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아악!”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건 판돈을 수금하고 관객들을 관리하던 진행요원들이었다.
관객석 곳곳에 배치된 진행요원들 중 오 분의 일가량이 갑작스런 습격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왜, 왜…?”
그중 몇몇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상당수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눈빛을 번뜩이며 이를 악물었다.
품에서 단도를 꺼내서 반격을 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컥…!”
“아악!”
드물지만, 관객 중에 공격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갑작스런 칼부림을 시작한 자들은 대부분 피풍의를 걸치고 체격이 좋은 사내들이었다.
“이, 이 비열한 오랑캐 놈들…!”
죽어가는 자들 중 한 명이 습격자의 머리까지 뒤집어쓴 피풍의를 벗기자 몽골족 특유의 변발(辮髮)이 드러났다.
“워, 원! 원의 군사들이다!”
엄청난 소란이 투기장을 휩쓸었다.
강남 이남의 분위기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지금은 원의 천하이며, 한족들에게 있어 몽골인들은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카안이 거하는 대도의 주변에서는 몽골의 병사와 눈만 잘못 마주쳐도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심지어 멀쩡한 집에 군홧발로 들어와 약탈을 행해도 저항은 꿈도 못 꾼다고 하니 그 두려움은 형용할 수 없었다.
“왜? 왜 갑자기? 야투는 암묵적으로 승인해주는 게 아니었나?”
게다가 여기 있는 자들은 전원이 켕기는 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 어떻든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투기장은 엄연한 불법이며, 도박은 말할 것도 없다.
암묵적인 승인 하에 운영되는 시설이지만, 갑자기 변덕을 부리며 제재를 가하면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지상으로 나가는 입구 여덟 개도 전부 원의 병사들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수백 명의 관객은 공포에 떨며 비명만 질러댔다.
“진정하라. 무고한 카안의 백성들을 벌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허융이 목격했던 장면.
투주와 신호를 주고받았던 사내가 투기장 중앙에 내려섰다.
그는 정교하게 음각된 패를 꺼내 모두가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카안께 불순분자들을 색출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첩보대의 부대장 차우다. 야투에 역모를 획책하는 무리들이 침투했다는 보고를 받고, 오랫동안 지켜봤지. 금일을 기해 놈들을 소탕하려는 것이니 그대들은 조사에 성실히 임하라.”
“맙소사……. 여, 역모?”
영문도 모르고 조사를 받게 된 관객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까딱 잘못 엮이기만 해도 구족이 몰살당하는 게 역모의 죄다.
저들이 공정하게 판단할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방금 습격을 받은 자들 중 끝까지 억울해하던 이들이 있던 걸 분명히 봤다.
안 그래도 투기장에서 내기 도박을 하다가 현장에서 걸린 이들이었기에 불안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방금 전까지 광기에 가까운 열기로 가득 찼던 게 무색하게도, 투기장은 살얼음판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좋군.”
차우는 비명과 경악이 난무하던 것보다 이 고요함이 훨씬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손짓을 하자 삼십여 명에 이르는 원의 첩보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혐의가 확실한 자들은 방금 전의 조치로 즉결 처분했다. 남은 건 혹시 놓쳤을 놈들에 대한 조사뿐이다. 모두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꺼내고 대원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하라.”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관객들은 불안한 눈을 굴리며 줄을 맞춰 섰다.
횃불이 타는 소리만이 질식할 듯한 정적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너.”
차우가 곧 쓰러질 듯 휘청이면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철중구를 지목했다.
그는 지속된 출혈로 인해 눈을 껌뻑이면서도 차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말하쇼.”
“이런 위아래 없는 한족 새끼가 감히 부대장님께…!”
허융이 이들을 처음 봤을 때, 차우의 옆을 지키던 세 명의 사내 중 한 명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눈을 부라렸다.
첩보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간부에 해당하는 그들은 몽골 기병대에 있을 때 천인장급의 전사들이었다.
철중구의 대답이 예의가 없다고 여긴 건지 그는 다짜고짜 몽골식 만도를 꺼내 들었다.
“괜찮다. 물러나라.”
차우의 제지에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철중구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차우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정말 대단하더군. 무예는 둘째치고, 그 투지와 기백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지. 지금은 초원을 떠나 있지만, 오래 전에 난 다섯 개의 천인대를 통솔했었고, 뼛속까지 전사라 자부한다. 하여 뿌리를 막론하고 전사의 혼을 지닌 이들을 존중하지. 하여 묻겠다.”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잇던 차우가 무섭게 눈을 번뜩였다.
“왜 역모에 가담한 거냐?”
“……?!”
숨소리도 죽인 채 차우의 말에 귀 기울이던 관중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철중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엔 경악이 깃들어 있었다.
“……이건 뭔….”
하지만 가장 놀란 건 철중구였다.
야투에 몸담은 이래, 가장 기분 좋게 경기를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원의 군사들.
거기까진 좋다.
삶이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니까.
자신은 떳떳하고 흠 잡힐 일은 한 적이 없었다.
야투에 출전했다는 게 유일한 시빗거리지만, 분위기상 그걸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얼른 조사를 받고 쉬려는데 난데없이 역모라니?
이게 뭔 뜬금없는 개소리란 말인가.
어지간한 일들은 당황하지 않고 받아넘기는 철중구조차 이 순간만큼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다 이거냐? 이유야 뻔하겠지. 중원을 되찾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 그거 아닌가?”
차우의 눈빛은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당신, 아니 부대장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난 그런 거 요만큼도 관심 없소. 난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대의니 뭐니 오지랖 부려서 피곤해질 생각이 없단 말이오!”
