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야투
《“으엉? 그놈 이야기는 갑자기 왜?”
비린내 물씬 나는 항구의 노점 평상.
방만하게 걸터앉아 술을 들이켜던 사내가 인상을 썼다.
나는 그의 앞에 마주 앉아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왜겠소. 궁금하니까 묻는 거겠지.”
내 말투가 거슬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멋대로 앉아 술을 따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사내 뒤에 있는 호위무사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막상 질문을 받은 사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비아 그놈 이야기 들을 데는 많잖아? 천방지축으로 사고치고 돌아다니는데. 굳이 나한테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나? 아니, 그전에 그런 거 묻고 돌아다니는 거 귀찮지 않아? 당신, 안 그래 뵈는데 더럽게 할 일 없는 모양이네?”
말투부터 내용까지, 초면에 이러는 건 무례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직설적이고 허심탄회한 태도가 개인적으로 훨씬 마음에 든다.
쓸데없는 격식이나 의중을 떠보는 행위 때문에 피곤할 일이 없으니까.
세상 점잖은 척은 혼자 다 하다가 다짜고짜 선빵을 날리는 당문휘 같은 놈보다는 백배 천배 낫지 않은가.
“당신 말처럼 수왕과 연이 닿은 이들은 많소. 허나 기록에 남길 만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더군.”
찰랑이는 술잔을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할 일이 없다라……. 그럴 리가. 뭐, 솔직히 말하면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 나도 귀찮소. 월주께서 시키니까 하는 일이지. 한데 이런 데 퍼질러 앉아 낮술을 들이키는 사람한테 들을 소린 아닌 것 같소만?”
“뭐라고? 이 건방진 새끼가 감히 대주님께!”
차아앙!
호위무사인 줄 알았던 사내들이 검을 뽑았다.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한마디해줬다.
“칼 집어넣어라. 아무 데서나 칼 뽑다가 니들 목이 뽑히는 수가 있어.”
“이, 이 새끼가 어디서 으름장을…!”
“아아, 그만.”
술을 마시던 사내가 손을 들어서 수하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대단하구만. 당신이 요즘 중원을 시끄럽게 만드는 월주의 애검이란 말이지? 소문 이상이야. 우리 애들이 어디서 기세로 꿀리는 애들이 아닌데.”
“대, 대주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윤아. 쫄아서 칼 뽑은 순간에 넌 이미 진 거나 마찬가지다. 손에 난 땀이나 닦아, 인마.”
사내는 술을 쭉 들이켜더니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여전히 재밌다는 눈빛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쪽팔릴 거 없다. 네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니까. 솔직히 나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야. 아니, 이십 수나 버티면 기적이겠군.”
윤이라 불린 사내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 남자가 이런 말을 뱉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월검대주라……. 삭월에 대한 평가를 한참이나 수정해야겠어.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두들겨 패고 넘기는 것도 고려했는데 말이지.”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잘도 늘어놓으시는군.”
이번엔 내가 마실 차례다.
술잔을 부딪치지도,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않는 기묘한 대작이 이어졌다.
“크흐흐, 이거 갈수록 맘에 드는데? 당신 같은 남자가 이런 하잘것없는 일에 나설 정도란 말이지? 월주란 사람, 궁금해졌어.”
순배에 따라 사내가 마셨고,
“하잘것없지 않소. 나중에 결과물을 보면 불알을 탁 칠걸? 월주님은 대단한 분이지. 생각 있으면 이참에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떻소? 내 책임지고 삭월에 한자리 마련해 드리지.”
뒤이어 나도 마셨다.
소문으론 많이 들었지만, 보는 순간 데려가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
의리 하나로, 내로라하는 단체들의 영입 제의를 모조리 거절한 남자.
‘적성에 맞는다.’는 이유로 승진도 거부하고 수하들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남은 사내.
특히 저 눈빛!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투지가 꺾이지 않았다.
아니, 꺾이긴커녕 당장이라도 한판 붙고 싶어 근질근질하다는 눈치였다.
