리고, 열 줄기의 칼날이 마른 비의 요혈을 노렸다.
“뭐야, 이게? 야. 당가에 가서 문휘 아저씨한테 칼 던지기 좀 배우고 와.”
이 정도 공격은 막을 필요도 없다.
마른 비는 비수를 무시한 채 전진했고, 살수가 펼친 최후의 발악은 그의 피부를 뚫지도 못했다.
“몇 명이 죽은 거야, 너 때문에?”
퓨퓨퓩!
뼈창이 허공에 뜬 살수의 사지를 꿰뚫었다.
상하를 동시에 가격하는 악어 이빨.
위에서 내리꽂힌 주먹은 살수의 등뼈를 부쉈고, 아래에서 솟구친 주먹은 독환을 깨물지 못하도록 턱을 산산조각 냈다.
털썩.
살수는 땅바닥에 추락해서 끔찍한 고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후우……. 지금껏 본 살수들 중에 제일 위험한 놈이었어. 이 정도면 나름 유명할 거 같은데. 당신, 짐작 가는 거 없어?”
“나, 나 말이오?”
운가의 지휘자는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자신이 좀 전과 달리 반공대를 쓰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마른 비에게 검을 휘두를 때만 해도 죽음을 예감했다.
아니, 처음 달려든 열다섯 명이 쓰러졌을 때, 오늘 여기서 뼈를 묻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도 싸워야만 했다.
운이령이 죽는 순간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운이령을 죽인 공격이 날아들었고, 그건 최종적으로 야만인 청년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감지하지 못한 제삼자가 정말로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벌어진, 눈이 휙휙 돌아갈 만큼 경이적인 공방.
그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제 오해 풀렸지? 우리가 한 게 아니야. 이놈, 우리를 치기 위해 당신들을 이용한 거라고.”
“그대의 말이 맞았소. 미안하오. 우, 운 공자는 그럼 미끼로….”
사내는 비통한지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혹시 당신과 척을 진 살수 집단이 있소?”
“응. 성도의 객잔에서 살막이란 곳의 살수들과 싸웠었어.”
“살막! 중원 삼대 살수 단체 중 한 곳이오. 살막의 살수면서… 절정의 은신술을 터득한 자. 편을 주무기로 쓰는 자? 서, 설마…!”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편(蛇鞭) 갈우영?”
“사편?! 살막의 막주를 제외하면 최고의 살수라는?”
여규가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서 경련하는 사내를 바라봤다.
“맞구나. 유명한 놈. 어쩐지 위치를 찾기가 힘들더라니.”
마른 비가 채찍에 긁혀 피가 줄줄 흐르는 팔뚝을 지혈하며 말했다.
‘맙소사! 이 청년, 혼자서 사편을 잡은 거야?’
중원 삼대 살수 단체 중 한 곳을 대표하는 암살자.
사편에게 목숨을 잃은 무림인은 헤아릴 수 없다.
그중에는 거대 문파의 장로급 인물들과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고수들도 부지기수였다.
살막이 꺼릴 만한 배경이 없다면, 살막에 청부가 들어간 순간 삶은 포기해야 한다.
그게 무림에 알려진 상식이었다.
“이런 거물이 왜 당신을 노리는 거요?”
“글쎄. 아마도 객잔에서 살막의 살수들과 충돌했던 일 때문이 아닐까? 이놈들이 노리던 사람들을 내가 구해줬거든.”
그 순간, 바닥을 기며 신음하던 갈우영의 눈이 빛났다.
그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자의 모습이었다.
마른 비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개 조라고 했지? 살막의 살수 열여덟 명. 그 많은 인원이 갑자기 증발했으니 조사를 나온 건가? 당가에서 모든 정보를 통제했으니 알아낼 방도가 없었겠고……. 당시에 특이한 일이라고는 내 존재뿐이었겠구나. 게다가 당가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의심할 만하네.’
그래서 도강언까지 따라붙은 것이리라.
