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짤랑! 툭.
시작은 조촐했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 있었다.
객석에 있던 한 명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마른 비가 서 있는 방향으로 전낭을 던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낭이 허공을 날았다.
짤랑! 툭.
그게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돈주머니들이 하나둘 허공을 날았고, 종국에는 수백 개의 전낭과 은자들이 마른 비와 철중구의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건 저항이었다.
싸울 힘이 없는 자들이, 지금껏 타인의 싸움을 유희삼아 저열한 욕구를 채우던 자들이 처음으로 싸움판에 뛰어들며 치켜든 주먹이었다.
비록 휘두를 힘은 없지만, 주먹을 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다분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것이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이자 자신들을 대신해 싸울 이들에 대한 응원이요, 격려였다.
“좋아.”
공기가 바뀐다.
지금껏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던 돈이, 정복자가 던진 조롱에 대한 반발의 상징으로 진화했다.
그 증거로, 관객들이 던진 돈주머니는 전부 마른 비와 철중구의 옆에 떨어져 있었다.
소리 없이 들끓는 마음을 확인한 마른 비가 환히 웃었다.
“이것들이…!”
지금 이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다.
차우의 옆에 있는 부장, 처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움찔했지만, 전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눈 돌리지 않았다.
반항적인 눈빛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재미있군.”
그 변화를 감지한 차우가 짙게 웃었다.
“처거. 못난 반응을 보이지 마라. 내가 도전을 받아들였고, 내기에 뛰어든 것도 나다. 그리고 난 약속을 지킬 것이다.”
스르릉―
도갑에서 몽골식 만도를 뽑아 든 차우가 마른 비를 겨눴다.
“약속대로 이 이상의 조사 없이 전원을 돌려 보내주마. 하지만 너희 넷, 아니, 저 짐승을 빼면 셋인가. 너희는 참수되어 목이 장사의 성문에 내걸릴 것이다. 아까 정리한 반란분자들과 함께.”
뭉클뭉클 일어나는 기세가 투기장을 뒤덮는다.
차우는 도를 관객에게 겨누며 선언했다.
“관전에 익숙한 놈들이니 어느 정도의 안목은 있겠지. 똑똑히 보아라. 대 원(大元)의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놈들을 압살하여 수준의 차이를 보여주마.”
“뭐냐, 너?”
차우가 진지한 얼굴로 선언할 때, 철중구는 기가 차다는 눈으로 마른 비를 보고 있었다.
“아까 그 꼬맹이들 아냐? 왜 끼어든 거냐. 너, 한족도 아니잖아?”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 죽게 놔두기 싫더라고.”
마른 비가 철중구를 보며 웃었다.
“……미쳤군.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까딱하면 역모 죄에 엮일 수도 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움직일 상황이 아니란….”
“당신, 누명 쓴 거지?”
마른 비의 물음에 철중구가 흥분했다.
“당연하지!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거 관심도 없다! 난 나를 위해서 움직일 뿐이야!”
“그럼 그 선장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에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야?”
철중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꾸했다.
“……그 영감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코흘리개 시절부터 날 돌봐준 사람이거든. 역모 같은 거창한 짓거릴 꾸밀 양반이 아니야. 이런, 씨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몰라도 억울하게 죽은 거라고!”
철중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댔다.
“거봐. 똑같아. 당신도 그 할아버지를 위해서 나선 거잖아. 나도 그냥 당신이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야.”
“하아? 오늘 처음 본 사이에? 너 남자 좋아하는… 뭐 그런 거냐? 이런 쒸펄, 이놈의 인기란! 미안하지만 난 그쪽 아니니까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마라.”
가만히 듣고 있던 여규가 한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확실히 이 철중구란 인간은 평범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는지 철중구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뭐, 좋아. 이유는 됐다. 고맙게 생각해. 그 배짱은 마음에 든다만,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돌아가라. 싸움이 시작되면 니들, 확실하게 죽을 거다. 나 때문에 누가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마른 비와 여규를 만류한 그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별비에게 시선을 옮겼다.
주변 대기를 일그러뜨리는 압도적인 기운.
천하의 철중구도 침만 꿀꺽 삼킬 뿐 별비에게는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네가 불러서 튀어나온 거 맞지? 저거… 네 거냐?”
“응? 내 친구야. 별비라고 해.”
“그럼 너네는 가고, 저거 좀 빌려줘라. 쟤는 좀 치겠네.”
한눈에 알겠다.
저 범은 아까 쓰러뜨린 사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뜻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저놈 하나만 있어도 한판 제대로 붙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이 다쳐서 그런가? 안목이 영 별로네?”
“뭐, 인마?”
사실 그 말이 맞다.
어질어질한 통에 주변의 기운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다.
철중구는 아직까지 마른 비와 여규의 진면목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 마. 우리가 이길 테니까. 그리고 당신이 걱정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저 사람, 약속을 지킬 거 같거든.”
자연기가 전해주는 느낌이 그렇다.
입장과 상황이 어떻든, 차우란 남자는 적어도 자신이 한 말을 뒤집을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 비아야! 안 된다! 저들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냐!』
그때, 난데없는 언령이 마른 비의 귓가를 간질였다.
눈썹을 꿈틀거린 마른 비가 객석의 한편을 바라봤다.
거기엔 어느새 나타난 가을 수리가 있었다.
‘아저씨?’
자연기가 전해주는 느낌은 여전히 좋다.
