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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90화 (190/463)

190화

“나가라니? 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거두도는 철중구보다 최소 네다섯 살은 많아 보였다,

하지만 말을 놓지 못한다.

야투에서 인기와 실력은 곧 무림에서의 배분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기가 방해받아서 화가 나지만, 함부로 발작하지 못한다.

거두도는 씩씩대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으엉? 그 눈깔은 장식이냐? 나 안 보여? 호랑이가 나왔으면 풀 뜯던 토끼는 알아서 토껴야지. 거기 그대로 있다가 뒈지려고?”

가차 없는 도발이다.

동시에 불만이 터질 수밖에 없는 발언이기도 했다.

역시나 관중석에서 분노에 찬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아직 팔다리가 남았어! 중구! 아무리 너라도 지금 끼어드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네 차례를 기다려!”

“맞다! 저 새끼 다리가 잘려야 조건이 충족된단 말이다! 꺼져!”

거금이 걸린 도박이다.

중도에 끝나버리면 돈을 잃게 되는데 제멋대로 구는 걸 두고 볼 리 없었다.

관중들은 철중구에게 성난 물소처럼 야유를 퍼부었다.

“닥쳐!”

내력이 실린 일갈이 경기장을 짓눌렀다.

철중구는 조용해진 객석을 자신만만한 얼굴로 훑었다.

“경기는 끝났다. 저 약해빠진 꼬맹이, 팔 잘리고 기절한 거 안 보여? 이 상황에서 반전이 있을 거 같아? 남은 왼팔이랑 두 다리 잘리고 끝이야. 이 몸이 그 지루한 과정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나?”

턱을 치켜든 오만한 자세.

관객들이 경기장에 있는 철중구를 내려다보는 형국이지만, 마치 철중구가 위에서 모두를 깔아보는 듯한 느낌이다.

대단한 존재감이었다.

“그, 그래도 혹시 깨어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린다.

다른 결과에 돈을 건 관객인 듯했다.

“지랄하고 있네. 야투 처음 봐? 스스로도 개소리라는 거 알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철중구가 노려보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돈을 냈고, 싸움을 끝까지 볼 권리가 있다! 중구, 아무리 너라도 이건 횡포야!”

“마, 맞다! 비켜라! 우리는 짜릿한 살육전을 보러온 거라고! 미적지근하게 끝나는 애들 싸움이 아니라!”

저자는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도 모르리라.

피와 광기의 향연.

어중간한 칼부림으로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

뼛속까지 야투에 잠식된 인간이나 할 법한 소리였다.

“시벌, 수준하고는.”

침을 퉤 뱉은 철중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기절한 애새끼 팔다리 끊어놓는 걸 기어코 봐야겠다? 그게 재밌냐? 내가 지금 존나게 달아올랐거든? 근데 그런 지루한 짓거리나 보면서 기다리라고? 장난해?”

철중구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를 치켜들며 외쳤다.

“좋아! 기분이다! 내가 공짜로 한판 화끈하게 놀아주마! 다 대 일? 맹수전? 고수와의 격돌? 원하는 싸움을 말해라! 눈깔 삔 네놈들에게 진짜 싸움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우, 우오오오오!”

관객들이 미칠 듯이 환호했다.

철중구의 싸움은 저 배짱과 입담만큼이나 화려하다.

그가 나오는 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데, 싸움 한판을 공짜로 벌려준단다.

철중구는 순식간에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씨팔! 아주 그냥 지멋대로구만?”

불만이 폭발한 자는 주인공에서 병풍으로 전락해버린 거두도였다.

거저먹는 경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거금까지 챙기게 된 그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철중구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잔챙이 취급을 받게 되었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나랑 붙자! 이 개새끼야! 네가 세 봤자 얼마나 세다고 날 이런 개똥 취급…!”

“응. 개똥 맞아.”

퍼어억!

거두도는 철중구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다.

배를 걷어차인 그는 경기장 끝까지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기절해버렸다.

“…….”

한순간 정적이 흐르고,

“우오오오오오오!”

“중구, 화끈하구만!”

“역시 저 새끼만 한 싸움꾼이 없단 말이야!”

관객들은 더욱 열광했다.

철중구는 여세를 몰아 관객석 꼭대기에 넓게 파인 지점을 바라봤다.

“투주(鬪主)! 보고 있나? 관객들이 그렇다는데? 내기에 걸린 돈은 확실히 보장하는 거겠지?”

당연한 일이지만, 공언을 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양지차다.

그 어느 곳보다 밝고 호화로운 객석.

특별히 초대된 손님들이 자리하는 내빈석이다.

그 정중앙에 가면을 쓴 남자가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

검은색 바탕에 정교하게 양각(陽刻)된 흰 뱀.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솜씨는 명인이 공들여 제작한 가면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얼굴을 완전히 덮은 가면 사이로 새하얀 안광이 번뜩였다.

야투의 주관자.

투주라 불린 사내는 철중구를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중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봤냐! 이 새끼들아! 투주가 승인했다! 쪼잔하게 돈 걱정하지 말고 즐기라 이거야!”

“오오오오오!”

“역시 저 새끼는 물건이야, 물건!”

“철중구! 철중구! 철중구!”

분위기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관객들이 철중구의 이름을 연호하고, 야투의 진행요원들이 갑작스럽게 추가된 그의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철중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객석을 돌아봤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명의 청년과 눈을 마주쳤다.

