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86화 (186/463)

186화

“따라가자고? 왜?”

여규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궁금해서. 재밌을 거 같아, 저 사람.”

마른 비의 시선은 저 멀리 걸어가는 철중구의 등에 고정돼 있었다.

‘이런…….’

저 반짝이는 눈빛을 보라.

비아의 호기심이 발동됐다.

자신 때문에 참고 있을 뿐, 몸이 들썩이는 걸로 보아 마음은 이미 철중구에게 따라붙었다.

길게 한숨을 쉰 여규가 고개를 저었다.

“휴… 널 무슨 수로 말리겠냐. 그래. 가자, 가.”

“여어~ 중구! 잠은 잘 잤나?”

“이놈아. 이거 새로 들어온 과일인데 동생들이랑 나눠 먹어라.”

“중구 형! 저 형이 알려준 발차기 연습했어요! 봐요!”

장사에서 자신을 모르는 이는 없다고 했던가?

철중구는 그의 말대로 유명인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상인들의 인사가 쏟아진다.

심지어 골목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마저 와~ 하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얼굴엔 진심 어린 호감이 깃들어 있었다.

“놀라운데?”

여규는 정말 의외란 얼굴이었다.

밤거리와 뒷골목을 주름잡는 건달패들.

대리에서도 점창의 눈을 피해 착취를 일삼는 자들이 있었고, 그건 근절할 수 없는 종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폭력과 두려움을 무기로 약자들 위에 군림한다.

겉모습만 보면 철중구는 건달의 표본 자체인데, 하는 행동은 시장 거리를 지키는 자경대와 같았다.

건달이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남자.

보면 볼수록 특이한 인간이었다.

“카하핫! 뭐 대단한 사람 왔다고!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해! 아, 거 할매! 내가 아직도 네 살배기 애인 줄 아쇼? 당과를 주면 좋아할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건네받은 당과를 입에 문다.

보도(寶刀)를 어깨에 걸치고 건들대며 걷는 걸음걸이와 한쪽 손에 든 당과는 참으로 안 어울렸다.

마른 비는 보면 볼수록 웃긴다는 듯 킥킥댔다.

“나 저 사람 마음에 들어. 보고만 있어도 웃겨.”

마른 비는 철중구에게 홀랑 빠진 모양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여규가 보기에도 자유분방한 마른 비와 격식 따위 안중에도 없는 철중구는 궁합이 잘 맞아 보였으니까.

딱 봐도 사파로 분류하는 게 적절한 인물이지만, 고리타분한 정파의 인물들보다 훨씬 민초들의 삶에 가깝다.

욕을 달고 사는 것과 행동거지만 빼면 여규도 호감이 든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거칠어. 그리고 상인들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명분이나 이타심, 인간의 도리 따윈 등한시하고 철저히 실리와 이익에 집중하는 게 사파의 인물들이라고 들었다.

그들 중에도 나름의 신념과 도를 지키는 자들이 있지만, 정과 사를 가르는 기준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에 더 비중을 두는가에 달려 있다고 배웠다.

여규가 보기에 철중구를 움직이는 근간은 자신의 이익이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 사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껄렁대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선장과 상인들을 대하는 태도엔 배려와 애정이 묻어 있다.

그 증거로, 철중구는 장사의 민중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살아가는 세계와 방식은 다르지만, 저것도 협의의 또 다른 표출이 아닐까?

소양에서 시작된 여규의 고민이 한층 깊어지고 있었다.

반면 마른 비는 철중구가 마냥 신기하고 웃길 뿐이었다.

“큭큭. 저 사람, 지나가던 사람과 인사하더니 갑자기 술 마시기 시작했어. 어? 의자에 누웠다. 저기서 그냥 자는 거야?”

‘낮술에다가, 영업하는 객잔에서 누워 잔다고?’

몇 가지 단면만 보고 저 인간을 너무 높게 평가한 모양이다.

성실함과 담을 쌓은 건 둘째치고, 저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행위가 아닌가.

‘한량이네. 저건 그냥 놀고먹는 한량일 뿐이야.’

철중구는 여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여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어? 움직인다!”

객잔 한가운데서 코까지 골며 늘어지게 잔 철중구는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배를 벅벅 긁으며 하품을 하더니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마른 비와 여규는 멀찍이서 그를 뒤따랐지만, 결국은 놓치고 말았다.

