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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92화 (192/463)

192화

“꿀꺽. 푸하~! 거, 오랜만입니다, 형님!”

가을 수리가 술을 들이켜며 문지기 사내에게 인사했다.

형님 운운하는 걸로 보아 야투에 뻔질나게 드나든 모양이었고, 문지기 사내는 혀를 차며 맞아주었다.

“음. 추단(秋鷻)이, 자네 왔는가. 무슨 술을 이리 많이 마셨나? 미리 말하네만 입장료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네.”

“거 참. 딱딱하게 굴기는. 제가 여기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이리 야박하게 구는 겁니까?”

“자네,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일해서 제법 재산을 일구지 않았었나. 불과 반년 사이에 그 모든 걸 탕진하고도 또 여길 찾을 생각이 든단 말인가? 돌아가게. 문지기로서 할 말은 아니네만 여긴 자네가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이야.”

누가 봐도 도박에 찌든 사내와 그를 한심하면서도 가엾게 여기는 문지기의 대화였다.

가을 수리는 화를 벌컥 내며 허세를 부렸다.

“내가 구차하게 들여보내 달라고 떼라도 쓸까 봐 이러는 것이오? 자, 보시오! 오늘은 돈이 있소이다! 옜소, 받으시오. 열 냥! 칵, 퉤! 내 참 더러워서! 그간 본 게 얼만데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돈도 없으면서 억지를 부린 게 한 두 번이었나. 확실히 받았네. 열 냥. 입장하시게나.”

입장료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면 소중한 고객이다.

문지기 사내는 태도를 바꾸어 가을 수리를 안으로 들였다.

투덜대며 입장하는 가을 수리와 옆으로 비켜선 문지기 사내.

둘의 눈빛이 번쩍이며 교차한 건 찰나의 일이었다.

“크허헝!”

기구하게도 사냥꾼에게 생포되어 동쪽의 땅으로 실려 온 초원의 왕은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나 있었다.

뱃속을 긁는 허기를 참을 수 없었고, 눈앞에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있었다.

부아아악―!

인간의 머리통보다 큰 앞발이 허공을 긁었다.

하지만 사냥감은 얄밉게도 매번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사자는 점점 더 흥분했고, 철중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저 짐승… 사람을 먹어본 놈이야. 그것도 꽤 많이.”

마른 비는 사자에게서 식인의 흔적을 읽어냈다.

아마도 투기장에 내보내기 전에 몇 번에 걸쳐 인간을 던져줬으리라.

그렇게 시간을 들여 각인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매우 먹음직스러운 먹이라는 걸.

그 후 이삼일만 굶기면 미쳐 날뛰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실제로 사자의 눈엔 철중구가 신선한 고깃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시벌 놈이?”

철중구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사자가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고 있다는 걸.

타고난 싸움꾼의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고, 철중구는 안전한 간격을 포기하고 사자에게 걸어갔다.

“저, 저…?!”

“중구, 저놈! 미친 거 아냐?!”

사자가 날뛰는 모습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아마 그 앞에 서면 오금이 저려서 움직이지도 못하리라.

손에 땀을 쥐며 관전하던 관객들은 철중구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서 소리 질렀다.

“이 고양이 새끼가 감히 이 철중구를 물로 본다 이거지?”

“크허허헝!”

부아아악―!

철중구는 정확히 한 뼘 간격을 두고 앞발을 흘렸고, 그대로 사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공이 없으니 때리는 건 의미가 없을 거고. 그럼 후벼야지.”

푸욱!

“크, 크아아앙!”

날카롭게 세운 손끝에 눈알이 꿰뚫린 사자가 울부짖었다.

“어이쿠!”

날아드는 이빨을 피해 반대쪽으로 붙는다.

남은 한쪽의 눈마저 잃은 사자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후각은 살아있겠지?”

그랬다.

생존 본능이 발동된 백수의 왕은 통증을 이겨내고 철중구에게 달려들었다.

시야를 뒤덮는 거체.

철중구는 바짝 엎드리며 모든 체중을 주먹에 실었다.

“카아아압!”

단련을 거듭한 주먹이다.

내공은 없지만, 양쪽의 체중을 합치면 그럭저럭 쓸 만한 충격력을 확보할 수 있다.

