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호남
《호광성(湖廣省).
장강(長江)이 가로지르는 천혜의 땅.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대륙의 중앙부를 횡단하는 장강의 혜택을 듬뿍 머금은 대지다.
대륙 최대의 담수호인 동정호(洞庭湖)는 장강의 홍수 조절 기능을 맡아 왔으며, 토사의 퇴적이 현저하고 온난 습윤한 기후의 형성에 일조한다.
이는 민초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중략)
동정호를 경계로 남과 북을 나누어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이라 부르는 건 세간의 편의에 입각한 것일 뿐, 정식 명칭이 아님을 알 것이다.
허나 모두가 그리 부르고 있으니 언젠가는 호광성을 나누어 호남성과 호북성이라 칭하는 날이 올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 (중략) …….
축복받은 대지에서 나고 자라, 장강의 도도한 물결을 보며 웅심을 키운 호걸들이 천하로 눈을 돌리니, 호광성은 영웅들을 잉태하는 요람이 되어 왔다.
호북의 무당파(武當派)와 제갈세가(諸葛世家)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남의 자유로운 기풍은 저 유명한 사도련의 련주, 패군(覇君)을 낳지 않았던가.
……사족을 달자면, 호광성은 그 위치로 말미암아 수많은 영웅들이 거쳐 간 바 있으니, 필자가 무한히 신뢰하는 수왕의 발자취 또한 아로새겨져 있다.》
혼세록 지역총람(地域總覽)
「호광성」
삭월 월주 백강 저
구토의 흔적과 분뇨의 냄새가 뒤엉킨 뒷골목.
달빛도 침투하지 못해 어둑한 그곳은 너저분했다.
그리고 담벼락에 머리를 기댄 여인은 골목의 더러움만큼이나 피폐해 보였다.
‘지겨워…….’
여인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났다.
육신의 고단함이 아니다.
삶의 굴레에 치이고 깎여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감.
여인의 눈은 칙칙하게 죽어 있었다.
‘몇 번째지?’
여인의 앞에는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죽어 있었다.
시체들은 목이 꺾이거나 신체 곳곳이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몇몇은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었는데, 피부가 시커멓게 변색된 채였다.
극독이 주입된 흔적.
중독사였다.
‘너무 지겨워…….’
여인이 멍한 눈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붉은 입술과 관능적인 얼굴.
부드러운 살결과 육감적인 굴곡.
인간에 대한 불신은 활력 넘치던 눈에 잿빛 회의를 물들였지만, 사내들은 거기서 또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접근하는 걸 보면.
‘전부 내 몸만을 원해.’
처음 중원에 나왔을 땐 어설픈 기대감도 있었다.
도망치듯 부족을 나와 헤어날 수 없는 절망과 끔찍한 고독에 시달렸지만, 숨이 붙어 있는 이상 죽으란 법은 없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사람.
목적지도 설정하지 못한 채 무작정 북쪽을 향해 걸었다.
끝도 없이 펼친 원시림이 끝났을 때, 겨울 달은 한족의 영토에 진입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거지나 다름없는 몰골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었다.
위아래를 훑은 사내는 귀주성이라고 답했고,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냐, 밥은 먹었냐, 묵을 곳은 있냐고 물었다.
성년식을 통과한 몸이다.
야생에서 살아남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나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정보가 필요했고, 호의를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내를 따라갔다.
‘찬은 없지만 이거라도 먹고 푹 쉬시오. 물을 데워 놨으니 몸도 좀 씻고.’
허름한 모옥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성심성의껏 준비한 것들로 호의를 베풀었고,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마워요.’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착각이었을까?
미소를 내비치자 사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먹고, 씻고, 모옥의 구석에 고단한 몸을 누였다.
‘후욱, 후욱…!’
사내가 돌변한 건 한밤중이었다.
인기척이 감지되고, 거친 숨소리가 다가왔다.
단호히 밀어냈지만, 사내는 칼을 빼들었다.
무슨 생각인지, 왜 이러는지 모를 리 없다.
주저하지 않고 목을 꺾었다.
호국영의 목을 휘감았던 그 손으로.
‘어딜 가든 그랬어.’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북상했다.
