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84화 (184/463)

184화

살얼음판 같은 정적이 내리깔렸다.

고개를 숙였던 이들은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야?’라는 눈으로 마른 비를 쳐다봤다.

호위무사들은 자신이 모욕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미친놈이 감히 대인께! 어디서 튀어나온 야만인인데 이리도 천지 분간을 못 하는 것이냐! 그 목으로 대인께 사죄해라!”

과잉충성이었다.

호위무사들은 마른 비의 목을 따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살기등등하게 다가왔다.

원이 임명한 관리와 그에게 빌붙은 한족의 무인들.

그들의 성향을 가늠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러서… 라고 말해도 듣지 않겠지. 나 이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어떤지 알아. 권력 아니면 힘. 그 둘 중에 하나를 확인해야만 물러설 거지?”

중원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마른 비는 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깨달았다.

어정쩡한 권력과 어설픈 힘을 지닌 자들일수록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더 큰 권력과 더 강한 힘을 보여야만 물러선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슬프게도 마른 비가 본 힘이 있는 한족들의 상당수가 그랬다.

푸화하학―!

그렇다면, 보여주리라.

너희들의 힘으로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막을 수 없다는걸.

덤빌 엄두도 나지 않는 압도적인 힘으로 물러서게 할 것이다.

그게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는 지름길이라는 걸 마른 비는 깨달았다.

쿠구구구―

전력으로 개방한 자연기가 시장 거리 전체를 찍어 누른다.

호남의 중심, 소양.

문명이 만개한 거리에서 운남의 야생을 극복한 전사가 진면목을 드러내니, 도시 전체가 숨을 죽였다.

이 순간, 마른 비는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비, 비아의 힘이 이 정도였어?’

가장 놀란 건 여규다.

중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점창에서 최고를 다투는 재능들을 보아왔다.

항상 겸손해야 하지만, 고르고 고른 사문의 젊은이들 중에서도 공유립과 자신을 능가하는 이는 없었다.

한 살의 나이 차.

마른 비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휴우……. 친구 하길 잘했네.”

여규는 진담 섞인 농담으로 놀라움을 해소했다.

“맙소사…….”

“어, 어떻게 이런…!”

양진섭의 호위무사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원이 임명한 지부대인은 소양의 법이나 다름없었고, 감히 대드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양심과 자존심을 판 대신 얻게 된 달콤한 과실.

양진섭의 옆에 머물며, 그들은 무인의 감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무뎌진 감각으로도 확실히 알겠다.

저 야만인과 붙으면 몰살하는 쪽은 자신들이라는걸.

그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 하고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왕 시작한 거 확실히 하는 게 낫겠지.’

마른 비는 이제 어리고 순진하기만 한 소년이 아니었다.

하늘이 준 천성을 잃지 않되 현실을 깨우치고 그에 발맞춘다.

지금은 감히 눈을 마주칠 엄두도 나지 않게 찍어 누를 때였다.

“별비야.”

투벅, 투벅.

침묵이 내려앉은 시장거리 한복판에 난데없는 맹수가 강림했다.

신기루처럼 나타난 야생의 제왕은 경악과 공포에 찬 인간들의 시선을 즐기며 도도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백호는 정확히 양진섭의 옆에서 멈췄고,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

콰장창창!

가마꾼들이 놓친 가마에서 양진섭이 굴러떨어졌다.

절대적인 포식자 앞에서 발동된 생존 본능.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만, 움직이는 순간 다진 고깃덩이가 되리라.

가마꾼과 호위무사들은 눈동자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크헉! 흡…!”

양진섭은 낙상한 충격에 비명을 질렀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집채만 한 백호가 푸르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 흐흑!”

가눌 길 없는 공포에 집어삼켜진 양진섭은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바지를 적셨다.

“꼭 기억해.”

끔찍한 공포를 가시게 한 건 야만인 청년이었다.

희한하게도 그가 입을 열자 대호가 내뿜는 기세가 한풀 수그러드는 느낌이었다.

기운을 읽지 못하는 범인들조차 그가 백호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이 권력이 있든 힘이 있든 그걸 함부로 남용하지 마. 당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지도 말고. 당신들이 어떤 관계인지 나는 몰라. 궁금하지도 않고. 다만 또 이런 행동을 하면 당신에게 찾아갈 거야. 그땐 날 귀찮게 한 책임을 물을 거고.”

묘한 억양이 섞인 한어.

그러나 누구도 비웃지 못했다.

마른 비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를 천제의 명령인 것처럼 뇌리에 새길 뿐이다.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수왕의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내 말, 알아들어?”

“크, 크흡…!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제발, 제발 이 맹수를 좀…!”

양진섭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에 잠식된 눈동자.

저대로 뒀다가는 정말 미칠지도 모른다.

마른 비는 기세를 거두며 별비를 물렸다.

“당신들.”

“네? 네, 넵!”

혼절한 여인을 챙기고 있던 사내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양진섭과 함께 겨울 달을 잡기 위해 공모했던 루주와 끄나풀들.

마른 비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 그들에겐 천운이었다.

“누굴 쫓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도 그만둬. 기절한 여인부터 시작해서 당신들, 하나같이 느낌이 안 좋아. 아, 이건 내가 과했네. 당신들이 피해자일 수도 있을 텐데. 스스로 생각해서 아니다 싶으면 관둬.”

“네, 넵! 그러겠습니다! 당장 그년, 아, 아니 그녀를 쫓는 걸 그만두겠습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공포 때문일까?

