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 *
“너무 조용한데?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거야?”
관도를 따라 느릿느릿 걷던 마른 비가 여규를 돌아봤다.
그는 지루하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여규가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휴… 비아, 너처럼 신경이 굵은 인간은 처음 봤다. 살막 살수들을 몰살시켜 놓고도 두 발 뻗고 쿨쿨 자다니. 막주가 알면 분해서 피를 토할걸?”
마른 비는 운가 무인들을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갈우영을 비롯한 살막의 정예 살수 팔개 조를 몰살한 것이다.
그들은 객잔에서 쓰러뜨린 설익은 살수들과는 달랐다.
고도로 숙련된 인간 도살자들.
하지만 그들은 마른 비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별비라는 영수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전장으로 삼은 곳이 마른 비와 별비의 힘을 최대치까지 뽑아낼 수 있는 숲이었으니.
별비에게 뒤를 잡힌 시점에서 그들의 몰살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진짜 지독한 놈들이었어. 한 놈 한 놈이 강한 건 둘째치고, 그 독심이라니. 승패가 갈리자마자 한 명도 빠짐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이야. 특히 사편 그놈은 진짜….”
마른 비에게 달려든 살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을 때.
사지가 꿰뚫리고 독환도 깨물 수 없게 된 갈우영은 옆에 있는 돌에 스스로 머리를 내리쳤다.
운가의 무인들이 깜짝 놀라서 달려갔지만, 그의 숨은 끊어진 뒤였다.
“사편은 승리를 확신했던 게 분명해. 만약을 대비해 상황을 보고할 전령도 하나밖에 남겨 두질 않았잖아. 별비가 그자까지 처리했으니 살막은 당분간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 거야.”
운가의 무인들은 뒤처리를 도맡았다.
능숙하게 싸움의 흔적을 지우고 시체를 처리했다.
그리고 마른 비의 허락을 구한 뒤 사편의 성명병기인 채찍을 챙겨 갔다.
“살막은 이번에 비아 너와 엮이며 사편을 빼고도 총 구십 명의 살수를 잃었어. 살수 집단은 특성상 인원을 늘리는 게 쉽지 않아. 아마 그 정도 타격이면 기둥뿌리가 뽑힌 거나 다름없을 거야.”
절호의 기회였다.
적손을 잃은 이상 운가가 가만있을 리 없지만, 살막이 건재했다면 전쟁을 선포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하지만 살막은 간판 살수와 주력 살수 대부분을 잃었다.
운가는 운이령의 복수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게 틀림없었다.
세가로 복귀하는 운가 무인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심중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운가가 이겼으면 좋겠다. 그런 놈들은 봐주면 안 돼!”
마른 비가 핏대를 세우며 운가를 응원했다.
그의 마음속에선 이미 운가와 살막이 한바탕 붙은 모양이었다.
“전면전으로 가면 운가가 질 리가 없어. 살막의 힘이 건재했다 해도 일개 살수 집단이 천북제일세가를 이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살수 집단과 싸우는 건 유령과 싸우는 느낌일 거야. 본거지가 어딘지도, 소속 인원이 누군지도 모르거든. 게다가 자나 깨나 암습을 걱정해야 하지. 그건 정말 피가 마르는 일일 거야.”
정, 사, 마.
모두가 살수 집단을 싫어한다.
하지만 살수들이 박멸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은밀함에 있었다.
운가가 전쟁을 선포한다 해도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였다.
“그렇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고많은 일 중에 왜 하필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을 하는 거야, 그놈들은?”
한참을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마른 비가 여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규야, 너 이리로 가도 돼? 나야 그믐 할아범의 부탁을 받았지만, 굳이 너까지 갈 필요는….”
“아냐. 나도 마침 거기에 들를 일이 있어. 그리고 너랑 같이 돌아다니려고 나온 건데 내가 어딜 가겠냐?”
마른 비와 여규는 서로를 보고 웃은 후 길을 재촉했다.
중원으로 나온 이후 둘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고 있었다.
귀주성을 가로지르는 길은 순조로웠다.
돈을 맡기기 위해 들른 전장을 시작으로, 여규는 마른 비에게 한족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알려주었다.
