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91화 (191/463)

191화

‘투주의 허가가 떨어졌소.’

객석의 중앙.

투기장의 상황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다.

허융과 눈이 마주친 사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 대 중반?

철중구와 비슷한 나이다.

잘 벼린 칼날 같은 기도를 품은 자였다.

허융을 일별한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철중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엔 가소롭다는 기색이 뚜렷했다.

허융도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철중구를 내려다봤다.

‘철중구. 넌 내 손을 뿌리치지 말았어야 했어.’

허융은 2년 전 관리자에 임명되자마자 철중구에게 갔다.

그리고 쉽고 안전한 경기를 붙여줄 테니 수익을 나누자는 제안을 했다.

그건 이 자리를 거쳐 간 모든 이들이 인기 투사들에게 건넸던 제의이기도 했다.

‘엉? 뭐라는 거야, 이 병신이? 너 전임자한테 나에 대해 못 들었냐? 좆 까.’

철중구는 코웃음을 치며 단칼에 거절했다.

허융은 같잖다는 그의 얼굴을 2년 내내 잊지 못했다.

‘경기 중에 사망한다면 투주도 별수 없겠지. 네놈을 치울 날만을 기다려왔다.’

마침 알맞은 제안이 들어왔다.

확실한 실력과 배경, 상부상조하는 미덕도 갖춘 인물에게서.

그는 중원 전체에 이름이 알려졌다는 점에서 철중구 이상의 흥행을 기대할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흐흐. 기대가 되는군.’

허융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철중구의 번외 경기가 정해졌다.

투기장에 네 방향으로 뚫린 입구 중 하나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콰아앙! 쾅! 꽈앙!

철창이 흔들린다.

육중한 무언가가 입구를 가로막은 철창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크르르…! 크허허헝!”

맹수가 울부짖는 소리였다.

움찔한 관객들이 짐승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상체를 세웠다.

그사이, 경기장에 나타난 진행자가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양각된 백사의 크기가 작을 뿐 투주가 쓰고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였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죠? 야투의 간판 투사, 철 대협의 제안대로 번외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허나 계획에 없던 경기라도 야투의 명성이 있는데 쉽게 갈 순 없겠죠?”

진행자는 맹렬하게 철창을 두드리는 짐승을 가리켰다.

“먼 서역의 땅에서 어렵게 데려온 놈입니다! 중원에선 찾아보기 힘든 짐승이죠. 코 크고 머리 노란 놈들이 백수의 왕이라 일컫는 맹수! 이번에 출전할 투사는 사자입니다!”

진행자는 야심 차게 소개했으나 엄청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 뭐 하는 짓이냐!”

“장난해? 저따위 고양이가 철중구에게 상대나 되겠냐!”

진행자는 서운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어렵게 준비한 녀석인데…… 이놈이 얼마짜리인 줄 아십니까? 이놈의 앞발 한 방이면 커다란 물소도….”

“닥쳐! 이 새끼가 감이 떨어졌나? 진행자 자리 내놓고 꺼져라!”

빗발치는 욕설.

진행자는 그럼 이러면 어떻겠냐는 듯 물었다.

“철 대협께서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거나 저거나! 짐승이 아무리 강해도 경지에 이른 무인을 어떻게 이기냐!”

“그걸로도 부족한가요?”

진행자는 과장되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럼 내공을 봉인하고 싸우면?”

“…….”

투기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내공을 봉인한 채 육신의 힘만으로 싸운다?

인간이 근력을 아무리 단련해봤자 맹수를 뛰어넘을 순 없다.

무인이 무인일 수 있는 근원을 제거한 채 백수의 왕과 맞짱을?

“참고로 오래 전 사도련주께서 야투에 계실 때 했던 경기와 동일합니다. 그분께선 말 그대로 맨손으로 백수의 왕을 때려잡으셨죠.”

그 말이 기폭제였다.

패군이 했던 경기와 동일한 수준의 싸움.

관객들은 열광했다.

“오, 오오오…! 재밌겠는데?”

