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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98화 (198/463)

198화

투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객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야투의 무인들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여러 번 접어서 품에 안은 그것은 촘촘하게 짠 그물이었는데, 그 형태가 물고기를 낚을 때 쓰는 어망과 흡사했다.

그리고 내공을 다루는 무인들이 낑낑대는 걸로 보아 무게가 상당한 듯했다.

“준비하라!”

아까 들었던 목소리.

경기를 성사시키고 관객의 분위기를 유도하던 진행자였다.

과장되고 경박하기까지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휘자로서의 엄격함이 묻어난다.

철중구를 사자와 싸움 붙였던 그가 가면 뒤에서 눈을 빛냈다.

“투망(投網)!”

촤라라라락!

강에 인접한 지리적 특성 때문일까?

숙련자가 아니면 다루기 힘들다는 그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풀려나온다.

본업이 어부라도 되는 건지 야투의 무인들은 투망질에 대단히 능숙했다.

그리고 투기장 전체를 덮을 듯 쏟아지는 수십 개의 그물은 척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횃불을 받은 날줄과 씨줄이 잘 벼린 칼날처럼 번쩍이고 있었으니까.

“설마 저거… 살망(殺網)?! 조심해라! 그물 하나하나가 면도날이나 다름없어! 만지기만 해도 베인다!”

그물의 정체를 깨달은 철중구가 마른 비와 여규에게 외쳤다.

강남 이남에서 한때 유행했던 기문병기.

철로 짠 그물은 엄청나게 무거운 데다가 한 번 던지고 나면 회수가 힘들어서 금방 사장되어 버렸다.

하지만 제대로 몰아넣고 펼치면 인간을 잡는 데 더없이 유용한 병기였다.

생포도 가능하지만, 힘을 주어 그물을 조일 경우 인간을 산 채로 토막 내는 잔혹성 때문에 사파에서나 사용하던 물건이기도 했다.

“아직도 이걸 쓰는 놈들이 있다니!”

“여기 구조와 어울리긴 하네.”

철중구의 놀라움 섞인 불평에 대꾸하며, 마른 비가 뼈창을 준비했다.

“잠깐. 내가 할게. 비아야.”

우우우웅―

내공이 끓어오르고, 진기가 검 끝에 응집된다.

빛을 비껴내는 어둠의 엄습.

파괴력에 집중한 찌르기 일식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촤아아악―! 쾅!

사일검 삼초식 사양무광은 중첩된 그물을 직선으로 찢었고, 중간쯤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내공을 터뜨리는 지점까지 자유로이 조절하는 걸로 보아 완연한 숙련의 경지였지만, 결과는 여규의 의도대로 흐르진 않았다.

“안 밀려?!”

사양무광의 폭발과 후폭풍으로 살망을 흩어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철로 짠 그물은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튼튼했다.

게다가 내공이 주입돼 있어 웬만한 힘으로는 밀어내는 게 불가능했다.

야투의 무인들이 그물에 연결된 끈을 잡아당기자 살망은 찢어진 틈을 메우며 바짝 조여들었고, 어느새 마른 비와 여규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별비야!”

“크하앙!”

청년과 백호가 날아올랐다.

살망을 향해 맨몸으로 돌진하는 마른 비를 보고 철중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 어?! 잠깐, 야 이 미친…!”

내공이 주입된 철그물?

그게 어쨌단 말이냐.

생각보다 튼튼하지만 그래 봤자 그물이고, 여규의 일격으로 구멍이 난 상태다.

마른 비가 찢어진 틈의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자연기를 둘러친 별비가 우측으로 날아오르니, 겹겹이 중첩된 그물들이 좌우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별비야! 당겨!”

교룡갑.

대망의 외피를 모방한 육체를 살망 따위가 침범할 수 있을 리 없다.

우지직―! 소리와 함께 철그물이 줄줄이 찢겨 나갔다.

“뭐 저런 괴물이….”

철중구가 얼빠진 표정으로 마른 비를 올려다볼 때,

슈아아악!

하늘에서 십여 개의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

검은 바탕에 흰 뱀이 그려진 가면.

야투의 무인들이 살망을 뚫고 나온 마른 비를 기다렸다는 듯 급습했다.

허공에 뜬 순간을 노린 한 수.

마른 비는 머리 위에서 떨어진 십여 자루의 검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쩌저저정―!

“……!”

하지만 놀란 건 야투의 무인들이었다.

양팔을 교차하여 머리 위에 올리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마른 비가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기 때문이다.

검기가 주입된 십여 개의 검날이 인간의 맨몸을 가르지 못한 채 멈췄다.

마른 비가 평온한 얼굴로 가면 안에서 흔들리는 눈들을 둘러봤다.

“이게 전부야?”

“……!”

심지어 밀리지도 않는다.

살망을 찢고 십여 명의 공격을 받아냈는데도 첫 도약만으로 여전히 솟구치고 있다.

위에서 검을 내리찍은 야투의 무인들이 한 명에게 밀려서 도로 하늘로 딸려 올라가는 모습은 혀를 내두를 만한 광경이었다.

“너희는 안 봐줘.”

휘아아악―

지하 투기장의 공기가 마른 비에게 빨려든다.