「너희 둘. 난입해서 저 꼬맹이를 살리려고 한 거냐?」

난데없는 전음에 마른 비와 여규가 흠칫했다.

서로를 돌아본 후, 마른 비가 언령으로 대꾸했다.

『응. 당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랬을 거야.』

이번엔 철중구가 움찔할 차례였다.

「으엉? 뭐야, 이건? 전음이 아닌데?」

난생처음 듣는 언령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철중구가 씨익 웃었다.

「뭐든 상관없겠지. 아무튼 어린놈들이 배짱 좋구만. 마음에 들어. 하지만 미숙해. 그리고 무모하다.」

주위를 둘러본 철중구가 투주가 있는 내빈석을 쳐다봤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난입해서 경기를 망치면 둘 중 하나다. 관객들의 눈요기를 위해 잔인하게 살해당하거나, 흠씬 두드려 맞고 이길 수 없는 경기에 강제로 동원되거나. 뭐가 됐든 죽음뿐이야.」

『당신도 중간에 끼어들었잖아.』

「보고도 모르겠나? 나는 관객들을 내 편으로 만들었지. 내 이름값과 그간 쌓은 실적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야. 이 빌어먹을 미친 경기장의 흥행 보증수표가 바로 이 철중구란 말이다.」

그는 여전히 울려 퍼지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경기장을 넓게 둘러봤다.

「잘 봐라. 애송이들. 이것이 존재감이고, 영향력이라는 것이다.」

두 팔을 벌린 철중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얄밉지만, 그의 말이 맞아.”

여규는 감탄했다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난입했으면 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졌을 거야. 저 아래에서 그걸 눈치채고 먼저 끼어들었단 건데……. 이런 아수라장에서 우리 기운을 감지했단 말이지? 대단하네.”

“그러게. 그리고 저 사람,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마른 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에선 진행요원들이 튀어나와 정신을 잃은 거두도와 청년을 옮기고 있었다.

여규는 호탕하게 웃고 있는 철중구를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순식간에 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기고, 자기 뜻대로 움직였어. 심지어 야투의 주관자까지도. 관객들이 그에게 호응한 이상, 투주라는 사람의 속내가 어떻든 끌려갈 수밖에 없었을 거야.”

“맞아. 놀랐어. 정말 대단해. 세상에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

철중구는 마른 비가 운남을 나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당가의 가주나 정파의 기재들, 살수들, 금귀진도 기억에 남지만, 철중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존재감만으로 따진다면 미카엘이란 서역인이 철중구를 압도하지만, 그는 무언가 특별한 존재란 느낌이었다.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자신만의 숙명을 걸머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반면에 철중구는 철저하게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존재다.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찾으면 비슷한 인간을 찾기 힘들 것 같은 느낌.

또한 옆에 두고 시시덕대면 너무나 즐거울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철중구가 방금 전에 보여준 모습은 그에 대한 호감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는 동시에 마른 비에게 가벼운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름값. 그리고 존재감.’

갑작스런 때와 장소에서 마른 비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부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곤란하군요.”

섭선을 든 남자가 부챗살 뒤에 얼굴을 숨긴 채 말했다.

“거두도가 마무리를 하면 분위기를 타고 즉흥적인 경기를 한두 번 더 성사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막 흥이 오르는 참이었으니 판돈도 점점 커졌을 거고요.”

눈 부위만 드러낸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은 저 아래에서 관중들의 환호를 즐기는 철중구에게 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제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끼어드는 줄 알았습니다만, 매번 이런 식입니다. 흥행이 되는 순간에 교묘하게 훼방을 놓죠. 꼴에 사람이 죽는 건 보기 싫다는 건지. 우매한 것들 앞에서 목에 힘이나 주고 다니는 길거리 출신 칼잡이가 주제도 모르고…….”

사내의 말과 표정엔 철중구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와 거부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잡아내기 힘든 앙심까지도.

그는 동의를 구하듯 가면 쓴 사내를 힐끗거렸다.

“…….”

하지만 투주는 어떤 의사도 내비치지 않고 석상처럼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뭘 보는 거지?’

투주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철중구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두 명의 청년이 있었다.

‘웬 야만인 놈이….’

섭선을 든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투주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투주님. 저자를 계속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

‘썩을. 벙어리도 아니고 말 한마디 듣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투주의 밑에서 야투를 관리하는 사내, 허융이 인상을 찌푸렸다.

“투주님. 철중구의 오만방자함을 한 번쯤 꺾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일전에 추천 드렸던 자가 마침 경기장에 와 있습니다. 출전 의사도 강력하게 내비치고 있고요. 투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리하라.”

너무도 간단한 승낙에 눈만 깜빡이던 허융이 활짝 웃었다.

“네, 넵! 감사합니다, 투주님! 철중구가 멋대로 잡은 번외 경기 후에 바로 그자와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만약을 대비하여 기존에 준비한 자와….”

“뜻대로 하라.”

이게 웬일인가.

의사를 직접적으로 내비친 적은 없지만, 투주가 철중구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야투 역사상 철중구만큼 흥행을 몰고 다니는 투사는 없었으니까.

지금은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된 패군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도 제재할 수 없었고, 제멋대로 구는 걸 방치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철중구는 길바닥 출신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해서 어중간한 무인으로는 비벼볼 수도 없었다.

‘넌 오늘로 끝이다.’

허융이 야비한 눈을 굴리며 객석의 한곳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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