철중구는 단언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이 순간만큼 당황한 적은 없다고.
피가 부족해서 오락가락하던 정신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명료해질 정도였다.
그만큼 역모란 단어가 주는 공포는 가공했다.
“실망스럽군. 끝까지 발뺌할 셈인가.”
“이런 시바… 아니, 젠장!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개소…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요?”
“믿을 만한 이의 제보가 있었다.”
“제보? 하! 그게 누군데?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합시다! 한쪽 말만 듣고 그런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너무한 거 아니요?”
철중구는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어진 차우의 말에 그는 표정을 풀고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 밀무역을 한다지?”
“……아, 아니, 그건…!”
너무 당연한 일상이 돼버려서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걸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빼도 박도 못 한다.
선장인 장 씨 할배를 통해 이국에서 민간 반입이 금지된 사치품을 들여와 이문을 남기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역모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장사의 지리적 특성상 상인들이나 건달패 중 그런 물건을 안 다루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고, 밀무역을 아무리 중하게 처벌한다 해도 역모에 비할 순 없었다.
철중구가 뭐라 항변하려는 찰나, 이어진 차우의 말이 그의 이성을 날려버렸다.
“장진평이라 했던가. 그 늙은 선장의 이름이? 그도 너처럼 역모를 꾀한 게 발각되어 즉결 처분했다. 이래도 계속 발뺌할 셈인가?”
“뭐… 뭐라고?”
철중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차우의 표정은 그게 아니란 걸 알려주었고, 철중구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하……. 방금 그 말, 확실하냐? 장 씨 할배가 죽었다고?”
철중구의 말투에 차우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래. 오늘 낮에 여기로 오기 전에 내가 직접 처형했지.”
“하…….”
철중구는 흐느적대며 투기장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가 그 자세 그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런 니미 씨부럴 새끼가 뒈지려고 환장을 했구나.”
차우의 옆에 있던 사내들이 광분하여 도를 뽑으며 욕을 했지만, 들리지 않는다.
철중구는 천천히 고개를 내리고 차우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야, 이 개새끼야. 첩보대의 부대장이라고 했냐? 네가 불알 두 쪽 달린 사내 새끼라면 나랑 한판 뜨자.”
완전한 침묵이 투기장을 잠식했다.
모두를 경악에 빠뜨린 남자는 이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말했다.
“아니지. 야투의 간판이자 장사 제일의 쾌남인 이 몸께서 북쪽에서 조랑말이나 타고 싸돌아다니던 오랑캐와 일대일로 싸우는 건 격이 안 맞지. 너희 네 명, 한꺼번에 덤벼라. 나 혼자 다 죽여주마.”
불꽃같은 허세였다.
그건 허세가 분명했다.
철중구의 몸이 정상이라도 백전의 전사인 차우는 그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개의치 않는다.
왜 이러는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자신을 반란분자로 낙인찍었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 않으리라.
누가 꾸민 건지는 몰라도 지독한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하긴. 두들겨 팬 놈들이 한 수레인데 앙심을 품은 놈이 있을 만하지.’
좋다. 어차피 살 수 없다면 화려하게 가리라.
투기장의 투사인 자신답게.
철중구가 관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뭘 멍하니 섰냐? 걸어.”
그건 진정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관객들이 얼빠진 얼굴로 철중구를 볼 때, 차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과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과 배짱 하나는 타고난 놈이구나. 좋다. 도박을 하는 투기장이니 장소에 맞게 어울려볼까?”
차우가 품에서 전낭을 꺼내 진행요원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돈주머니를 받은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넷이 한꺼번에 덤비라고 했나? 너 스스로도 알 것이다. 넌 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오랑캐라고도 했었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한족의 나라를 부활시키려는 너희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차우는 관객석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원자 셋을 받는다. 누구든 좋다. 이 녀석과 조를 이뤄서 우리 넷과 싸워 이긴다면 일체의 조사 없이 너희 모두를 돌려보내주마.”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설 리가 없었다.
여기서 지원한다는 건 확실하게 죽고 싶단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녀석의 투지와 분노가 보이지 않는가? 함께 죽어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이냐? 좋다! 결과가 어떻든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인원만 채운다면 모두를 돌려보내 주겠단 말이다!”
의심 가는 이들을 모두 정리한 후여서 가능한 제안이었지만, 역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당연해선 안 되는 결과를 확인한 차우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보아라. 이것이 한족의 실상이다. 이 한심하고 비열한 모습이 너희의…!”
“지원하겠어.”
정적을 깨고 한 명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투기장에 들어선 이후 여태껏 조용히 자리를 지켰던 그가 존재감을 드러내자 사방이 그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운남에서 올라온 이족의 전사.
투기장으로 내려가는 마른 비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수백 명이 주목했다.
“나도 가야겠네.”
숨을 들이마시고 표정을 다잡은 여규도 마른 비의 뒤를 따랐다.
“음…….”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어디서 저런 자가….’
태연히 걸어 내려오는 마른 비를 보며, 차우의 안색이 가볍게 굳었다.
척 봐도 상당한 자이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질 리는 없다.
무엇보다 아직도 인원이 모자랐다.
“좋다. 이제 셋. 한 명만 더 있다면 너희에 대한 조사를 거두겠지만….”
“넷이야. 인간만 야투의 출전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 맞지?”
“……그건 그렇지만, 누가….”
“별비야.”
풍경이 갈라지고, 백색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이 내린 영수가 야투의 투기장에 강림했으니, 중원을 질주할 수왕의 행보가 지금 시작되었다.
입을 쩍 벌린 수백의 인간들에게, 마른 비가 말했다.
“뭘 멍하니들 섰어?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