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97화 (197/463)

197화

기운이 일어난다.

대자연의 순정한 기를 간직한 야수가 진면목을 드러내니 투기장 전체에 야생의 살기가 들어찼다.

마른 비에게 달려들던 원 첩보대의 고개가 돌아가고, 그들의 육신이 포승줄에 묶인 죄인처럼 속박됐다.

“크허허허헝!”

이것이 먹이사슬 정점에 군림하는 맹수의 포효다.

항거 불가능한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동물처럼.

육신이 마비된 원의 군사들은 눈을 부릅뜬 채 속절없이 추락했다.

“크아앙!”

새하얀 질풍이 투기장을 휩쓴다.

별비의 육신이 허공을 가로지르자 피의 폭죽이 연달아 터졌다.

인간의 몸은 맹수의 공격을 받아낼 수 없으며, 그것이 별비의 발톱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남쪽 대지에서 올라온 새하얀 범이 중원에 등장한 순간이며, 와족 반려수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무림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순간이기도 했다.

“이런 씨박…!”

입을 쩍 벌린 철중구가 욕설을 흘렸다.

감탄이 분명한 그것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중원에서 사방신의 하나로 신성시되는 백호.

하늘이 내린 영수의 힘에 관객들은 말을 잃었고, 몇몇은 무릎을 꿇으며 기도를 올렸다.

“아, 안 돼…!”

투기장 바닥에 주저앉은 처거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실성한 것처럼 중얼댔다.

사일검이 몸에 구멍을 냈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마른 비가 그랬듯 여규 또한 목숨을 앗아갈 급소는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동고동락한 전우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는 광경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테니까.

촤아악―!

육편 섞인 핏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너무나 끔찍해서 꿈같은 광경은 안 그래도 가물가물한 처거의 의식을 끊기에 충분했다.

큰 충격을 받은 처거는 흐느적대다가 피를 뒤집어쓴 채로 기절했다.

“음…….”

마른 비가 진득하게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신음했다.

약속을 어기고 달려든 자들.

마땅한 응징이지만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인간이 죽어 나가도 마음이 깎이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그게 살인귀가 됐다는 징조이리라.

절대 맞이하고 싶지 않고, 평생토록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마른 비가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였어. 방금 이 사람들이 달려들기 전에 저쪽에서….”

공기를 타고 전해진 미약한 진동.

중원의 무인들이 전음이라고 부르는 기술을 시전했을 때의 현상이다.

마른 비가 파동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내빈석을 올려다봤다.

“히이익!”

“끄, 끔찍하군…….”

별비가 만들어낸 혈우(血雨)는 잔인한 광경에 익숙한 야투의 관객조차 기겁하게 했다.

별비의 위용에 놀랐던 이들은 투기장에 고인 피 웅덩이에 침음했고, 맹수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청년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자 관객의 눈길도 그곳으로 향했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닿은 곳엔 가면을 쓴 남자가 허융의 목을 붙잡고 서 있었다.

“허융. 왜 그랬나?”

야투의 주인.

검은색 바탕에 백색의 뱀이 수놓인 가면을 쓴 투주가 천천히 말했다.

마치 모두의 눈길이 모이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커억…! 투주님! 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 제가 뭘 어쨌다고….”

목을 붙잡힌 허융이 숨이 막혀서 컥컥대며 물었다.

허공에 딸려 올라간 그는 투주의 손에 매달린 채 버둥대고 있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허융, 네가 철 대협을 쳐내기 위해 악교익을 불러들였다는걸?”

투주의 말을 들은 모두의 눈이 커졌다.

악교익이 자진해서 야투에 출전한 게 아니었나?

처음부터 철중구를 노리고 온 거라고?

……왜?

모두가 당황했지만, 이 순간 가장 어이가 없는 건 허융이었다.

“그, 그건…!”

미리 보고한 사안이 아니었던가.

왜 지금 모르는 척 이 말을 꺼내는 거지?

허융이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투주가 말했다.

“철 대협. 이자가 대협에게 쉬운 상대를 붙여주는 대가로 돈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고 들었소. 대협은 거절했고. 맞소이까?”

“으, 응? 어… 그런 적이 있긴 한데….”

어안이 벙벙한 철중구가 얼떨결에 대꾸했다.

그리고 야투의 관객은 분노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허융, 저 새끼가 중구한테 붙어먹으려 했다고?”

“가만. 결국 그거 승부 조작을 시도했다는 말 아냐?”

허융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레 야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관객들의 분노가 끓어 넘치기 직전, 투주는 절묘하게 흐름을 끊었다.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보고를 얼마 전에 들었소. 야투가 유명해진 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기가 날 것 그대로 성사되고, 승부 조작 같은 추잡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소이까?”

관객은 흥분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 어떻든 그렇게 믿는 자들은 많았고,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투주는 세간의 의심을 불식시키고 그렇게 믿겨지도록 운영해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데 이놈은 관리자란 직책을 이용해 철 대협에게 더러운 제안을 건넸소. 본인은 그걸 포착했고, 응징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지. 그런데 당시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철 대협과 허융의 뒤를 캐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소이다.”

모두의 궁금증을 끌어올릴 만큼의 시간차를 두고, 투주가 말했다.

“철 대협, 아니, 철중구 저자가 원 황실을 전복시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말이오. 그리고 저자와 손잡은 역적들이 야투에 침입했다는 것도. 난 그걸 두고 볼 수 없었소이다. 그래서 놈들을 일망타진하고, 야투를 정상화하기 위해 황실에 제보하기에 이르렀소.”