가는 곳마다 사내들의 호의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건 독을 품은 시커먼 호의였다.
부족의 청년들이 보냈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그들의 관심을 즐기고, 때로는 이용했던 게 미안해졌지만, 그 마음을 되새길 겨를도 없었다.
야생에서 생존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살아남는 데 집중해야 했으니까.
비열하고, 집요하며, 잔인하다.
다른 인간을 망가뜨리고, 집어삼키는 데 망설임이 없다.
겨울 달이 귀주에 들어와 마주친 모든 인간은 그랬다.
맹수들과 싸우는 게 손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족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건 버거웠다.
‘도시. 도시로 가야 해.’
귀주를 넘어 호남까지.
어린 시절의 동경과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번화한 도시를 향해 갔다.
호남의 중심부에 위치한 소양(邵陽)에 진입했을 때다.
‘너, 얼굴이 반반하네. 여기서 일해볼래?’
음식과 잠자리와 술을 권하는 사내들의 추근거림에 익숙해졌을 무렵.
그 속내를 뻔히 알고 진저리치면서도, 그 덕에 겨우겨우 삶을 영위할 때였다.
본색을 드러내면 정중히 거절하고, 도를 넘으면 힘을 사용했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이 제공한 것 이상을 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다른 이의 것을 강제로 빼앗을 순 없었다.
그건 부족에서 배운 가르침이자,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기녀.
웃음과 교태, 때로는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표사, 용병, 군인, 위사 등 무력을 이용해 돈을 버는 직업들에 대해 알았다면 그 길을 택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게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사방이 꽉 막힌 밑바닥에서 구를 때, 운명이 자신에게 드리운 동아줄은 기녀였다.
웃음을 팔았다.
술을 마시고, 구역질을 참으며 아양을 떨었다.
몸을 팔지 않았기에 들어오는 돈은 적었지만, 생활을 영위하기엔 충분한 금액이었다.
재밌는 건 사내들의 반응이었다.
합방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수많은 이들이 줄기차게 찾아왔다.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얻고 잠자리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양 일대의 유흥을 즐기는 내로라하는 사내들이 모두 자신에게 몰려왔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다른 기녀들처럼 몸을 허락하지 않기에 더욱 희소하고 가치가 높아진 모양이었다.
물론 그 근본적인 이유가 외모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오늘 밤, 양 대인의 방에 들어가.’
기루에 속한 기녀들을 관리하는 루주(樓主)의 명령이었다.
길거리에서 헤매던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 들어올 때 말했듯이 그럴 생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말을 듣지 않자 길길이 날뛰며 방자한 년, 은혜도 모르는 년, 야만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운운하는 막말을 늘어놨다.
‘돈 받았나 봐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바닥의 생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루주는 양 대인이란 피둥피둥한 돼지에게 거액의 돈을 받았고, 그의 요구대로 자신을 넘기려는 거였다.
정곡을 찌르자 푸들대던 그녀는 해선 안 될, 하지만 너무나 뻔한 선택을 했다.
‘말을 듣지 않으니 듣게 만들어야겠지. 귀중한 상품이니 흠집 나지 않게 조심히 다뤄.’
기루의 입구를 지키는 사내들이 다가왔다.
혀로 입술을 훔치는 놈들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어? 이 야만인 년이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자신도 결코 깨끗하다 할 수 없지만, 이놈들은 최악의 쓰레기들이다.
기루에서 일하며 수도 없이 보지 않았던가.
자신보다 약한 자에겐 끝없이 잔인해지고, 강자에겐 한없이 비굴해지는 것들.
와족의 기예들을 쓸 것도 없다.
가뿐히 내지른 주먹과 발을 받아내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난 오늘까지만 일할게.’
난장판이 된 루주의 방을 나오며 남긴 말이었다.
힐끗 본 그녀의 얼굴은 경악과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안이했어.’
신중하게 살폈어야 했다.
루주의 눈빛 안에 자리한 분노와 집요함을 읽어냈어야 했다.
그걸 읽지 못한 대가는 컸다.
그날 이후 편히 잠들 수 있는 날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여기다! 동월이 여기 있다!’