투도(鬪刀)라는 별호가 딱 어울리는 남자였다.
“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하루하루가 쫄깃해지겠는데?”
“대, 대주님!”
윤이라는 사내가 놀라서 소리쳤다.
투도, 사도련 제일의 싸움꾼들을 모아놨다는 투견대(鬪犬隊)의 대주 철중구가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아, 거 새끼! 등 뒤에 딱 붙어서 소리 지르지 마라! 깜짝 놀랐잖아!”
소리를 버럭 지른 그가 ‘내가 마실 차례였나?’라고 중얼대며 또 한 잔을 들이켰다.
“아쉽긴 한데, 보다시피 날 애지중지하는 동생들이 있어서. 그리고 련주님 두고는 어디 못 가. 그 양반 늙어서 오락가락하면 내가 똥 치워줘야 하거든.”
순배 따위 까먹었는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켠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 가만. 윤아, 나 방금 삭월에서 영입 제의받은 거냐? 하, 이놈의 인기란! 아아, 뜨거버라! 나란 남자 정말이지, 불끈불끈 주체할 수가 없구만!”
줄줄 흘러나오는 넉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말 유쾌한 남자였다.
‘일단 기절시키고 삭월로 납치할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뜨겁긴 뜨겁죠. 너무 뜨겁게 타오르다가 운남까지 가서 시원하게 차이고 왔더랬죠.”
윤이란 사내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중얼댔다.
철중구는 얼굴이 벌게져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아, 이 새끼가! 주둥이 안 닥쳐?! 다 지난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오호라… 운남까지 가서 차이셨다? 자칭 소싯적엔 장사 제일의 쾌남이셨고, 지금은 사도련 제일의 쾌남이란 분께서? 그거 대단히 듣고 싶은 이야기구려.”
나는 재밌는 먹잇감을 물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철중구는 변명이라도 할 생각인지 입술을 씰룩이다가 꾹 다물었다.
그리고 술잔을 들이켰다.
“이런 시벌. 동생이란 새끼가 아픈 상처나 후벼 파고. 그 얘기는 죽어도 못 해주니 그리 아쇼. 비아의 뭐가 궁금한데? 처음 중원에 나왔을 때?”
“기억나는 이야기 전부 해주면 고맙겠소. 아, 그거부터 시작하는 건 어떻겠소? 수왕이 야투에 출전한 적이 있다던데…….”
대단히 즐거운 만남이었다.
나와 철중구는 바닷바람 부는 노점의 평상 위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
혼세록 대담 편
「투도 철중구」
삭월 월검대주 육강패 저
컸다.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대낮처럼 밝았다.
거대한 장원 앞에 선 마른 비와 여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안에 대체 몇 명이 있는 거야?”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고조된 열기.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에 주변 땅이 옅게 진동한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음 자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마른 비와 여규의 청력에나 시끄러울 뿐이지, 일반인들에게는 아련한 메아리 정도로 들리리라.
둘을 놀라게 한 건 인간들이 뿜어내는 광기의 덩어리였다.
살의, 투지, 그리고 환희와 절망이 버무려진 혼돈의 울림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마른 비는 이토록 강렬한 감정의 발산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후아…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이런….”
3년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조차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은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발산되는 감정의 깊이를 논한다면, 전쟁에 비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훨씬 다양하고, 주체들이 대상에서 떨어져 감정을 투영하는 느낌이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 열광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른 비의 느낌은 옳았다.
“관전. 실제 싸움을 벌이는 사람은 몇 안 될 거야. 나머지는 전부 다 구경꾼들이야. 피가 튀는 실전을 즐기는. 그들은 구경꾼인 동시에 승패를 점치며 돈을 건 도박꾼들이겠지.”
여규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안전한 자리에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걸 구경한다.
그리고 거기에 돈을 걸고 내기를 한다.
말로는 듣고, 예상은 했지만, 이 열기는 너무 과하다.