세로로 크게 휘두른 강권이 날아드는 사자의 턱을 후려쳤다.

“쓰읍! 졸라게 단단하네!”

턱을 때린 주먹이 얼얼하다.

고개가 반쯤 돌아갔던 사자는 착지 후에 비틀댔고, 철중구는 그대로 걸어가며 발뒤꿈치로 사자의 턱을 가격했다.

“네가!”

뻑!

“무쇠도 아니고!”

빠악! 빡!

“존나게 맞다 보면 아픈 건 다 똑같애!”

빠가각! 뻐걱!

한 방 한 방에 체중을 실은 강격이다.

그리고 모든 공격은 정확히 처음 주먹이 꽂혔던 자리에 집중됐다.

사자는 턱을 두들겨 맞으면서도 앞발을 두어 번 휘둘렀지만, 무의미한 몸부림이었다.

결국 뇌가 흔들려 평형감각을 잃은 사자가 앞발을 꺾었다.

“아씨, 뼈가 뭐 이리 단단해? 때려죽여야 멋이 폭발하는데 내가 먼저 지치겠다!”

투덜대던 철중구가 사자의 등에 잽싸게 올라탔다.

그리고 두 다리를 팔처럼 이용해 사자의 목을 조였다.

조이기.

육체적 힘이 떨어지는 인간이 맹수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자는 철중구를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서서히 약해지다가 결국 움직임이 멎었다.

“…….”

숨소리도 잦아든 정적.

“우,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폭발적인 열광.

지금 이 순간, 투기장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철중구일 따름이었다.

“휘유… 저 사람, 겁이 없는 건가?”

여규가 질렸다는 얼굴로 감탄했다.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한 무인이라면 내공이 없어도 저 정도 움직임을 구현하는 건 어렵지 않다.

놀라운 건 철중구가 보여준 용기와 싸움법이었다.

한 번만 실수해도 곧바로 찢겨 죽을 텐데 거침없이 들어간다.

또한 그 움직임은 지극히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마른 비 또한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다.

“나라도 저렇게 싸웠을 거야. 눈을 공략하고 뇌를 흔드는 것, 그리고 조이기까지. 아, 나는 맨손으로도 때려죽일 수 있으니 조이기까지는 안 가도 됐겠네. 아무튼 내가 저 사람이라면 똑같이 상대했을 거야.”

마른 비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철중구의 싸움 감각이 예상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이다.

여규는 명문 거파의 제자도 아닌 자가 어떻게 길거리에서 저렇게 클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봤냐! 이것들아! 내가 바로 철중구다! 내가 최고란 말이다!”

철중구가 승리를 만끽하며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순간,

「무의 기본도 안된 길바닥 싸움꾼이 까부는 꼴이라니.」

비웃음 실린 도발이 관객들의 환호를 끊었다.

투기장을 휘감는 광범위 전음.

관객석 중앙에 우뚝 선 남자가 철중구를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휘리릭―

하늘로 솟구친 사내는 투기장에 사뿐히 착지했고, 철중구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야투의 유명 인사라고? 허접한 것들만 한가득이니 그럴 만하군. 비살검(飛殺劍) 악교익이다. 오늘 원래 너와 붙기로 했던 상대지.”

투기장이 술렁였다.

“비살검?”

“악교익이라고? 어디서 들어봤는데….”

“가, 가만! 비살검? 그거 사호(四虎)의 일인 아냐?”

비살검 악교익.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칠룡.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파 최고의 기재들, 사호.

그 네 자리 중 한자리를 차지한 남자다.

사문이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 없으나 악교익은 뛰어난 무공과 잔인한 손속으로 등장과 동시에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1년 전, 원래 사호 중 하나였던 묵흑마(墨黑魔) 구광을 시비 끝에 격살하며 그의 자리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사호? 들을 때마다 유치찬란한 이름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네가 그거냐?”

하지만 철중구는 쫄지 않았다.

그저 웃긴다는 눈초리로 악교익을 바라볼 뿐이다.

악교익이 발끈하건 말건 철중구는 제 할 말만 했다.

“한마디로 싸우자, 그거 아냐?”

