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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85화 (185/463)

185화

스스로를 철중구라 밝힌 사내가 눈을 번뜩이자, 삼십 명에 달하는 사내들이 주춤했다.

“장씨 할배 선박 물품은 우리가 거래하는 걸로 못 박았을 텐데? 이제 와서 딴소리하면 내가 ‘네, 그렇게 하시죠.’ 할 줄 알았냐? 머리통에 뇌 대신 소면을 말아 넣었나. 정신 안 차릴래, 니들?”

철중구가 건들건들 다가가자 삼십 명이 움찔대며 물러났다.

둘러싸이는 것도 아랑곳 않고 상대편 진영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다섯 배가 많은 인원수를 압도하는 투기.

대단한 기세였다.

“와, 저 사람 배짱 좋은데?”

마른 비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사람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욕심들이 많아서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놈의 동네는 정말 쉴 새 없이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싸울 힘이 있고, 스스로의 의지로 싸우는 자들을 말릴 이유는 없었다.

마른 비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철중구라는 사내를 관찰했다.

저벅, 저벅.

그는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앞에 있는 사내를 걷어찼다.

“커헉!”

복부를 얻어맞은 사내가 새우처럼 허리를 꺾었다.

“자, 잠깐! 중구, 일단 내 말을 들어다오! 이건 사정이…!”

뻐어억!

철중구는 입을 연 사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거, 쓸데없는 소리는. 시비 걸러 온 거 아냐? 그럼 칼 뽑고 덤벼. 아니면 그냥 짜지고.”

철중구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사내들을 쭉 훑어봤다.

사나운 기세가 담긴 안광.

그의 눈빛을 받아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길이 열렸다.

맨 뒤에 서 있던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거한이 목을 꺾으며 앞으로 나왔다.

철중구의 기세를 받아넘기는 걸로 보아 그가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호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구신가?”

철중구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이번에 이놈들을 접수한 장귀삼이다. 사정이 있어 조직을 나왔지만, 이래 봬도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 중 하나인 흑수채(黑水寨)에서 선봉을 맡았던….”

“아, 그만. 자기소개는 됐어. 누가 궁금하대?”

철중구는 장귀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물었다.

“결론만 말해. 그냥 갈래? 아니면 뒤지게 맞을래?”

“……건방지다는 말은 들었지만, 듣던 것 이상이군. 이제 스물 중반인 것 같은데, 어린놈이 위아래 모르고 날뛰다가는….”

“하이고~ 아재요~ 싸움을 나이로 합디까? 어디 장강에서 수적질 하다 온 비렁뱅이 새끼가 신성한 장사에 와서 행패야, 행패가? 괜히 깝치다가 뒤지게 처 맞고 울지 말고, 가서 다시 배나 타세요. 이 탈주자 새끼야.”

여규는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평생 들은 욕을 합쳐도 지금 들은 것의 절반에도 못 미치리라.

마른 비는 철중구의 욕설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그의 억양이나 태도가 재밌는 모양이었다.

“머리통에 소면? 머리에 왜 음식을 넣어? 비렁뱅이 새끼! 뒤지게 처 맞는다!”

“안 돼, 비아야! 저런 말 배우지 마! 저런 건 몰라도 돼!”

마치 동생이 나쁜 말을 배워오자 깜짝 놀라서 말리는 형 같다.

마른 비가 욕을 따라 하자 여규는 얼굴을 찌푸리며 철중구를 쳐다봤다.

그는 장귀삼이란 사내와 이마를 맞댈 수 있을 만큼 딱 붙어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 판 벌릴 기센데? 근데 저 자… 싸움의 기본도 모르는 건가? 저 거리면 도를 휘두를 간격이 안 나올 텐데…….’

여규의 생각대로였다.

철중구는 명인이 공들여 만든 듯한 도를 들고 있었는데, 그 길이는 꽤 긴 편이었다.

주먹 하나도 안 들어갈 둘 사이의 간격.

장귀삼은 체형과 신체의 굴곡으로 보아 무기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싸우는 자였다.

그리고 딱 봐도 체계적으로 무공을 수련한 흔적이 엿보였다.

‘저 거리면 철중구란 사람이 무조건 불리해.’

여규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용기가 넘치다 못해 저돌적이란 말은 들었지만, 이건 그냥 멍청한 놈이 아닌가. 이 거리에서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하, 그 새끼, 말 존나게 많네. 이빨 그만 털고 덤벼, 짜샤.”

철중구의 도발이 신호탄이었다.