귀주는 운남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한 소수부족들이 뿌리내린 곳이었고, 그만큼 마른 비를 특이하게 보는 시선도 적었다.
마음 편히 여행을 즐기는 와중에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운가는 살막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막주의 목을 치고 살막의 주춧돌을 뽑을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운가주의 일갈이 중원을 들썩였다.
세가의 적손을 살해한 순간, 운가와 살막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운가주는 살막의 씨를 말릴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규야, 네 말이 맞았어! 진짜 시작했네.”
“쉽지 않을 거야.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겠지. 운가의 가주님이 그걸 모를 리 없어. 운이령을 잃은 분노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일 거야.”
힘든 싸움이었다.
살막의 본거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고, 운가는 항상 암습을 걱정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운가는 사편의 채찍을 확보했고, 그건 그들의 전쟁에 명분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운가는 막대한 현상금을 준비했다.
명분과 실질적 유인.
정사마를 불문하고 살수를 좋아하는 이는 없었고, 돈까지 내걸자 살막에 대한 정보가 쇄도했다.
운가는 그 정보들을 취합하고 짜 맞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곳을 지목했다.
“서안(西安). 섬서성(陝西省)의 성도이자 명승고적이 풍부한 대도시야. 운가는 살막의 본거지가 서안에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아. 운가의 타격대가 서안의 종루(鍾樓)를 들이쳤어.”
“종루?”
“응. 서안의 중심부 대로에 가면 커다란 종이 걸린 누각이 있거든. 루에 오르면 멀리 서역이 보이는 것 같다는 명승지야. 과거에 멀고 먼 비단길로 떠나는 출발지가 서안이었거든. 운가는 살막의 본거지가 종루에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아.”
여기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었다.
마른 비는 중원을 들썩이게 한 사건에 불을 붙여놓고도 소란에서 멀리 떨어진 채 마음 편히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다 왔다. 여기가 호남이야.”
머나먼 섬서에서 운가와 살막이 격돌할 때, 마른 비는 여규와 함께 호남을 밟았다.
삼향일지(三鄕一地).
호남을 일컫는 말이다.
생선, 쌀, 광물의 고향이라 일컬어질 만큼 물산이 풍부한 그곳은 고래로 영웅호걸들이 명멸한 천혜의 땅이었다.
원은 한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전장을 통해 몽골인과 색목인들을 제1, 2의 지배 계급으로 천명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다.
근래 들어 원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강남 일대의 지배력을 상실하자 호남은 더욱 활기를 띠고 있었다.
회화(懷化), 동구(洞口)를 넘어 소양에 이르렀을 때다.
마른 비와 여규는 언제나 그랬듯 시장 거리와 골목을 가장 먼저 찾았고, 그 지역의 특색 있는 음식들을 맛보고 있었다.
만두를 우물거리던 마른 비가 반쯤 찢어진 벽보를 발견했다.
“어?”
왠지 눈길을 끄는 초상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벽보에 그려져 있었다.
‘여자? 어디서 봤지? 저 눈매는 낯이 익은데….’
초상화의 절반이 찢겨 나간 데다 먹으로 윤곽만 그린 그림이라 식별이 어렵지만, 분명히 기억에 남는 얼굴이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갈 때,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아악! 사, 살려 주십시오, 대인!”
피둥피둥 살이 찐 남자가 가마를 타고 있었고, 그와 그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자들이 시장 거리 한복판을 점령하고 있었다.
여인은 그중 한 사내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건물에서 끌려 나오고 있었다.
가마를 탄 남자가 볼살을 푸들대며 말했다.
“거금을 주고 고용한 용병 스물네 명이 전멸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고작 기녀에 불과한 계집이 그만한 무력을 지녔다는 게? 바른 대로 말해라! 그년의 정체가 뭐냐!”
“저, 저도 모릅니다! 대인! 정말입니다! 그냥 얼굴이 반반하기에 길거리에서 주워왔을 뿐이에요! 저희 기루의 사내들도 전부 그년에게 당했습니다! 저도 피해자라고요!”
여인의 말에 뚱뚱한 사내는 더 화가 난 듯했다.
‘안 되겠군.’이라고 중얼거리더니 여인의 머리채를 잡은 사내에게 턱짓을 했다.
짜악! 짝! 짜악!
가혹한 매질이 시작됐다.
