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96화 (196/463)

196화

“어리다고 방심하지 마라! 이자는 나보다 강하다!”

강함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동쪽의 소국에서 넘어와 초원의 전사들을 놀라게 한 귀궁(鬼弓)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눈앞에서 눈빛을 번쩍이는 청년은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차우가 경각심을 담은 외침을 토했다.

“처거! 둘을 데리고 빈틈을 쑤셔라! 내가 정면을 맡겠다!”

힘이 부친다?

전장을 누비다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들을 질리도록 접하게 된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이날 이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었을 터.

원의 군사들은 강자를 상대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천인장급 이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차아압!”

미친 듯이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람.

참마도법 육식 광풍참(狂風斬)이 광기를 토하자 마른 비의 앞에 도의 방벽이 펼쳐졌다.

“약해.”

힘으로 찍어 누르며 걸리는 걸 모조리 베어버리는 초원의 칼날도 야생을 누빈 전사에겐 한없이 가벼울 뿐이다.

마른 비가 발을 내딛자 투기장이 진동했다.

휘돈 등판이 전면을 향하고, 광범위 충격파가 내뿜어진다.

이날 이후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들 와족의 비기가 야투의 횃불 아래 타올랐다.

쩌어어엉―!

“크훅!”

버텨낸 게 용할 따름이다.

가볍게 내친 천둥바위는 초원의 도법을 찢어발겼고, 차우는 뒤로 날아가려는 몸을 고정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지금이다! 들어가!”

손아귀가 터져서 도를 놓친 차우가 절규하듯 외쳤다.

천둥바위의 충격파를 억지로 버텨낸 그는 입가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절대 질 수 없다!’

한족들 앞에서 원의 무예를 보여주겠노라 당당히 선언하지 않았나.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는 몰라도 협공까지 시도한 이상 절대 질 수 없다.

처거 역시 그 마음을 짐작한 듯 목에 핏발이 서도록 소리쳤다.

“동시에 간다! 횡참(橫斬)! 삼연격(三連擊)!”

쾌애애액―!

저토록 큰 기술을 썼다면 필연적으로 빈틈은 생기기 마련이다.

차우가 목숨을 걸고 기술을 받아냈으니 이길 수 있다!

놈은 이제 꼼짝없이 다진 고깃덩이가….

“느려.”

‘뭐, 뭐냐?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나!’

하지만 마른 비는 이미 자세를 전환한 후였다.

그리고 후속타를 뿜을 준비가 끝나 있었다.

상, 중, 하단을 노린 도가 굼벵이처럼 느려 보일 만큼 마른 비의 자세 전환은 쾌속했다.

“칼질이 너무 힘에 치중되어 있는데? 힘을 좀 빼고 속도를 올리면 좋을 텐데.”

초원의 전사들이 들었다면 광분하며 거품을 물 발언이었다.

참마도법의 창시자가 누구던가.

천하 최강의 전사이자 위대한 초원의 혼 오스트갈이 집대성한 절기가 바로 참마도법이다.

이 꼬맹이가 그분 앞에서도 저따위 망발을 지껄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털어내며, 처거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합격기는 점창에 못지않네. 근데 나 이런 거 많이 겪었거든.”

마른 비가 올빼미 사냥을 쏘아내려 할 때였다.

소리 없이 다가든 누군가가 그를 앞질렀다.

“내가 끊을게. 마무리해, 비아야.”

섬전처럼 찔러오는 쾌검.

사일검 일초식 일수초현이 빛을 뿜었다.

쩌저정!

두터운 만도 세 자루가 통째로 튕겨 나간다.

면에 분산된 힘을 정교한 일점으로 제압하니, 도에 실린 경력이 사일검의 찌르기에 흩어져 버렸다.

처거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포기해. 당신들은 우릴 이길 수 없어.”

마른 비가 차우에게 다가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은 전사의 선언이자 힘의 우위를 확신한 강자의 위압이라.

관객들은 부르르 떨며 주먹을 꽉 쥐었고, 차우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까불지 마랏!”

이번만큼은 마른 비나 여규로서도 예상치 못한 수였다.

눈앞에 있는 여규를 무시하고 반전한 처거가 마른 비의 뒤통수를 향해 도를 집어 던졌다.

초평낭아공(草坪狼牙功)을 때려 부은 만도가 풍차처럼 회전하며 날아갔고, 그 한 수는 마른 비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음?”