그런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소수부족의 청년이 구파일방 세 개 문파의 기재들과 어울린다?
심지어 마른 비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만금당이었다.
이쯤 되면 증거가 없을 뿐 살수들의 실종과 마른 비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마음 놓고 돌아다니며 술까지 퍼마셨으니.
마른 비는 앞으로의 여정에서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
갈우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른 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확신.
갈우영은 부서진 턱으로 씨익 웃었다.
후아아악―
그 순간, 무수한 기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도강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멀찍이 대기시킨 수하들.
살막의 정예 살수들이 사방을 에워싼 채 밀려오고 있었다.
“이, 이것…!”
운가의 무인들은 하얗게 질렸다.
처음부터 삼십 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고, 심지어 마른 비와 여규에게 당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몰살.
운이령의 자존심을 세워 주기 위해 따라왔다가 전멸을 당하게 된 것이다.
살수들은 살인의 흔적을 지울 것이고, 산간벽지에서 죽은 자신들은 실종 처리될 것이다.
운가에서 기를 쓰고 찾아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을 테니까.
말 그대로 개죽음이었다.
“대충 칠십 명 정도 되나?”
“……?”
마른 비의 혼잣말에 운가 무인들이 고개를 돌렸다.
“응. 그런 것 같아. 사편 저놈이 여덟 개 조를 끌고 온 거 같은데?”
여규가 싸울 준비를 하며 대꾸했다.
“다, 당신들 싸울 생각인가?”
마른 비에게 산 허물기를 맞고 날아갔던 사내가 물었다.
“그럼 싸워야지. 그냥 죽어?”
마른 비는 별 희한한 소릴 다 한다는 듯 되물었다.
“이건 도저히 승산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야. 죽어라 발버둥 치다 보면 어떻게든 살길이 열리더라고.”
설검대에게 쫓길 때.
그리고 검치호를 만나 죽음을 각오했을 때.
마른 비는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놈들, 상당하긴 해도 좌절할 정도는 아냐. 나랑 여규만이라면 고전하겠지만 우리에겐 강력한 아군이 있거든.”
“아, 아군? 그런 자가 어디에?”
운가 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안 부르고 꽁꽁 숨겨놓길 잘했네. 아주 좋아. 심지어…….”
마른 비가 주변을 둘러보며 웃었다.
“여긴 숲이야. 그럼 질래야 질 수가 없잖아. 그치, 별비야?”
“크아아아아앙!”
마른 비의 물음에 화답하듯 대호의 울부짖음이 숲을 흔들었다.
다가들던 기척들이 움찔하고, 동요가 확산된다.
그 순간, 숲의 후방에서 피가 튀었다.
퍼억! 촤악! 스가각! 찌걱!
한마디의 신음도, 비명도 없었다.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 게 분명함에도 극도로 절제된 소리만이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살육이 진행 중이었다.
“무… 뭐냐?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간혹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휙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형체를 포착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게 지나는 경로에서 피가 폭죽처럼 터진다는 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숲의 절반이 피로 물들었다.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이길 거라고. 당신들, 집에 돌려보내 줄게.”
마른 비가 운가의 무인들을 보며 웃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 환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갈우영만이 눈을 부릅뜬 채 참담함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쳐, 쳐아…! 수어 이찌 마! 이노으 이지로 자아라!”
‘쳐라! 숨어 있지 마! 이놈을 인질로 잡아라!’
그건 지휘자의 동물적인 본능일 터였다.
마른 비만 잡으면 저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싸워 이길 수도 없고, 도망도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리라.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을 한다며? 날 원망하지 마. 당신 같은 사람들을 살려줄 생각 없어.”
마른 비가 싸늘한 눈으로 갈우영을 내려다봤다.
지휘자의 뜻을 읽은 잔존 살수들이 달려들고, 마른 비가 갈우영에게서 등을 돌렸다.
착시일까?
갈우영의 눈에는 마른 비의 등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비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