“저 누런 고양이를 내공 없이 때려잡으면 중구가 소싯적의 패군과 동급인 거냐?”

“그럴 리가! 패군은 야투의 제왕이었다고! 중구가 잘 싸우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지!”

“아무튼 시발! 난 중구한테 건다! 내공이 없어도 야투 싸움꾼의 자존심이 있지, 어디 덩치 큰 고양이 따위가…!”

“잘 생각해! 맨손이야, 맨손! 내공도 못 쓰고 무기도 없다고! 난 중구가 오늘 갈가리 찢긴다는 데 전부 건다!”

난장판이었다.

관객들은 아우성을 치며 돈을 걸기 시작했다.

누구도 철중구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객석 곳곳에 자리한 진행요원들이 즉석에서 판돈을 걷는 동안, 진행자는 고개를 모로 꺾어 철중구를 바라봤다.

가면에 가려진 입매가 웃는 것만 같았다.

“괜찮으시겠죠, 철 대협?”

“대협은 무슨. 낯간지러워 죽겠네. 네가 언제 내 의사를 물어봤다고? 항상 벌려놓고 그러는 거, 너무 속 보이지 않냐?”

철중구는 웃옷을 벗고 정좌했다.

진행자에게 도를 넘긴 그가 말했다.

“혈도나 찍어.”

“아아, 역시 화끈하시군요! 대협을 볼 때마다 저는 후끈 달아오른답니다!”

진행자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염병하고 있네. 난 그런 취미 없거든? 근데 하나만 묻자. 너 누구야? 나한테 원한이라도 있는 거냐? 매번 일부러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거 같은데?”

소음 속에 파묻혀 누구도 듣지 못할 대화였다.

철중구의 등에 점혈을 가하며, 진행자가 속삭였다.

“그럴 리가요. 저는 누구보다 대협께서 선전하길 기원한답니다.”

피피핏!

“음…….”

내공에 금제가 가해지는 이 감각.

야투에서 구르다 보면 가끔 이런 제한이 걸린 경기에 내몰리고, 내공 봉인은 벌써 세 번째였다.

하지만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은 언제나 기분 나빴다.

처음엔 야투 측을 믿지 못해 여러 절차를 거쳐 내공을 봉했지만, 이제 이런 부분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는다.

꺼림칙한 건 일개 진행자 주제에 자신의 내공을 금제할 실력을 지녔다는 점과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의 정체였다.

“야, 너 혹시….”

투기장 밖으로 걸어 나가던 사내가 등을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철중구가 몸을 일으키며 내빈석에 있는 허융을 힐끔거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피식 웃은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다. 가라. 얼른 한판 놀아야지.”

‘저놈이랑 연관된 놈인가? 뭐, 상관없겠지. 제깟 게 어쩌겠어. 난 철중구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흥행력.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장사의 민초들이 보내는 신망.

뭐가 나오든 거꾸러뜨릴 싸움 실력.

자신을 노리는 잔챙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을 어쩔 수 없다.

철중구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미리 말하는데, 오늘 저 노랑 고양이한테 돈 건 새끼들은 패가망신할 거다! 정신 차려,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렇게 보고도 몰라? 나 철중구야!”

그르르릉―

철문이 올라가고, 광분한 맹수가 사납게 뛰쳐나왔다.

“크아아앙!”

“카하하! 덤벼라, 이 고양이 새끼야!”

머리가 빙빙 돌 정도의 함성 속에서, 인간과 사자가 격돌했다.

“짐승도 선수로 출전할 수 있는 거야?”

마른 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규를 돌아봤다.

여규도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여긴 그런가 보네.”

인간과 짐승을 싸움 붙이는 야만적인 경기가 버젓이 행해진다는 것도 놀랍지만, 분위기로 보아 단순한 일회성 경기가 아닌 것 같다.

야투는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시합이 성사되고, 거기 출전하는 생물은 종을 막론하고 선수로 등록되어 도박의 대상이 된다는 걸 여규가 알 리 없었다.

“불쌍해.”

마른 비가 낮게 신음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렇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유희와 내기의 대상이 되어 희롱당하는 걸 보는 건 쉽지 않았다.