“…….”

너무 갑작스럽게 많은 내용이 쏟아져서 따라잡기가 힘들다.

머리가 복잡해진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야. 그러니까 허융 저 새끼가 중구를 쳐내고 입맛대로 승부를 조작하기 위해 악교익과 짰다?”

“첩보대의 말대로 중구가 역모를 꾀한 건 사실이란 거네?”

“투주가 그걸 알게 돼서 원 황실에 알린 거고.”

“시발, 뭐가 이렇게 복잡해?”

사람들은 거인의 손에 붙들려 어지럽게 휘둘린 느낌이었다.

자신들은 도박을 하러 왔고, 철중구가 악교익을 쓰러뜨릴 때만 해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야투 그대로였다.

한데 난데없이 원의 첩보대가 출현했고, 철중구를 역적으로 지목했다.

조사를 받으라고 했을 때는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부대장이란 자가 한족을 멸시하는 어조로 떠들자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하지만 대드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처음 보는 청년들이 싸움을 자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섬으로써 싸움의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안전이 확보되자 오랑캐가 던진 조롱에 대한 반발이 치밀었고, 마치 자신이 독립투사라도 된 듯한 기분에 젖어 청년들을 응원했다.

기대도 안 한 승리를 맛봤고, 심지어 돈까지 벌게 되자 미친 듯이 열광했다.

그 이후 투주에게 듣게 된 사건의 전말.

관객의 태도가 돌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중구 저놈, 그렇게 안 봤는데 허황된 꿈을 꾸는 놈이었구만?”

“껄렁대며 시장바닥을 돌아다닐 때부터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지. 생각해보면 저 새끼 때문에 원의 군사들이 여기까지 온 거잖아? 하마터면 우리도 엮일 뻔했고.”

“중간에 끼어든 놈들도 전부 한패겠구먼! 그럼 그렇지,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위험을 자초하겠어?”

“저놈들은 됐어! 난 허융 저 새끼가 제일 마음에 안 들어! 어이, 투주! 내가 돈을 잃은 경기 중에 저놈이 조작한 판이 없나 확인해달라고!”

관객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아우성을 쳤다.

원의 군사들이 건재할 땐 찍소리도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극적인 변화였다.

마른 비와 여규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철중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투주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내 뒷조사를 했다고? 그럼 아니라는 걸 뻔히 알 텐데……. 허융, 저 새끼는 왜 날 노리고 악교익을 불러들인 건데? 아니, 잠깐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투주 저놈이 황실에 제보를 했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철중구는 분노했다.

투주 때문에 장씨 영감이 죽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 투주 이 개새끼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철중구의 항의는 관객의 고함에 묻혀서 들리지도 않았다.

몸이 엉망이지만 않았다면 당장 투주에게 달려들었으리라.

그는 곧 쓰러질 듯 비척대면서도 살기 어린 눈으로 투주를 노려봤다.

“아직 모르겠어? 당신, 이용당한 거야. 뭘 노리고 이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규가 철중구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마른 비도 어느새 그의 옆에 서서 투주를 바라봤다.

“확실해. 저 사람이 아까 원의 군사들을 부추긴 거야. 동시에 여럿에게 말을 건네서 느낄 수 있었어.”

철중구는 마른 비와 여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투기장을 둘러보며 외쳤다.

“야, 이 시러베 잡놈들아! 조용히 안 해? 내 말이 안 들리잖아! 일단 허융 저 새끼부터 조져서 실토하게 만들면…!”

우두둑.

그 순간, 투주에게 잡혀 있던 허융의 목이 꺾이며 무너져 내렸다.

철중구의 눈이 커다래지고, 객석이 조용해졌다.

‘투, 투주 이 새끼! 날 이용해서…!’

허융이 죽어가며 원통해 했지만, 투주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비릿한 미소를 가면 뒤에 감춘 남자가 관객을 훑었다.

“나 또한 한의 백성이오. 오랑캐에게 짓밟힌 중원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지만, 어쩌겠소이까. 지금은 원의 천하인 것을. 황실에 반기를 든 역적을 놔두면 자칫 우리의 터전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할 것이오. 우리의 가족과 동포가 참살당할 가능성을 두고 보겠소이까?”

투주가 이토록 달변가였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

평소 말 한마디 듣기가 힘들어서 쩔쩔매던 허융이 알았다면 가슴을 칠 노릇이었다.

그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열변을 토했고, 관객을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원 황실의 복수를 떠올리자 가슴이 서늘해진 관객이 마른 비 일행을 잡아 죽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았소. 투기장의 주인으로서 야투를 찾은 이들의 의지를 받들 의무가 있겠지. 이건 야투를 더럽힌 놈들에 대한 징계이자 소란을 피운 대가로 바치는 무료 경기요.”

가면 뒤에서 웃고 있는 게 분명한 투주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객석 곳곳에서 가면을 쓴 자들이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그는 깜짝 놀라서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관객의 반응을 한껏 즐긴 뒤에 말했다.

“네 명. 아니, 세 명과 한 마리군. 오늘 밤, 투기장에 돌풍을 일으킨 투사들과 야투의 전 병력. 안목 있는 손님들께선 어느 쪽에 거시겠소이까?”

“이… 이 씨부럴 새끼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철중구가 분개하는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투주가 명령했다.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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