쩌엉!

마른 비가 등을 돌리며 도를 튕겨낸 순간.

쉬아악―!

자세를 바짝 낮춘 차우가 엄습했다.

“크아합!”

왼팔로 마른 비의 오른 다리를 휘감고 어깨를 이용해 그대로 번쩍 들어올린다.

힘의 방향 그대로 지면을 향해 내리꽂으니 초원 고유의 체술 부흐가 마른 비의 육신에 작렬했다.

콰아앙!

“흡!”

놀랄 겨를도 없다.

차우는 마른 비를 메다꽂자마자 그대로 달려들어 마른 비의 위에 올라탔다.

팔꿈치로 마른 비의 흉근과 어깨 사이를 찍어 눌러 팔의 저항력을 죽인다.

천근추(千斤錘)를 발동한 육체로 내리누르고, 강인한 악력으로 목을 옥죄니 숨이 막힌 마른 비가 컥컥댔다.

와족에는 없는 독특한 체술.

오직 인간의 숨통을 끊기 위해 고안된 조이기였다.

‘큭! 이런 기술이…!’

상반신에 올라탄 채 다리로 하반신을 압박하는 통에 움직일 수가 없다.

뾰족한 팔꿈치가 가슴과 어깨 사이의 연약한 부위를 짓눌러서 팔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저항을 위한 움직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기술.

맨손으로 적을 제압하기 위해 고안된 초원의 살상기는 가공한 구석이 있었다.

“후욱, 훅…! 어떠냐? 절대 놓치지 않는다. 넌 이대로 죽는 거야!”

기술이 완벽하게 들어갔음에도 차우는 버티는 게 버거워 보였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밀리지 않는다.

그의 눈에서 필살의 각오가 번뜩였다.

“비아야!”

“보내줄 것 같으냐? 못 간다.”

여규가 도와주려 했지만, 처거를 포함한 세 명의 부장이 막아섰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쪽에서 누가 이기느냐가 이 싸움의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걸.

이 대 사의 격돌은 마치 대장전을 보호하는 형태로 변모해 버렸다.

“큭…!”

숨이 막힌다.

자세는 압도적으로 불리하고, 차우는 기술이나 힘을 뽑아낼 수 없도록 교묘하게 압박을 가해왔다.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싸움법.

마른 비는 예상외의 기술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후욱!’

하지만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머리 굴릴 이유가 무엇인가.

마른 비는 허리에 힘을 집중시켰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아, 아니?!”

경이적인 허릿심이 차우를 하늘로 밀어 올린다.

천근추고 나발이고 더 큰 힘으로 밀어붙이면 그만 아닌가.

무식한 방법이지만 가장 확실한 파훼법이기도 했다.

“하압!”

급기야 마른 비는 허리를 튕겨 차우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대로 이어지는 역공.

송곳처럼 쏘아진 날짐승 떨구기가 차우의 명치에 꽂혔다.

“커어…!”

급격히 흐려지는 눈빛.

이걸로 싸움은 끝이….

“이렇게 끝날 것 같으냐아아!”

덥석!

놀라운 투지다.

명치를 얻어맞았으니 숨 쉬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차우는 반격에 나섰다.

명치에 꽂힌 마른 비의 다리를 붙잡고, 남은 내력을 긁어모아 주먹에 담는다.

허공에서 피를 뿜으며 울부짖는 차우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마른 비다.

운남의 흉포한 맹수들을 굴복시킨 그가 이 정도 모습에 위축될 리 없었다.

“적당히 해. 적당히.”

빠악!

휘돌려 찬 다리가 차우의 의식을 끊었다.

마른 비는 줄 끊어진 연처럼 추락하는 그를 낚아채서 사뿐하게 착지했다.

“부, 부대장님…!”

상황이 바뀌었다.

이번엔 처거와 두 명의 부장이 마른 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여규가 막아섰다.

“보내줄 것 같아? 못 가.”

“비켜라! 이노옴!”

초원의 도가 몸부림을 쳤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일검이 경쾌한 궤적을 긋고, 몸통이 꿰뚫린 셋이 일시에 무릎을 꿇었다.

제아무리 백전의 전사라 해도 마음이 흔들린 이상 점창의 기재를 이길 순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은 여규의 상대가 아니었다.