‘이런 적이….’

맹수를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와족에게 맹수는 극복의 대상이었지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영혼이 소통하는 벗을 제외하면, 야생의 짐승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식량이었고, 소수부족들을 해치는 적이었다.

야수 친화를 통해 짐승들의 의지를 읽게 된 후에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인간의 유희거리로 전락한 짐승을 보며, 마른 비는 난생처음으로 안쓰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비아야, 괜찮아?”

마른 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본 여규가 물었다.

그도 심정이 복잡한지 착잡한 얼굴이었다.

“응. 괜찮아. 그냥 좀 생각이 많아져서.”

인간의 광기가 휘몰아치는 공동 속, 청년들은 말을 잃은 채 인간과 짐승의 싸움을 내려다봤다.

* * *

꿀꺽, 꿀꺽―

“크으~ 취한다!”

비틀거리는 사내가 장사의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발음이 꼬이고, 다리가 휘청이며, 눈은 풀렸다.

사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눈이 풀렸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지만, 간간이 번뜩이며 무언가를 찾는다.

그 순간만큼은 야생 짐승을 능가하는 날카로움이 눈빛에서 묻어났다.

고개를 돌리지 않을 뿐, 사내의 눈은 감각에 기대어 전방위를 탐색하고 있었다.

‘따라붙었나? 어디냐? 골목? 지붕 위? 아니면 땅속?’

2년 전부터 목덜미에 달라붙은 끈적끈적한 감각.

그 느낌이 스친 이래로, 폐인인 척 행동해왔다.

한 번도 실체를 맞닥뜨린 적은 없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가을 수리는 자연기가 전해주는 감각을 믿었다.

‘역시 느낌만 올 뿐 찾을 수 없어. 빌어먹을! 어릴 때 아버지 말대로 열심히 단련을 했다면….’

후회는 언제나 늦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지난날을 만회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련에 매진하지 않았던가.

『다색(多色)아.』

이건 그 결과물이다.

언령과 반려수.

가을 수리는 스물셋이 되어서야 영혼의 벗을 얻었고, 녀석은 중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짐승이었다.

“슈르륵.”

그늘진 담벼락 밑에서 무언가가 가을 수리의 부름에 응답했다.

변색룡(變色龍).

자신의 몸 색깔을 환경과 일치시키는 놀라운 생물이다.

19년 전, 중원 이남을 떠돌다 장사의 항구에 발 들였을 때다.

머나먼 서역에서 날아온 도마뱀을 마주친 순간, 가을 수리는 대번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후후. 아버지가 다색이를 보면 또 뺨부터 후려치실까?’

그믐은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수리의 눈 수장이 되길 바라며 ‘가을 수리’란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그의 운명은 운남에서 한참을 비켜나 있었다.

척후, 정탐, 정찰, 잠입, 또는 기망.

위대한 전사와는 거리가 먼 역할이다.

하지만 가을 수리는 자신이 몸담게 된 집단과 하늘이 부여한 운명을 사랑했다.

그리고 다색이는 그런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벗이었다.

『찾을 수 있겠니?』

그늘에 녹아든 도마뱀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 순간, 희미하게 전해지던 암기(暗氣)가 급격히 확장되는 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언령을 눈치챌 정도인가?’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몰라도 엄청난 고수들이다.

설마 반려수에 대해 알지는 못하겠지만, 가을 수리는 다색이에게 가만있으라고 눈치를 주고 혀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카아~ 술 마시기 딱 좋은 밤이구만! 딸꾹. 근데 어디야, 여긴? 아, 저기 보이네.”

담장 너머의 횃불들이 대낮처럼 어둠을 밝히는 곳.

비틀대는 가을 수리의 걸음은 으리으리한 장원을 향하고 있었다.

“꿀꺽, 꿀꺽. 크으~! 한잔 걸쳤으면 그다음은 역시 도박이지.”

허리가 구부정한 문지기 사내에게 다가가며, 가을 수리는 초조한 심정을 억눌렀다.

‘비아야. 제발 무사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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