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89화 (189/463)

189화

“경기요? 그 사람, 야투에 출전해요?”

그저 도박이나 하러 온 줄 알았는데 야투의 출전자였던가!

여규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문지기 사내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모르셨습니까? 그분은 현재 야투에서 가장 유명한 투사입니다. 실력은 물론이고 꺾일 줄 모르는 투지와 행동 하나하나까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장사의 젊은이들이 그의 행동거지와 말투를 따라 할 정도입니다.”

문지기 사내의 말에선 철중구에 대한 호감이 묻어났다.

‘어쩐지 그 사람, 이상하게 인기가 있다 했어!’

이것이다.

단순히 상인들의 생활과 편의를 봐주는 정도로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그토록 환대를 받긴 힘들다.

호남 최고의 투기장에서 이름을 떨치는 강자.

민초들에게 있어 철중구는 파락호들의 횡포를 막아주는 보호자인 동시에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투기장에서 인정받은 남자, 즉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분이 장사의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건 단지 유명한 투사라서가 아닙니다.”

문지기 사내는 마른 비와 여규가 철중구에 대해 오해하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누구보다 민초들의 삶에 밀착해서 살아가죠. 그 자신이 장사의 길거리에서 자라났습니다. 이 도시의 골목 구석구석과 상인 한 명 한 명의 이름까지 모르는 게 없죠. 심지어 버려진 아이들과 오갈 데 없는 노인들 수십 명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야투에서 승리해 얻은 수익으로요.”

놀라운 걸 넘어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적어도 여규에게는 그랬다.

그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정파의 협의지사들을 통틀어도 민초들에게 이토록 실질적이면서 지속적인 선행을 베푼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겉모습이 껄렁껄렁하다고 해서, 행동이 거칠다고 해서 그를 낮추어 봤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돈을 벌어들인 방법?

투기장의 투견이 돼서 다른 인간을 때려눕히고 번 돈이라지만, 그건 상대의 자발적 합의로 이루어진 시합이다.

케케묵은 정파의 인물들 중엔 분명 철중구의 선행을 폄하할 인간들이 있겠지만 여규는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같은 사내로서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 샘솟을 지경이었다.

창산을 내려와 세상에 나온 청년의 시야가 열리고 있었다.

“히히. 거봐. 내가 그 사람 마음에 든댔지?”

마른 비는 철중구가 좋은 사람인 걸 알아봤다는 듯 시시덕댔다.

그리고 문지기 사내는 살벌한 투기장에 어울리지 않는 두 명의 청년이 마음에 든 듯했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가 말했다.

“이보게. 난 이분들을 안내해주고 올 테니 잠시 여길 부탁함세.”

“어르신께서 직접 말입니까?”

정문에 서 있던 마른 비 또래의 청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으로 보아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마른 비는 걷는 게 불편해 보이는 그를 만류했지만, 문지기 사내는 걱정 말라는 듯 앞장섰다.

“가시죠. 투기장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땅속에 박아 넣고 상부를 평평하게 깎은 화강암들로 이루어진 길.

줄줄이 세운 횃불들이 타오르며 어둠을 밝혔다.

“오오오오!”

관객들의 함성에 대지가 살아 있는 듯 요동친다.

장원의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훑는 듯했다.

“장원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네요.”

여규는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투기장이 대놓고 영업을 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런 크기라니.

황실과 관의 암묵적 승인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 속내를 짐작한 듯 문지기 사내의 설명이 뒤따랐다.

“아마 손님께서 상상하기 힘든 금액일 겁니다. 매년 황실에 보내는 상납금은요.”

“그렇겠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게 가능할 리 없겠죠.”

길게 타오르는 횃불의 띠 너머에는 어둠에 잠긴 정원이 있었다.

그곳엔 작은 숲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것처럼 우거진 삼림이 조성돼 있었다.

여규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긴 사내가 말했다.

“관객들의 고함이 외부로 번지는 걸 차단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죠. 또한 시체를 처리하기도 용이해요. 여기선 사람이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나갑니다. 죽은 자들을 끌고 나와 묻기만 하면 끝. 나머진 자연과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아마 이 장원 안에 떠도는 원령은 셀 수도 없을 거예요. 아, 원령이란 게 정말 있다면 말이죠.”

훈훈한 분위기에서 꺼내기엔 지나치게 섬뜩한 말이다.

또한 어떻게 생각해도 비밀이라고 여길 만한 내용이었다.

갑자기 긴장이 차오른 여규가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허허.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니까요. 그 정도를 비밀이라고 여기신다면 야투를 너무 가볍게 보시는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리고 살짝 겁이 나는 말이기도 했다.

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태평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마른 비와 달리 여규는 왠지 야투의 본질은 투기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젖으며 무서워졌다.

『숨어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

문지기 사내의 걸음에 맞추다 보니 속도는 느렸다.

아무 생각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마른 비가 여규에게 언령을 보냈다.

『전체적인 수준도 나쁘지 않지만, 중간중간 상당한 고수들이 숨어 있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외부에서 침입하는 자들을 대비하기 위한 거야. 이 정도면 거의 요새나 마찬가진데? 숲이 아니었다면 별비가 고생 좀 했겠어.』

마른 비는 별비가 따라붙는 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물론 여규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휴… 둘 다 갈수록 괴물이 되어 가네. 나도 어디 가서 모자라단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닌데 얘들이랑 있으면 영….’

점창파 최고를 다투는 기재답지 않게 괜히 주눅이 드는 여규였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 별다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해, 규야.』

「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

여규가 마른 비에게 전음을 보낸 순간이었다.

“다 왔습니다.”