쿵! 쿵!

발 구름.

누가 시작한 지 모를 발 구름이 투기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소리는 급격히 불어났고, 곧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투기장을 흔들었다.

쿵! 쿵! 쿵! 쿵!

객석 곳곳에 아직 삼십 명에 가까운 첩보대가 있음에도 관객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을 대신하여 싸워준 젊은 영웅들에게 격정적인 환호를 선사할 뿐이다.

급기야 용감한 누군가가 입을 열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영웅! 당신들은 이 야투의 영웅이오! 우리가, 아니, 역사가 당신들을 기억할 것이오!”

일확천금의 꿈과 피가 튀는 잔혹함을 갈망하며 광기에 젖었던 이들이다.

안전한 객석에서 타인이 벌이는 살육으로 저열한 욕망을 채우던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지금은 마치 각성한 듯 또렷한 눈빛으로 마른 비와 여규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들의 영웅이 되길 거부했다.

“웃기지 마. 누가 당신들이 기억해주길 바란대?”

그 한마디에 들불처럼 일어나던 환호가 그쳤다.

“영웅? 야투는 물론이고 당신들의 영웅이 되는 건 더더욱 원치 않아. 이 정신 나간 살육의 장에서 당신들의 눈요깃거리가 된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분위기는 이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해졌다.

마른 비는 수백 명의 관객을 천천히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들의 역겨움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죽어가는 청년의 사지를 자르라고 소리 지르는걸. 누구도 말리지 않고 맛이 간 눈으로 거기에 동조하는걸. 당신들이 사람이야?”

군중심리란 묘하다.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 멋대로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가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한순간에 돌아서 버린다.

자신들에게 가해진 비판이 온당할지라도, 아니, 진실을 건드리는 비난일수록 더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몇몇은 마른 비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대다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은 방금 전까지 도덕, 윤리 따위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자들이란 점이었다.

“싸가지 없는 놈이 치켜세워주니 기고만장해서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야만인 새끼길래 감히 우리에게 망발을…!”

“내려와.”

“뭐, 뭐라고?”

마른 비는 흥분하여 막말을 내뱉는 관객을 조용히 노려봤다.

“내려오라고. 안전한 곳에서 지껄이지 말고 여기로 내려와서 떠들어봐. 당신이 야유를 보내고 조롱하던 투사들처럼. 그럴 배짱 없어?”

“내, 내가 왜 거길…!”

“그럼 닥쳐.”

관객은 상제의 명이라도 들은 듯 고분고분하게 닥쳤다.

물론 얼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처음에 서 있던 자리로 걸어간 마른 비가 땅에 떨어진 전낭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게 우리가 우리한테 걸었던 돈이야. 출전자들한테는 따로 수당 같은 것도 지급되겠지? 그게 엄청나다면서? 대충 계산해서 우리 몫을 그간 야투에서 폐인이 된 사람들에게 나눠 줘. 죽은 자가 있다면 그의 유족에게라도. 괜찮지, 규야?”

“물론이지. 도박으로 번 돈을 가장 흡족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이네. 찬성!”

마른 비가 배당금과 출전료의 용도를 정하고 있을 때, 내빈석에 앉은 누군가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오?」

그건 삼십여 명의 사내들에게만 전달된 광범위 전음이었고, 우두머리가 쓰러진 이후 당황하고 있던 사내들은 흠칫하며 얼굴을 굳혔다.

「부대장께서 놔주기로 한 건 관객들이오. 저들은 참수하여 목을 내건다 했었지. 방금 전의 반응으로 철중구가 역모를 꾀했음은 명백해졌소. 그대들의 수장을 해한 자들을 저대로 살려 보낼 셈인가?」

노골적인 부추김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효과적이었다.

첩보대원 중 한 명이 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자, 그게 신호탄이 되어 여기저기서 칼이 뽑혀 나왔다.

그 갑작스런 변화에 관객들이 움찔했을 때, 첩보대원 중 누군가가 외쳤다.

“더러운 놈들에게 욕보이고도 그냥 넘어갈 참인가! 역적들을 참하고, 부대장님과 부장님들을 구하라!”

동조는 한순간이었다.

객석에서 대기 중이던 원의 첩보대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전음을 보냈던 사내가 가면 뒤에서 작게 웃을 때, 마른 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별비야. 쓸어버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