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당신, 미친 거 아니야?!”
여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질렀다.
“진정한 사나이 좋아하네! 방금 야투라고 했지?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그거 투기장이잖아! 비아보고 거기에 나가라고? 부족의 어른이라면서 그게 할 소리야?!”
여규는 진심으로 화를 내며 씩씩댔다.
그리고 마른 비가 수락할까 봐 황급히 말했다.
“절대 안 돼! 거절해, 비아야! 이 사람, 제정신이 아니야! 너를 끌어들여서 도박을 하려는 거라고!”
여규가 경멸 어린 눈으로 가을 수리를 노려봤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거부감이 드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외양만 보고 편견을 가졌고, 엉망인 집구석을 보고 비웃었으며, 부모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점과 돈을 넙죽 받는 걸 보고 상종 못 할 인간이라 판단했다.
허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나친 반응이다.
여규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의아함을 느꼈고, 스스로를 다독이려 했지만, 마지막 한마디에 그 노력을 놔버렸다.
‘역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비아가 이 만남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봐왔고, 저 그믐의 아들이라기에 실망이 더 컸던 걸까도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다.
이자는 그냥 글러 먹은 거였다.
확신을 가지게 된 여규는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냈지만, 가을 수리는 여규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 신경 쓰지 않고 마른 비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 비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을 수리와 조용히 눈을 맞췄다.
“네가 결정할 문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뭐야, 갑자기 저 차분한 태도는?’
가을 수리는 처음 봤을 때처럼 불안해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마른 비의 답변을 기다릴 뿐이다.
그의 얼굴엔 앞서 보였던 불안정함과 초조함이 걷혀 있었다.
‘뭐지? 대체 뭐야, 이 인간? 종잡을 수가 없네.’
혼란스러워진 여규가 마른 비에게 눈을 돌렸다.
마른 비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가을 수리의 눈을 관찰하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는 무슨 생각인지 여규의 만류를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저씨. 그렇게 할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왜 수락한 거야? 지금이라도 취소해, 비아야! 널 이용하려는 거라고!”
가을 수리의 집에서 나와 객잔으로 향하는 길.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여규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심정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마른 비는 태연하기만 했다.
“걱정 마. 아마 괜찮을 거야.”
“괜찮다니? 그걸 어떻게 장담해? 너 야투가 뭔지 모르지? 그건 호광성에서 가장 큰돈이 오가는 싸움판이야. 엄청 위험한 곳이라고!”
여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쳤다.
그 반응에도, 마른 비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래? 하긴 그 정도 되니까 힘든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고 한 거겠지? 그럼 아저씨는 내게 돈을 걸려는 걸까?”
“그걸 말이라고…!”
여규는 아연한 표정이었다.
마른 비는 그것조차 못 본 척하고 물었다.
“야투라……. 돈을 걸고 싸움을 벌인단 말이지? 투기장? 중원에는 그런 게 많아?”
“하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여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투기장이 많냐고? 많아. 많을 수밖에 없지. 그건 일종의 배출구거든.”
“배출구?”
“그래. 원 황실은 병장기 금지령까지 내려서 한족이 힘을 키우는 걸 억압해왔어. 하지만 지나친 억압은 반발을 낳지. 생각해봐. 중원에는 해변의 모래알만큼이나 무인이 많아. 그들이 죽어라 수련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
“당연하지. 힘은 입신양명의 수단이야. 중원에선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그랬어. 특히 무림의 세계에선 말할 것도 없지. 무공이 강한 자는 우러름을 받고, 높은 지위나 큰돈을 얻을 수 있어. 한데 그 길이 막힌 거야. 당연히 불만이 쌓이지 않겠어?”
와족이 단련을 하는 건 야생에서 살아남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지금 여규가 말하는 접근은 마른 비로서는 생소한 발상일 수밖에 없었다.
“원 황실은 영리해. 그들이 단순히 힘만 셌다면, 백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원을 통치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 말라고 해도 한족의 무인들이 어디선가 무공을 수련하고, 힘을 키우는 걸 알아. 밥 먹듯이 싸움을 벌이는 것도. 하지만 그걸 전부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지. 그래서 그들은 합법적으로 욕망을 발산할 기회를 제공했어. 적절한 보상과 함께.”
황실 비무 대회.
카안이 공인하는 출세의 기회이자 이름을 떨칠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모든 불만을 잠재우는 건 불가능하다.
황실의 승인 하에 민간에서 주최하는 비무 대회들이 생겨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투기장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황실은 그조차도 모른 척했다.
투기장은 돈과 힘이 결탁된 온갖 세력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동시에 양지에 나서길 꺼리는 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비무 대회도 그렇지만, 투기장에선 병장기를 대놓고 사용하는 게 가능해.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거지. 심지어 지역에 따라 유흥의 하나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고. 호남의 야투가 그 대표적인 경우야.”
힘과 돈이 어우러진 욕망의 분출구.
여규는 기억 한편에 저장해놓은 이야기들을 샅샅이 꺼내 놨다.
그 이야기에 집중하던 마른 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복잡하네.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 그럼 그 야투라는 곳에는 강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겠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일단 도박이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곳이라서 정파의 인물들은 출전을 꺼려. 깔끔하게 무를 겨루는 비무 대회가 있는데 굳이 야투에 나올 이유가 없지.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이름을 날리고 싶은 사파의 고수들이 야투를 선호한다고 들었어.”
거기까지 말한 여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그것도 애매한 게… 야투에는 엄청난 돈이 걸리기 때문에 온갖 지저분한 일들이 벌어지거든. 투기장 중에서도 가장 난잡하고 음험하기로 유명한 곳이 야투야. 그러다 보니 고수의 출현 빈도도 들쭉날쭉해.”