덩치 큰 사내들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동월, 맞죠?’
칼 휘두를 힘도 없는 여인이 숨겨주겠다며 다가왔다.
그녀가 건넨 차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누나가 동월이에요?’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소년이 말을 걸었다.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보던 아이는 조심하라며 등을 돌렸다.
겨우 찾아낸 거처에 추격자들이 들이닥쳤다.
가는 곳마다 벽보가 나붙었다.
자신의 초상화와 이름, 악랄한 죄목이 적힌 수배서였다.
위치를 제보하면 얼마, 시체를 가져와도 얼마, 생포하면 앞선 경우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이 적힌 종이에는 ‘양진섭’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양 대인이란 자는 힘깨나 쓰는 관리였던 모양이다.
쫘아악― 쫙!
처음엔 수배서가 보일 때마다 찢었지만, 나중엔 그냥 두었다.
악독한 야만인 계집의 수배서를 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위치만 알려주는 꼴이 되었으니까.
양진섭이란 세 글자에서 기이할 정도의 탐욕과 집착이 읽혔다.
소동(邵東), 상담(湘潭), 주주(株洲)…….
추격은 끝날 줄을 몰랐고, 결국 돈이 떨어졌다.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외모와 이국적인 이목구비.
추격도 추격이지만, 얼굴이 팔려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빼앗자. 날 죽이러 온 자들이야. 이자들의 물건은 빼앗아도 되겠지?’
생존을 위한 타협이었지만, 사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기루에서 일하고, 살인을 했지만 남의 것은 빼앗지 않는다니.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있었지만, 그래도 꺼려지는 일을 능동적으로 하긴 싫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그러긴 싫었다.
‘……무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거다.
자신이 이토록 강하리라고는.
쉴 틈도 없이 추격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마음 한편에 여유가 있던 건 일신에 축적한 힘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추격자들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처음엔 무공을 모르는 파락호들이 동원됐지만, 나중엔 정련된 무인들이 찾아왔다.
자신을 잡아가서 평생 일을 시켜도 이런 무인들을 고용하는 비용을 메꿀까 말까인데 왜 이렇게 집요한 걸까?
그건 비이성적인 집착이자 오기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양진섭이란 자는 돈 하나는 썩어날 만큼 많다는 점이었다.
‘숫자가 많아! 그리고… 강해!’
쓰러뜨린 추격자의 수가 이백을 헤아릴 때였다.
결국은 제대로 덜미가 잡혔다.
그리고 이번에 찾아온 자들은 정말 강한 자들이었다.
‘죽어줄 것 같으냐!’
와족의 비기들이 불을 뿜었다.
운남 최강의 맹독을 자랑하는 흑살사가 적들의 허점을 노렸다.
악전고투.
온몸이 난자되다시피 하며 싸운 끝에 전부 눕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자신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냥 죽어버릴까? 이 상황도, 사람도, 모든 게 지겨워…….’
담벼락에 등을 기댄 겨울 달은 부족을 나온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스윽―
그때, 누군가가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가오는 건 알았지만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가만히 놔둔 자다.
아니, 기진맥진하고 삶의 의욕을 잃는 바람에 저지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겨울 달은 그제야 눈을 들어 상대를 올려다봤다.
“동월, 맞습니까?”
‘지겨워.’
자신을 노리는 모든 이들이 그랬듯 사내는 이름을 물었다.
다부진 체격과 불굴의 강인함이 깃든 얼굴.
선한 눈매가 인상적이었지만, 이제는 외양에 속지 않는다.
돈, 아니면 몸.
이자도 바라는 건 똑같을 테니까.
“저랑 같이 가시죠.”
“그냥 죽여도 돼요. 생포해도 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으니까.”
인간에 대한 불신과 짙은 회의, 걷잡을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겨울 달은 울었다.
사내는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 왔어요. 제 식구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중원에 나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끼는 진심이었다.
“당신… 누군데요?”
사내는 웃었고, 그 미소는 눈부셨다.
“하오문. 이 지역을 담당하는 하오문의 분타주, 백강입니다.”
장사(長沙).
이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유구한 도시에서 사내와 여인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