여인의 고개가 좌우로 휙휙 돌아가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비명을 지르던 여인은 결국 정신을 잃은 건지 축 처졌다.
하지만 뺨을 때리는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짝! 짜악! 짝!
“저게 뭐 하는…!”
시장 거리 한복판에서 여인에게 이토록 가혹한 처사라니!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저건 잘못된 일이다.
최소한 마른 비가 알기로는 그랬다.
울컥한 그가 앞으로 나설 때, 어깨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안 돼. 비아야.”
여규가 작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마른 비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된다니? 규야, 너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저러다 저 여자 죽을 수도 있어. 저걸 그냥 보고 있자고?”
“빠르게 말할 테니 잘 들어. 첫째, 저 여자, 평범한 사람은 아냐.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기녀들을 관리하는 사람일 거야. 여자들을 팔아서 제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라고. 둘째, 용병이 전멸했다고 했어. 저 둘이 작당하고 어떤 여인을 쫓다가 일이 실패한 거야.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무고한 여인을 폭행하는 게 아냐. 저 여인과 사내는 한배를 탔던 사람이라고.”
말을 쏟아내던 여규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셋째, 저 사람 옷을 봐. 저 뚱뚱한 남자, 원 황실에서 임명한 관리야. 그것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잘못 엮이면 피곤한 정도로 끝나지 않아. 무고한 백성이 피해를 입는 거라면 당연히 도와야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닌 거 같아.”
여규의 말을 들은 마른 비가 주위를 둘러봤다.
혼절한 여인이 여전히 얻어맞고 있지만, 누구도 개입하지 않는다.
개입은커녕 두려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장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랬다.
“나서기엔 상황이 애매해. 조금만 더 지켜보자. 만약 불의한 일이라면 내가 먼저 검을 뽑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은….”
그때, 뚱뚱한 사내가 손을 들더니 구타를 멈추게 했다.
그는 원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된 여인을 보고 화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흐음.”
시장 전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내는 그게 또 흡족한 모양이었다.
전보다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진 걸 보면.
“허흠. 혹시나 본인을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이년은 나를 속이고 내게 막심한 피해를….”
그때, 뚱뚱한 사내는 보았다.
시장거리 한편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두 명의 청년을.
심지어 그중 하나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뭐냐?”
뚱보는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속내가 어떨지는 몰라도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의 말에 즉각 반응한 건 주위에 늘어서 있는 호위무사들이었다.
“이런 방자한 것들이! 감히 지부대인님의 행차를 보고도 허리를 숙이지 않는단 말이냐!”
호위무사들 중 두 명이 호통을 치며 마른 비와 여규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오로지 뚱보를 노려볼 뿐이었다.
“헉!”
마른 비의 눈빛에 움찔한 뚱보, 소양의 지부대인 양진섭이 몸을 떨었다.
그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물러나려다 가마에서 떨어질 뻔했다.
가마가 크게 휘청였고, 가마꾼들은 그를 제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놈이 그래도…! 그 눈 풀고 당장 무릎 꿇지 못할까! 감히 대인을 노려보고도 네놈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호위무사들은 검을 빼들었다.
그때까지도 마른 비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양진섭을 노려보고 있었다.
“……규야. 네 말대로 상황을 알 수는 없어. 저 여자가 정말 나쁜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보는 시장거리 한복판에서 저렇게 패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냐.”
마른 비의 옆모습에서 굳건한 의지를 확인한 여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부대인……. 휴… 그래, 뭐 일성의 총독도 봤었는데 지부대인쯤이야. 미리 말하는데 이건 우리가 벌린 일이야. 일이 커져도 아버지를 내세우진 않을 거야. 알지?”
여규의 왼쪽 가슴에는 봉검대의 문양이 사라져 있었다.
앞으로 나서기 전에 미리 떼어낸 것이다.
“당연하지.”
처음부터 그런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저 여인이 뼛속까지 글러 먹은 인간일지라도,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을 일단 멈춰 세운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아닌 걸 아니라 말하고, 그 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일을 오롯이 감당하겠다.
열여덟, 중원의 한복판에 선 마른 비는 가슴을 폈다.
“이봐. 당신 지금 크게 잘못하고 있는 거야. 당장 그만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