철중구가 항구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다섯 명을 데리고 으리으리한 장원으로 쑥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아…! 계속 보고 싶은데, 아쉽다!”

마른 비는 안타까움 섞인 탄식을 흘렸다.

여규는 이쯤에서 그친 게 다행이라고 여기며 마른 비에게 말했다.

“비아야. 우리도 이제 할 일을 해야지. 가자. 너희 부족의 어른이 계신 곳으로.”

“여기가 맞나?”

금복인이 그믐에게 건넸다는 지도.

장사의 동쪽으로 치우친 그곳은 허름하다 못해 쓰러지기 직전의 폐가였다.

아니,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밥을 짓는 중이고, 그렇다면 사람이 산다는 뜻이다,

허나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하고, 방문은 두 개 중 하나가 뜯겨나가 바람이 숭숭 들이치고 있었다.

사람이 거주한다고 보기 힘든 환경이었다.

마른 비는 이런 곳에 그믐의 아들이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들어가 보자.”

철중구를 보며 즐거워했던 마른 비는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리까지 자란 잡초를 헤치며 처마 아래까지 다가간 마른 비가 입을 열었다.

“계세요?”

희미하게 전해지는 인기척.

방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가 방문한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집주인은 한동안 머뭇거리며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뉘, 뉘시오?”

“와족의 마른 비예요. 그믐 할아범의 부탁을 받고 왔어요. ‘가을 수리’ 아저씨가 맞아요?”

정적이 흘렀다.

무척이나 당황한 듯한 기색이 공기를 타고 전해진다.

조금 기다리니,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와족이라고?”

“네. 청죽림에서 온 마른 비예요. 족장 너른 하늘의 아들이고, 부족을 나와 여행 중입니다.”

‘비아가 존댓말을?’

여규는 굉장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른 비가 누군가에게 말을 높이는 걸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봉검, 운검 장로에게조차 평대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런 마른 비도 부족의 어른들에게는 존대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는 왜? 중원의 예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건가? 아무튼… 처음 들어서 그런가, 진짜 어색하네.’

여규가 이채로운 시선으로 마른 비를 볼 때,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른 하늘? 그리운 이름이군. 역시 형님께서 족장에 오르셨구나.”

덜컹-

두 짝 중 한 짝밖에 없어서 허전해 보이는 문을 열고, 중년의 사내가 나왔다.

마른 비는 처음 집 앞에 섰을 때와는 달리 차분하게 답했다.

“네. 굉장히 오래전에요.”

“그렇군. 눈깔이나 우둔한 녀석이 뛰어나긴 해도 형님에겐 안 됐겠지. 그분은 어릴 적부터 괴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네가 형님의 아들이구나.”

사내의 눈빛은 격동한 듯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규는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

외양에 먼저 시선이 갔기 때문이다.

‘이 사람… 괜찮은 건가?’

사내는 너무도 초췌했다.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지 눈이 벌겋게 충혈 돼 있었다.

관리가 안 된 집만큼이나 그의 겉모습은 엉망이었다.

‘이 남자가… 그 회효 장로님의 아들?’

여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내를 살폈다.

그 얼굴엔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그런 분에게서 이런 아들이….’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며, 그믐은 와족 전사들뿐만 아니라 점창의 무인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공지량과 칠검을 홀로 압도한 남자.

그 하나만으로도 봉검과 운검, 두 명의 대장로보다 강한 건 당연하다.

점창에서 평가하는 그믐은 여휘와도 자웅을 겨뤄볼 만한 초인이었다.

‘무를 수련하긴 했어. 하지만 경지가 낮아. 싸우면 내가 이길 거야.’

힘은 둘째치고, 이 남자에게선 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패기는커녕 마른 비를 관찰하는 눈동자는 무언가에 위축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열등감에 시달린 흔적이다.

여규는 자신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남자가 그 귀신같은 그믐의 아들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보냈다고 했느냐?”

부족의 아이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걸까?

사내는 억지로 가슴을 펴고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여규는 그 허세가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실망스러운 만남이었다.

“네. 미안하다고,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수리의 눈 수장 자리를 넘기는 대로 찾아오겠다고 하셨고요.”

여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마른 비의 반응이었다.