그가 투기장 입구 한쪽에 대기 중인 진행자를 쳐다봤다.

“야! 너! 와서 혈도 풀어! 그리고 니들.”

관중들은 생각지도 못한 사호의 등장에 흥분하고 있었다.

철중구는 기대감에 부푼 그들의 얼굴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씨익 웃었다.

“걸어.”

관객들은 폭발했다.

“우오오오오오!”

“진짜냐?! 사호의 싸움을 볼 수 있는 거야?”

“내 눈이 오늘 호강하겠구나! 마누라 친정 보내길 잘했다!”

“중구 대 악교익?! 아무리 중구라도 사호한테 되겠어?”

“몰라, 시발! 만에 하나라도 중구 저 새끼가 이기면 오늘 전설이 탄생하는 거다!”

“중구, 이 새끼야! 너한테 내 인생을 건다! 무조건 이겨라!”

예상과 다르다.

장사에서, 그리고 야투에서 철중구의 인기는 사호의 명성으로도 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악교익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철중구는 낄낄댔다.

“어때? 생각과 다르지? 네가 나오면 분위기가 너한테 쏠릴 줄 알았냐? 아, 그렇다고 울지는 말고. 막상 까보면 돈은 너한테 더 많이 걸 테니까. 사호의 이름값이 있는데 아무렴.”

황급히 다가온 진행자가 혈도를 풀고, 객석의 진행요원들은 폭주하는 판돈을 계측하느라 진땀을 뺐다.

철중구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악교익을 도발했다.

“근데 어쩌냐? 너 곧 기절할 텐데? 사호, 그거 할 만해? 오늘부터 내가 사호할 테니까 너는 찌그러져 있으라고.”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들다.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 악교익이 검을 뽑았다.

“그 주둥이만큼이나 잘 싸우길 빌겠다.”

이쯤 되면 전초전은 철중구의 압승이다.

그는 기세를 타고 최후의 한 방을 더 꽂아 넣었다.

“아~ 잠깐. 이렇게 큰 판이면 한 번 해줘야지.”

철중구가 도를 어깨에 올리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과장된 그 행동에, 무엇이 나올지 예상한 관객들의 환호는 정점에 달했다.

“거~ 개처럼 두들겨 맞기 딱 좋은 날씨네.”

경극(京劇)의 연기자를 연상케 하는 말투다.

시원한, 하지만 상대 입장에선 울화가 치밀 미소를 지으며 철중구가 말했다.

“너무 쫄지는 말고. 살려는 드릴게.”

“이런 개새끼가아아아!”

눈이 뒤집힌 악교익이 거품을 물며 날아올랐다.

‘후우, 후욱…!’

긴장하면 안 된다.

걱정과 초조함에 호흡이 흔들리면 지켜보는 놈들이 눈치를 챌 거다.

가을 수리는 술 취한 사람을 연기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며 비틀비틀 걸었다.

‘멀어. 멀다. 입구부터 투기장까지가 이렇게 멀었나…!’

20여 년 만에 만난 부족의 아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전언을 들고 왔으며, 족장이 된 형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간쓰레기를 가장했고, 자신을 지켜보는 자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야투에 출전하라고 했다.

지난 2년간 그들이 지켜본 자신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실망하여 자리를 박차도 좋고, 승낙해도 상관없었다.

비아를 정말로 야투에 출전시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자신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비아는 그러겠다고 했고, 일주일은 준비를 마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직의 도움을 받아 빼내거나, 정 안 되면 ‘그쪽’으로 보내면 될 일이었다.

‘왜! 왜 갑자기 야투를 찾은 거냐!’

마른 비를 걱정한 여규의 염려가 일을 틀어지게 만들었단 걸 가을 수리가 알 방도는 없었다.

어쨌든 마른 비는 투기장을 찾았고,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경기에 출전하게 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현재 야투는 암중 세력들이 도사리는 복마전이었고, 그건 조직의 첩보망으로도 잡아낼 수 없었다.

마른 비가 투기장으로 향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가을 수리는 무조건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원에 들어서면 항상 그 끈적이는 느낌이 사라졌었어. 장원의 매복자들에게 발각되는 걸 꺼렸기 때문이겠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를 힐끔거린 가을 수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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