그리고 그는 매우 다급하고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의심이 들자, 마른 비로서도 이제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싸움이 끝나고 해요. 묻고 싶은 게 많아요.』
고개를 돌리며, 마른 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걱정을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는 아저씨 생각보다 강하니까요.』
“부대장님. 저 범… 예사롭지 않습니다. 초원의 술사들이 부리는 짐승처럼 자연의 기운을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처거가 차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차우 역시 신경이 쓰이는지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별비를 살피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주술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호위수(扈衛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마치 스스로의 의지로 대장로님을 지키는 ‘천’과 같아. 그리고 왠지 힘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갑자기 공간을 흩뜨리며 나타난 대호.
그것은 마치 절정에 이른 암살자들이 구사하는 은신술과 흡사했다.
그것만으로도 믿기가 힘든데 힘을 숨기고 있다?
그런 게 가능하려면 심법을 수련한 인간처럼 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차우의 말이라지만, 처거는 솔직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걱정하지 마.”
둘의 대화를 끊은 건 투기장에 난입한 청년이었다.
체격 좋은 초원의 전사들을 상회하는 육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운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그를 절대 만만하게 볼 수 없게끔 했다.
“별비는 싸우지 않을 거야. 당신들을 상대하는 건 나와 규, 둘만으로도 충분해.”
“……?!”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까?
아니면 조금 단련을 했다고 자만에 빠진 걸까.
오만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그 말에 모두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천지분간 못하는 애송이가 어디서 감히…!”
차우와 처거를 위시한 첩보대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떠올랐다.
“끄응… 역시 그렇게 가는 건가.”
수긍한 건 여규뿐이었다.
전투의 경험이 많은 자들인 건 확실하다.
자세와 기도에서 하나같이 노련함이 묻어났으니까.
허나 무공 자체가 높진 않다.
여규가 보기에 조심해야 할 건 차우라는 부대장뿐이었다.
“야, 이 뭣도 모르는 꼬맹이들아! 정신 안 차릴래? 호랑이를 앞세우고 한꺼번에…!”
철중구의 다급한 외침에, 마른 비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쉬고 있어.”
푸화학―!
마침내 드러낸 진신전력에 투기장이 요동친다.
그 막강한 기운을 감지할 능력이 되는 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아, 아니…!”
“어떻게 이런…?”
푸르게 타오르는 자연기는 운남의 야생을 극복한 증거일지니, 바로 지금, 와족의 전사가 전투에 돌입한다.
“별비야. 그 사람을 지켜.”
콰아앙!
붙기로 한 이상, 선공을 양보할 이유가 없다.
번갯불을 발동한 마른 비가 처거에게 짓쳐 들었다.
“처거! 비켜라!”
공간을 압축하는 와족의 돌진기를 받아낼 능력이 있는 자는 차우뿐이었다.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처거를 밀치며, 차우가 만도를 휘둘렀다.
쩌어어엉!
“……?!”
팔뚝에 가로막힌 도.
절단은커녕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왼팔로 차우의 공격을 받아낸 마른 비가 바위 부수기를 내뿜었다.
“카아압!”
무공의 수위는 높지 않으나 과연 전장을 경험한 자들이다.
처거는 순식간에 정신을 수습했고, 마른 비의 정권에 대응하여 만도를 수직으로 그었다.
쩌정!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수직으로 내리긋던 처거의 도는 곧바로 하늘로 되튕겨졌다.
근처에 있던 두 명의 부장이 가세하고 나서야 겨우 마른 비의 정권을 막아낼 수 있었다.
“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상쇄? 그럴 리가.
천인장급 세 명이 달라붙어서 겨우 주먹의 궤도를 틀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틈은 차우가 반격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희! 비켜라!”
부아아아악!
십칠식 참마도법.
전투마는 물론이고 말에 올라탄 기병까지 통째로 베어내기 위해 창안된 초원의 도법이다.
철저하게 힘에 치중한 그것은 일반적인 도법에 비할 수 없는 패력을 담고 있었다.
“흠. 굉장한데?”
예상을 뛰어넘는 힘에 마른 비가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지면을 갈아엎는 전상의 힘을 경험한 마른 비에게 이 정도는 큰 감흥을 줄 수 없었다.
“정면으로 붙어볼까?”
무소의 뿔.
광서우의 돌진에서 착안한 팔꿈치 공격이다.
마른 비는 전진하던 그대로 오른팔을 올려쳤고,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크흑…!”
충돌의 순간, 차우는 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두 손으로 붙잡은 도가 강풍에 휘말리듯 요동치고 있었다.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터져 나왔지만, 차우는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뭐, 뭐야? 저 새끼?”
철중구는 입을 쩍 벌린 채 마른 비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쉬라면서 혼자 들어가길래 욕을 퍼부어주려 했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번쩍- 번쩍! 하더니 혼자서 넷을 밀어붙이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이 맨몸으로 저런 싸움이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야. 저 새끼, 인간 맞아? 몸이 철로 돼 있나? 강시, 뭐 그런 거 아녀?”
철중구는 그냥 해본 말이었지만, 여규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니, 가만. 나 왜 존댓말 쓰지? 당신도 반말하니까 나도 편하게 할게. 비아, 강시 맞아.”
철중구는 기절할 듯 놀랐다.
“으엇? 씨발, 진짜로?! 어쩐지…! 저게 말이 되나! 강시가 정말 있었다니!”
“뭐래. 당연히 뻥이지. 정신 차려. 그런 게 아직도 있을 리가 있나.”
피식 웃은 여규는 검을 뽑고 마른 비에게 가세했다.
혼자 남겨진 철중구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씨부럴. 어디서 이상한 것들이 튀어나와서 정신 산만하게…. 그럼 저게 진짜 사람이라고?”
철중구의 놀람은 끝이 아니었다.
중원의 끝자락, 운남에서 올라온 두 명의 청년이 야투에 돌풍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