“……?”

문지기 사내의 말이 마른 비와 여규의 주의를 환기했다.

횃불의 띠가 끝나는 지점.

장원의 정중앙으로 보이는 장소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

“지하입니다.”

“우와아아아아!”

땅 밑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저릿저릿한 함성과 횃불이 뿜어내는 빛이 하늘을 향해 뚫린 여덟 개의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은자 열 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겐 엄청난 돈이지만, 웬만큼 부를 쌓은 사람이라면 크게 부담 가는 금액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지하에 마련된 공동엔 관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계단형으로 둥글게 마련된 객석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층층이 하강하는 형태였고, 맨 아래 둥글게 파인 경기장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싸우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들을 보며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잘라! 팔다리를 토막 내버려!”

“그딴 애송이 상대로 이기는 건 당연한 거야! 사지 절단에 내 돈을 전부 걸었단 말이다!”

“거두도(去頭刀)! 별호대로 머리부터 자르면 네가 죽을 줄 알아! 팔과 다리 순이다! 잊지 마!”

단순히 승패를 맞추는 도박이 아니다.

살해 방식과 순서까지 세부적으로 나누어 돈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마른 비와 여규는 그 끔찍한 발상과 인간의 끝을 모를 광기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들었냐, 꼬맹아! 팔을 내놔라!”

거두도라 불린 사내는 새파란 청년에게 대도를 휘둘렀다.

청년은 그의 거력을 받아내는 게 힘든지 연신 뒤로 물러섰다.

“카아압!”

챙강! 푸화학!

청년의 방어를 깨부순 대도가 검을 분질렀다.

그리고 청년의 오른팔이 하늘을 날았다.

청년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귀청을 찌르는 함성과 땅이 꺼질 듯한 탄식,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욕설이 투기장을 뒤덮었다.

“조오아아앗써어!”

“그거야! 거두도! 최고다, 이 새끼야!”

“아아아! 내 돈! 내 도오온…! 저 씨부럴 애새끼가 사람 여럿 죽이는구나!”

“안 돼! 안 돼애애! 그걸 못 버티고! 비켜, 내가 직접 저 쓰레기 같은 놈을 죽여 버릴 거야!”

광기의 회오리다.

누구도 청년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돈, 돈, 돈…!

돈 때문에 우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도 청년을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청년의 처절한 비명은 수백 명이 터뜨린 고함에 묻혀 바스러졌다.

“여, 여기 있는 사람들… 단체로 미친 거 아냐? 어떻게 이런 짓을…!”

단순한 싸움 경기가 아니었다.

도살인 동시에 처형이며, 고문이다.

관객들이 그걸 바란다.

그러면 출전한 자들은 그대로 휩쓸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저 목숨이 오가는 실전 비무 정도를 예상한 여규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거두도! 거두도! 거두도!”

사람들은 청년의 팔을 자른 거두도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리고 곧바로 낮고 무겁게 외치기 시작했다.

“팔! 다리! 팔! 다리! 팔…!”

사지 절단에 돈을 건 자들의 요구였다.

남은 팔을 마저 자르고, 다리까지 절단하라는 외침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짙은 광기가 서려 있었고, 마른 비의 얼굴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떠올랐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마른 비가 처음으로 원색적인 욕을 입에 담은 순간이었다.

그믐의 아들이자 부족의 어른인 가을 수리를 원망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이따위 광경을 보라고, 이런 쓰레기들의 노리개가 되라고 보낸 것인가?

겉모습과 행동이 어떻든 그를 믿었다.

아니, 자연기를 믿었다.

훼손되지 않은, 그의 생명력이 전하는 고아한 울림을 믿었다.

자연기가 틀렸다.

그리고 여규가 맞았다.

가을 수리는 이곳에 자신을 내보내고 돈을 걸겠다고 했다.

그는 썩어문드러진 인간이며, 정신 나간 광기에 뿌리까지 젖어든 인간이었다.

“……규야. 문 쪽으로 가. 그리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밖으로 달려.”

“비아, 너… 뭘 하려고?”

여규가 고개를 돌려 마른 비를 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팔이 잘린 채 괴로워하는 청년이 있었다.

“구해야지. 저 사람, 일단 구하고 볼 거야.”

여규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하자.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자의로 선택한 싸움이더라도 이걸 두고 보는 건 옳지 않아. 일단 구하자. 하지만 가지 않을 거야. 같이 싸워.”

어쩌면 야투를 관할하는 세력 전체와 부딪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뭐? 그게 어쨌단 말이냐?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을 보았고, 일단 구할 뿐이다.

누군가는 미쳤다고 하겠고, 누군가는 쓸데없는 오지랖이라 하겠지.

어쩌면 저 청년부터 자신을 왜 구했냐고 원망할지 모른다.

그 역시 개의치 않는다.

광기에 휩쓸려 싸움개로 죽어가는 인간을 두고 볼 수 없을 뿐.

마른 비가 주먹을 움켜쥐고, 여규는 검을 감싼 천을 풀었다.

“카하하! 아주 그냥 화끈하구만!”

그때, 객석에 있던 누군가가 경기장으로 난입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확인한 관중들은 열광했다.

“오오오! 중구! 철중구다!”

“왔냐! 이 망나니 새끼! 오늘 너한테 내 전 재산을 걸었다!”

야투 최고 유명인사의 등장에 관중들은 경기장이 무너져라 소리 질렀다.

“뭐 대단한 사람 왔다고. 좋아, 좋아. 마음껏 즐기도록 해.”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한 철중구가 거두도라 불린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 하냐? 안 나가고?”

그 한마디에 경기장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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