“위험해서 사파의 인물들조차 출전을 고심한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거야?”
“응. 대충 그렇게 보면 맞을 거야. 간혹 엄청난 고수들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평상시의 야투는 처절하긴 해도 수준이 그렇게 높진 않다고 들었어.”
“흠. 가을 수리 아저씨는 나보고 그런 곳에 나가라는 거야? 하하! 날 굉장히 믿나 보네.”
마른 비의 말에 여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돼? 그 사람은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널 이용해서 돈을 벌고 싶은 거라니까?”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줄기차게 이어지는 여규의 걱정에도 마른 비는 웃기만 했다.
한숨을 푹 쉬던 여규는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응? 왜? 뭔가 생각났어?”
“……엄청 유명한 고수가 있었어. 야투를 통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여규는 ‘왜 그걸 이제야 떠올렸을까.’라는 얼굴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패군. 오로지 무력 하나로 사도련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자 십좌의 수위를 다투는 무인. 그가 바로 야투가 낳은 가장 유명한 사람이야.”
“너 진짜 나갈 거야?”
마른 비와 여규는 객잔에 방 하나를 잡고 쉬고 있었다.
그리고 여규는 가을 수리의 집을 나온 이후 이 말을 오십 번도 더 했다.
마른 비 또한 그 횟수만큼 똑같은 말을 반복 중이었다.
“응. 나갈 거야.”
“……환장하겠네.”
여규가 침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유라도 말해주면 안 돼? 네가 바보도 아니고, 그 사람의 의도를 모를 리 없잖아. 왜 이렇게 완고한 거야?”
여규의 물음에 마른 비는 미안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감일 뿐이거든. 아저씨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뭐라 할 말이 없네.”
“감이라. 네 느낌이 빗나간 적이 없는 건 아는데 이번에는……. 일단 난 그 사람이 무지하게 싫어.”
여규의 말에 마른 비가 자못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음. 규야. 그거 말인데, 내가 보기에는….”
“……?”
마른 비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것도 평소의 마른 비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휴우… 그 사람을 만난 이후로 둘 다 뭔가 이상하네. 어쨌든 비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네 직감을 믿자.”
여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그럼 나가는 걸로 결정된 거네. 그 사람은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어. 출전 신청을 한다고.”
“응, 그랬지.”
“근데 그거,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그게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여규는 답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야투는 형식이나 조건이 무척이나 자유로운 편이야. 매일 밤 싸움이 벌어지고,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아무 때나 출전할 수 있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단 뜻이야.”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한 여규가 찬찬히 말했다.
“가보자. 오늘 밤에. 직접 보고 판단하는 거야. 그 사람, 돈을 벌고 싶다고 했지? 가서 보고, 해볼 만하다 싶으면 오늘 출전해. 내가 가진 돈을 전부 네게 걸게. 그래서 돈을 따고, 그걸 그 사람에게 주는 거야. 그걸로 끝. 무슨 속셈인지도 모를 장단에 일일이 맞춰 줄 필요 없어.”
“음… 그건 좀…….”
마른 비가 뭐라 말을 꺼냈지만, 여규는 단호했다.
“안 돼. 날 걱정시키고 고집을 피운 대신 너도 그 정도는 양보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마냥 끌려다니기만 할 순 없어.”
여규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 마른 비를 재촉했다.
“지금 당장 가자. 야투는 워낙 유명해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장소를 알 수 있을 거야.”
* * *
“꿀꺽, 꿀꺽. 커어~!”
어둠이 깔린 관도.
사내 한 명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사내의 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고, 그는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술을 들이켰다.
이미 상당히 마셨는지 몸을 가누지도 못했는데, 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행인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거리를 뒀다.
간혹 가깝게 지나치는 이들은 지독한 냄새에 코를 막으며 욕을 해댔다.
가을 수리는 만취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니들이 뭘 알아? 으엉? 내 고충을… 내 인생을… 끄윽! 뭣 같은 세상! 다 죽어 버려라!”
그때였다.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그의 옆을 지나쳤다.
한 발짝만 기울었어도 치일 뻔한 거리였다.
기겁한 가을 수리가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며 넘어졌다.
들고 있던 술병이 와장창 깨지며 그의 옷이 술에 젖었다.
“저런 병신!”
“꼴좋다! 한심한 놈!”
“확 쳐버려도 돼. 저런 놈은!”
행인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가을 수리를 비웃었다.
한 명쯤은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할 만한데, 모두가 경멸과 조롱, 멸시를 보냈다.
사람이 죽을 뻔한 순간인 걸 감안하면 과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가을 수리도 그들에게 욕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덜컹―
하나 남아서 초라한 방문을 열고, 가을 수리가 방 안에 들어섰다.
쓰레기 가득한 벽면에 기댄 그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쿠울―.”
한 식경쯤 지났을까.
코를 골며 자던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어둠이 가득한 방 안과 휑한 문밖을 살피는 눈엔 취기 따윈 사라져 있었다.
스윽―
그가 소매에서 여러 번 접은 쪽지를 꺼냈다.
마차와 교차하며 넘어졌던 그때, 마부에게 건네받은 쪽지였다.
야밤의 사냥을 위해 고안된 와족의 밤눈이 빛을 끌어모았고, 가을 수리는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드디어! 그가 움직이기로 마음먹은 건가!’
내용을 확인한 가을 수리는 쪽지를 구기려 했다.
평소처럼 입에 넣고 씹어 삼킬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다가 그는 맨 아래 조그맣게 덧붙인 내용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건 오늘 낮, 아주 오랜만에 그에게 기쁨을 준 청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이런! 비아 이 녀석, 일주일이라고 했는데 왜 벌써 야투에?’
가을 수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