장귀삼의 눈이 번뜩였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하여튼 무인이란 새끼들은 이게 문제야.”

아무런 사전 동작도 없다.

철중구는 피식 웃더니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이마를 들이받았다.

“커억!”

장귀삼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코를 움켜쥐며 물러났다.

철중구는 킬킬대며 따라붙었다.

“안면 전체가 울리지? 눈물도 찔끔 나오고? 무인이고 나발이고 두들겨 맞으면 신체 반응은 똑같아. 이래서 애들 싸움에서 코 맞으면 진다고 하는 거다.”

투로고 뭐고 없다.

철중구는 장귀삼의 복부를 그냥 냅다 찼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

아니면 갑작스런 충격에 몸이 경직돼서?

여규는 체계적으로 체술을 수련한 듯한 장귀삼이 저런 막무가내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컥!”

장귀삼이 이번엔 배를 움켜쥐며 물러났다.

“그놈, 몸 하나는 겁나 튼튼하네. 자, 이번엔 어디를 때려볼까?”

저럴 거면 도는 왜 들고 있는 걸까?

철중구는 도를 쓰지도 않았다.

그냥 저벅저벅 걸어가서 또다시 상대의 간격으로 들어섰다.

울컥한 장귀삼이 자세를 잡고 주먹을 뻗었다.

“카아압!”

“카아압은 뭔 카아압. 소리 지르면 누가 맞아준대?”

상체가 뒤로 꺾이고, 무릎이 올라온다.

철중구의 무릎은 장귀삼의 정권에 딱 맞춰서 솟구쳤다.

무릎에 맞은 주먹이 하늘로 튕겨나가고, 활짝 열린 장귀삼의 가슴팍에 철중구의 돌려차기가 꽂혔다.

장귀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선봉 어쩌고 하지 않았냐? 뭐가 이렇게 약해?”

철중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장귀삼은 두들겨 맞은 통증보다 어이없이 밀린 게 충격인 듯했다.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으니까.

“마, 말도 안 돼! 이런 기본도 안 된 마구잡이 공격에…! 어떻게, 어떻게 이런…!”

“말 돼. 아, 너무 낙심하진 말고. 너만 그런 게 아니니까. 이 몸과 붙은 놈들은 다 그래. 내가 졸라 강해서 그런 거니까 졌다고 어디 구석에 짱 박혀서 질질 짜지 마라.”

건방지지만, 확실한 실력이 뒷받침된 오만이었다.

몇 수를 더 보고 나서야 여규의 생각도 바뀌었다.

‘저 사람, 강해! 고련을 거듭해서 몸에 붙인 투로가 아니야. 임기응변에 가까운 동물적인 반응! 저건 마치…!’

여규가 옆을 돌아봤다.

마른 비는 철중구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우리 부족이랑 비슷해. 정말 재밌는데, 저 사람?”

와족엔 초식의 개념이 없다.

자연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예들이 존재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타성 기술일 뿐이다.

적을 제압하고, 기술을 명중시키기 위한 싸움법은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과 자질에 의존하며, 무수한 실전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움직임을 체득하는 것이다.

반면 중원의 무인들은 선조들이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수천, 수만 번 다듬은 투로를 먼저 몸에 익힌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쳐낼 수 있는 경지가 되었을 때, 응용과 실전 적용에 들어간다.

장단점이 있지만, 와족의 단련법을 중원의 문파들이 채택하기 어렵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릴 때부터 야생을 누비며 얻은 동물적인 감각과 타고난 육체.

구성원 대부분이 그런 쪽에 특화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와족과 같은 단련법은 적합하지 못한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타고난 인간은 어떤 방식을 취하든 강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규가 보기에 저 철중구란 인간은 분명히 재능을 타고난 쪽이었다.

묘하게도 인정하기가 싫지만.

“카하하하! 이제 좀 알겠냐? 안 된다고 했지? 까불지 말라 이거야!”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거, 이상하게 얄밉네. 저 인간.’

여규가 어떻게 생각하건, 장귀삼을 눕힌 철중구는 마음껏 거드름을 피우며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내 걸 건드리지만 않으면 싸울 일 없다. 상납이니 뭐니 그런 거 안 키우니까 네 몫 뺏길 일도 없어. 대신 너도 그딴 짓 하지 마라. 수적질하던 버릇 못 버리고 여기서 분란 일으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끼게 해줄 테니까.”

철중구가 장귀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장귀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날 살려주는 건가?”

“왜? 세상 하직하고 싶어? 원하면 그렇게 해주고.”