대답은 하고 있지만, 사내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거부하면 당장 백호한테 물려죽을 것 같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마른 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힘을 드러냈네. 이만 가자, 별비야.”

“크르르르….”

마른 비는 별비와 함께 유령처럼 푹 꺼졌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꿈이라도 꾼 것처럼 눈을 비비며 마른 비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시선이 집중되자, 혼자 남은 여규가 당황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어? 비아야? 야! 어디 갔어?! 아씨, 지만 휙 사라지면 어떡해! 나는 그런 거 못 한다고오!”

여규는 마른 비가 사라진 쪽을 향해 황급히 몸을 날렸다.

“야! 너만 할 말 다하고 가버리면 그만이야? 나는 원 황실에 쫓길 각오까지 하고 나선 거라고!”

쭉 뻗은 관도 위.

문물이 발달한 지역이라는 건 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관리가 안 된 구역이 많은 사천, 귀주와 달리 호남의 관도는 하나같이 매끈하고 깔끔하게 닦여 있었다.

그 길 위에서, 여규가 마른 비에게 불평을 토했다.

“미안! 진짜 미안해, 규야. 사람들이 무서워하는데 별비랑 천천히 걸어 나가긴 그렇잖아. 거기서 휙 사라져야 더 멋져 보이기도 하고. 근데 네 생각을 못 했네? 진짜 미안!”

“어후… 됐다, 인마. 너랑 다니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 지부대인이라니. 거기서 쥐어 팼어봐. 진짜 평생을 황실에 쫓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찔하다.

무슨 배짱으로 그 상황에 나섰던 걸까.

여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혼자 있었어도 결국은 나섰을 걸? 뒷사정이 어찌 됐든 길 한복판에서 그게 할 짓이야? 청죽림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글쎄. 난 안 나섰을 거야, 아마. 내가 보긴 그 여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거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며 살아왔을 걸? 그 여자가 맞을 때, 건물에서 나온 기녀들의 눈빛 못 봤지? 그 여자에 대한 두려움과 통쾌함이 공존하고 있었어.”

진정한 협의란 무엇인가.

아마도 본질은 마른 비의 결정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악의가 더 큰 악의에 먹힐지라도 일단은 상대적 약자를 구하고 보는 것.

그 후에 잘잘못을 가리든 교화를 하든 우선은 핍박받는 약자를 구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규는 도움을 줄 상대는 가리고 싶었다.

자신의 희생까지 감수하고 뛰어드는 거라면, 적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구하고 싶었다.

상대를 가리는 게 진정한 협의냐, 그렇다면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냐고 반문하면 할 말은 없다.

사문의 어른들과 서책을 통해 배운 추상적 관념.

세상에 나와 현실을 맞닥뜨린 청년의 고민이 익어가고 있었다.

“그 지부대인이란 사람, 섣부른 짓은 못 하겠지?”

마른 비의 질문이 여규의 상념을 깼다.

잠시 물음을 되새긴 여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럴 거야. 비아, 네가 별비까지 동원해서 뼛속까지 공포심을 새겨 넣었기 때문에 복수는커녕 당분간 일상생활도 못 할걸. 그걸 극복하고 이를 갈 만한 위인은 아니야. 그 여인도 마찬가지고. 그 둘이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아마 그것도 정리가 될 거야.”

“가르릉.”

‘어때? 나 좀 괜찮았냐?’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따르던 별비가 육성으로 그르렁댔다.

그 덩치가 우쭐해한다고 생각하자 마른 비와 여규는 웃음이 터졌다.

“오, 저기 보인다.”

소양에서 관도를 따라 북상한 길.

저 멀리 엄청난 규모의 대도시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강줄기가 도시의 서쪽을 스치듯 지나친다.

고대 삼국, 강동의 호랑이라 불린 손견(孫堅)의 본거지였던 곳.

마른 비와 여규가 호남의 성도인 장사에 도착했다.

“우와아!”

장사에 가까워질수록 마른 비의 탄성은 커졌다.

장대한 강줄기를 끼고 지어진 도시.

성벽과 성곽도 엄청나지만, 그 풍광은 정말 일품이었다.

여규도 강과 인접한 도시는 처음이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 멋지다!”

커다란 선박들이 항구에 줄지어 서 있었다.

인부들이 장강을 통해 실어온 물품들을 나르고, 즉석에서 거래와 교역이 이루어진다.

먼 이국에서 온 색목인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장사는 호남에 위치한 교역의 중심지였고, 그 번화함은 지금까지 거쳐 온 도시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게 배라는 거구나!”

마른 비는 저토록 거대한 선박이 물 위에 뜨고, 엄청난 무게를 실어 나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여규는 자신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부력(浮力)에 대해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활기로 가득 찬 항구와 역동적인 삶의 현장.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이 새끼들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못 잊을 장면은 또 있었다.

배에서 막 내린 물품을 거래하는 장소.

삼십 명에 가까운 사내들과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대치 중이었다.

대여섯 명을 대표하는 듯한 사내가 다른 무리의 사내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런 겁대가리를 상실한 호로 새끼들을 봤나? 한동안 안 맞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지? 아주 그냥 오늘 척추가 흐물흐물하게 녹을 때까지 처 맞고, 그걸로 줄넘기 한 번 해볼래?”

마른 비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여규는 인상을 찌푸렸다.

“……엄청 창의적인 욕이네.”

여규가 중얼거릴 때, 사내는 칼을 빼들었다.

“안 되겠다. 니들 오늘 피똥 좀 싸자. 감을 잃었나 본데, 나 철중구야, 새끼들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