여규는 장원에 들어서는 순간, 인간의 잔인함과 추악함에 고스란히 노출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각하네.”
마른 비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해지는 느낌만으로도 기분이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스린 그가 언령을 띄웠다.
『어때, 별비야? 가능하겠어?』
〔넓어. 그리고 자연의 숨결이 느껴진다. 내부에는 자연지형이 펼쳐져 있을 거야. 몸을 숨기기엔 충분하다. 한데….〕
별비는 잠시 뜸을 들이고 의지를 전했다.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군.〕
『……미안. 그 마음, 이해해.』
‘밖에 있을래?’라는 건 의미 없는 물음이다.
자신이 들어간다면 별비도 들어갈 테니까.
마른 비는 가을 수리와의 약속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후우…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하지만 가야 한다.
마음을 정한 마른 비가 발을 내디뎠다.
“어? 잠깐만. 여기 혹시….”
장원의 입구로 다가가던 마른 비가 흠칫했다.
엄청난 열기에 놀라는 바람에 깨닫지 못했다.
어디선가 본 형태.
자세히 보니 낮에 철중구가 사내들을 데리고 진입했던 그곳이었다.
“익숙지가 않아서 얼른 알아채지 못했네. 맞아, 비아야. 낮에 그 사람이 들어간 곳이야.”
여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장원을 살필 때,
“어서 오십시오. 야투를 관전하러 오신 분들입니까?”
묵직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횃불을 등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몸의 굴곡이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다.
낮고 깊게 굽은 허리.
척추에 장애가 있는 남자였다.
“아니면 참가자신지요?”
지팡이를 짚은 사내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목소리처럼 선이 굵고 부리부리했다.
기본적인 체격도 우람하고 장대했다.
뒤틀린 오른쪽 어깨와 굽은 허리만 아니라면 장사라는 소릴 들었을 골격이다.
화상을 입었는지 왼쪽 이마에도 흉측한 상처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야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우선은 관전을 할 생각입니다. 입장을 위한 조건이 있는지요?”
어설픈 동정은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다.
그저 한 명의 인격체로서 대하면 그뿐.
여규가 정중히 포권하며 물었다.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우선은’이라…. 참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사실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야투는 언제든 관람객이 투사로 바뀔 수도 있는 곳이니까요. 천으로 감싼 것, 검이지요? 병장기를 들고 계시기에 무림인인 것 같아 여쭈었습니다.”
‘이 사람, 뭔가….’
거대 투기장의 입구를 맡은 사람이라서?
아니면 숨기고 있는 무공이라도 있는 걸까?
사내에게선 자신감과 당당함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무의 흔적이 감지되지 않는 걸로 보아 후자는 아니다.
어찌 됐든 과연 야투의 문지기를 맡을 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입장 조건은 없습니다. 열 냥의 입장료가 있을 뿐.”
“열 냥이요? 생각보다 싸네요?”
“은자입니다.”
“뭐라고요?!”
은자 열 냥.
입장료로 내기에는 엄청난 금액이다.
아마도 ‘자격’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안으로 들어가 판돈을 키울 만한 능력이 되는 것인지를.
단순히 관전만 하다 가더라도 한 사람당 은자 열 냥이면 어마어마한 돈이 모일 거다.
뜨내기들을 걸러내는 동시에 투기장의 판돈과 질을 높인다.
여규는 갑자기 야투를 주최하는 집단이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여기 있어요.”
손이 떨리는 금액이지만, 다행히 그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른 비에게 걸 여분의 돈도.
여규는 둘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내부로 들어서려 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저씨. 궁금한 게 많지만, 딱 한 가지만 물을게.”
마른 비는 문지기 사내가 등장한 순간부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질문을 정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이 안에 철중구란 사람 있어?”
그제야 문지기 사내도 흥미롭다는 듯 마른 비를 관찰했다.
그의 눈이 조금씩 커진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사내는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고요히 웃으며 답했다.
“네. 있습니다. 아마 곧 그의 경기가 시작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