“내가 네 뒤통수를 치면 어쩌려고 그러지? 뭘 믿고 살려주는 거냐?”

“뭘 믿긴. 날 믿는 거지. 너 따위는 선박째로 몰려와도 날 어쩌지 못해. 못 믿겠으면 가서 총채주라도 데려오던가.”

“끄응….”

장귀삼은 작게 신음했다.

직접 붙어본 결과, 철중구가 강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의 총채주에 비할 순 없다.

나이도 나이거니와, 그는 그야말로 장강의 지배자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 적은 없을지라도, 철중구도 자신이 총채주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진 않을 터다.

허나 꿀리지 않는다.

끝을 모를 자신감.

이놈은 정말로 총채주가 앞에 있어도 서슴없이 칼을 뽑을 놈이었다.

“어이가 없군. 너 같은 놈이 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장귀삼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알려지지 않다니? 이게 뒤질라고! 장사에서 날 모르는 놈은 없어! 내가 바로 장사 뒷골목을 평정한 쾌남, 철중구라 이거야!”

그래. 그게 어이가 없는 거다.

지금 당장 연맹에 들어가도 채주급의 대우를 받을 만한 놈이 이런 데서 썩고 있다니.

흑수채를 나와 장사에 입성할 때만 해도 가볍게 길거리를 장악할 줄 알았다.

그리고 적당한 보호비와 상납을 받으며 조용히 살려고 했다.

이런 쪽의 생리는 빠삭하지 않나.

오자마자 마주친 건달패 하나를 흡수했다.

그리고 구역이 어디냐고 물었다.

한데 돌아온 답변이 황당했다.

장사에는 그런 것 없다고.

무슨 사업을 벌이건 상관은 없지만, 상인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순간 개박살이 난다고.

그리고 그 원흉으로 지목한 게 이 철중구란 놈이었다.

‘기방, 도박장, 주루. 뭐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직접 번 돈으로 먹고살아야 하죠. 보호비나 상납 운운한 놈치고 목숨 부지한 놈이 없습니다.’

‘가장 큰돈이 되는 건 장강을 타고 온 물품을 받아서 파는 겁니다. 구역이 없는 대신 주거래 선박들이 존재하죠. 철중구는 그것조차 독점하지 않습니다. 큼직한 선박 두세 개를 차지했을 뿐이죠. 그것만 침범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건달이란 놈들이 교역과 장사를 하고 있다니.

이건 그냥 건실한 상인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물론 대형 선박이나 목이 좋은 사업장을 차지하기 위해 건달패끼리 칼부림도 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문제다.

놀랍게도 철중구란 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건달패와 상인들의 밀착을 철저하게 분리한 모양이었다.

‘별 웃기지도 않는 꼴을 보는군. 가자. 그 철중구란 놈한테.’

장귀삼은 끝까지 주저하는 사내들을 몇 대 쥐어박고서야 철중구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줘터지고 이 모양 이 꼴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조용히 살어. 이 동네 분위기는 네 식구들한테 물어보고. 담에 볼 때는 술 한 잔 하자고.”

철중구는 장귀삼의 머리통을 탁탁 내려치더니 정박 중인 선박에 올랐다.

그 위에서는 선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장죽을 입에 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끝났냐?”

노인이 연기를 길게 뱉으며 물었다.

“엉. 할배, 먼 곳까지 다녀오느라 고생했수. 물건은 안 봐도 될 테니까 돈이나 맞는지 세어보슈.”

철중구를 따라온 사내가 노인에게 전낭을 건넸다.

손을 휘휘 젓던 노인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전낭을 받고, 그 안에서 한 움큼의 은자를 꺼냈다.

“세어 볼 필요도 없이 맞겠지. 보나 마나 더 들었을 거고. 가져가라. 가서 애들 술이나 사줘.”

철중구는 섭섭한 소리하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 영감탱이가 노망이 들었나? 할배한테 받은 게 얼만데 그런 소릴 하는 거요? 나 할배 덕에 돈 많이 버니까 넣어두쇼. 담에도 좋은 물건 부탁하고.”

“이놈 새끼야. 주면 가끔은 못 이기는 척 좀 받아라. 어린놈이 쓸데없이 겉멋만 들어서는.”

“아, 됐소. 할배나 그걸로 배때기에 기름칠 하고 오래오래 사쇼. 그럼 나 가오.”

철중구는 휙 돌아서 선박을 내려가더니 저잣거리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눈빛을 빛내며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마른 비가 말했다.

“규야. 저 사람, 따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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