자신이 이럴진대 그의 실망은 더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마른 비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태연했다.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그게 사실이냐?”

사내의 눈이 크게 떨렸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조금 전까지 눈빛이 흔들렸던 이유와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여규는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겠거니 짐작하고 모른 척 다른 곳을 쳐다봤다.

“네.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걸 전해드리러 왔고요.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서 너무 슬프지만… 할멈께서 전쟁 중에 돌아가셨어요.”

“뭐라고? 어, 어머님께서?!”

사내는 화들짝 놀랐고, 여규는 심중을 굳혔다.

‘뭘 하고 지낸 건지는 몰라도 이 꼴로 살며 부모에게도 연락 한 번 안 했단 거잖아?’

여규가 마른 비를 돌아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비아야. 안타깝지만 이 사람은 네가 공경할 만한 사람이 아냐. 어떡하냐. 그렇게 만나길 고대했는데….’

여규가 안쓰러운 눈으로 마른 비를 볼 때, 사내는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지.”

사내는 눈물을 참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며 마른 비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들려다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안으로 들어오너라.”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게 언제인지도 모를 방에서, 마른 비는 가을 수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청죽림을 떠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이십여 년의 일들을 간추려 중요한 일들만 전했다.

조용히 듣던 그는 잎의 노래가 눈을 감은 부분에서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아저씨.”

한참 눈물을 쏟던 그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고개를 들었다.

“고맙구나. 내가 못난 탓에 어머님의 임종도 지키질 못했어. 너를 보기 부끄럽구나.”

“아니에요. 근데… 생활이 많이 어려우신가 봐요?”

마른 비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여규는 마른 비를 힐끔거렸다.

‘아냐. 비아야. 이건 궁핍의 문제가 아냐. 이 사람은 그냥 게으른 거야. 상황을 개선할 의지가 없는 거라고!’

여규가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만큼 방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정리정돈이 안 된 건 차치하고서라도 마른 비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악취가 진동을 했다.

구석에 쌓인 쓰레기와 먹다 남긴 음식물들이 썩으며 나는 냄새였다.

‘개방의 거지들도 이 정도는 아닐 거야.’

여규는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그때, 가을 수리가 마른 비의 질문에 답했다.

“생활……. 어렵지. 어렵고말고. 너는 상상하기 힘들 거다. 중원에서 우리 같은 변방의 소수부족이 자리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짐작해요. 고생이 많으셨나 보네요.”

마른 비는 따뜻하게 답했지만,

‘웃기시네. 원의 시대가 열리고 소수부족에 대한 처우는 전보다 나아졌어. 그전에도 성공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고! 당신은 그냥 게으른 거야!’

여규는 속으로 냉소했다.

그때, 마른 비가 여규의 복장을 터지게 하는 행동을 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생활에 보태 쓰세요. 저는 좀 더 있어요.”

마른 비가 전장에 맡긴 돈을 제외한 전부를 꺼내놓은 것이다.

가을 수리는 눈을 빛내더니 사양 한 번 않고 전낭을 품에 넣었다.

“고맙구나. 내가 사양할 형편은 못 되지. 요긴하게 쓰도록 하마.”

‘부끄러움도 없는 거야? 이제 막 중원에 나온 아들뻘의 아이를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밥 한 끼, 차 한 잔 내오지도 않고 그걸 챙길 생각이 들어?’

보면 볼수록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여규는 더 이상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고, 여규는 결국 소리를 버럭 지르고야 말았다.

“열여덟이라고 했지? 그럼 성년식을 통과했겠구나, 비아야.”

“네. 그럼요. 당연하죠.”

“좋아. 훌륭해. 성년식을 통과한 와족의 전사들은 강하지. 중원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수준이야.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

“도와달라뇨? 어떤….”

마른 비가 의아해하는 눈길로 가을 수리를 바라봤다.

그가 품속의 전낭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곳, 장사에는 목돈을 챙길 수 있는 방법들이 몇 개 있단다. 그중에는 무력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있지. 네가 날 한 번만 도와주면 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제가 뭘 하면 되죠?”

가을 수리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하게 올라갔다.

“야투(夜鬪). 밤마다 열리는 싸움 경기가 있다. 진정한 사나이들이 출전하여 힘을 겨루는 곳이지. 네가 거기에 출전하면 어떨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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