점창과의 전쟁에서 터득한 회전의 묘가 지금 발휘되니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돌개바람이 넋을 놓은 공격자들의 육신을 난자했다.

퍼버버버벅!

권(拳), 각(脚), 지(指), 슬(膝), 주(肘).

마치 돌풍이 몰아치는 듯한 체술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현란한 기예가 야투의 한복판에 작렬하자 싸움 구경에 평생을 할애한 자들조차 넋을 놓을 뿐이었다.

“끄윽…!”

“컥!”

짤막한 신음성을 남긴 채 사방팔방으로 날아간 적들이 투기장 곳곳에 처박혔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마른 비의 무력에 공격을 지휘하는 야투 진행자의 어깨가 꿈틀댔다.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검을 뽑았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내가 직접 상대한다! 입구를 막는 인원을 제외한 전원은 나를 보좌…!”

“누구 마음대로?”

퀴아아아악―!

솜털까지 곤두세우는 파공성.

극한의 속(速)과 예(銳)를 추구하는 검이 빛을 뿜으니 점창의 차세대를 견인할 재능이 이곳에 있었다.

일수초현, 후예만궁, 구곡전척…!

숙련의 경지에 이른 사일검은 찌르기 외의 검술 따윈 필요치 않다는 듯 그 하나만으로 검의 모든 묘용을 구현해냈다.

기습을 받고 정신없이 뒤로 밀리던 야투의 진행자가 여규의 빈틈을 포착했을 때, 허공에서 대호의 발톱이 떨어져 내렸다.

‘크흑…!’

입을 열 시간도 없다.

그는 온몸을 옆으로 던져서 가까스로 무지막지한 앞발을 흘릴 수 있었다.

콰아아앙!

돌로 된 객석이 통째로 터져 나간다.

사색이 된 진행자가 가면 뒤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홀연히 나타난 백호를 바라봤다.

“응? 왜 나한테 온 거야? 내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여규가 앞에 버티고 선 별비에게 물었다.

별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느낌으로 그게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을 헤아린 거라는 걸 깨달은 여규가 작게 웃었다.

“흐음. 별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저 사람의 힘이 정확히 가늠이 안 됐는데 나보다 강한가 보네. 고마워.”

‘……아깝군.’

별비의 공격을 피하고 정신을 추스른 진행자가 입맛을 다셨다.

자신에게 덤벼든 청년은 악교익만큼이나 강했다.

아니, 놀랍게도 검이 변화를 보이는 순간순간엔 그 이상의 경지가 엿보일 정도였다.

저잣거리에서 대충 구입한 옷과 난생처음 보는 독특한 검술.

사문은 짐작하기 힘들지만, 정대한 기도와 맑은 분위기에서 명문 정파의 제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십중팔구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중의 하나일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약관도 안 된 것 같은데 악교익을 능가하는 힘이라니……. 정파 녀석들은 어떻게 이런 놈들을 꾸역꾸역 배출한단 말이냐!’

거목이 될 싹이다.

크기 전에 잘라두어야 하는데 괴수가 끼어들어 일을 망쳤다.

심지어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저 위에서 날뛰고 있었다.

‘철중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놈까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의 무공이 상상 이상이야. 장사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중원 무림의 저력을 깨닫게 된다. 내부 정리를 서두르지 않으면 교(敎)의 중원 진출은 요원해질 거야.’

진행자가 가면 뒤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 움직여서 놈들을 제거하고 싶지만, 새하얀 거수는 자신의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섣불리 발을 떼면 그 순간 두 토막이 나리라.

그는 침음을 삼키며 백호가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앗!”

퍽! 뻐벅! 빠가가각!

별비와 여규가 진행자를 막고 있는 사이, 마른 비는 객석에서 나타난 야투의 병력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수십에 이르는 인원이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들지만, 허공에 뜬 청년 한 명을 추락시키지 못한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발차기는 여름철에 내리붓는 소낙비를 닮았으니, 사방에서 날아오른 적들이 철퇴 같은 다리에 얻어맞고 투기장 곳곳에 처박혔다.

살망을 찢고 솟아오른 이래로 마른 비는 땅 한 번 밟지 않고 허공에 머물며 적들을 격추시켰다.

달려드는 야투의 무인들이 그의 발판이자 도약을 위한 디딤돌로 보일 지경이었다.

“허! 뭐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다 있지? 어디서 올라온 촌놈이야? 까맣게 탄 걸 보면 저 아래 있다는 밀림 쪽인가?”

철중구는 아예 철퍼덕 주저앉아서 마른 비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구경꾼들의 경탄을 자아냈던 주인공이자 투사에서, 관전자로 전락한 기분은 묘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보다 강하고 화려한 싸움을 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아니지. 강하긴 뭘 강해. 그건 모르는 거 아녀? 붙어봐야 알지.”

싸움 하나로 살아온 철중구가 싸우지도 않고 투지가 꺾인 걸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혀를 차며 감탄하고 있을 때,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쐐액―!

“어이쿠! 뭐야, 시발!”

동물적인 감각으로 살기를 감지하고 땅바닥을 구른 철중구가 몸을 일으켰다.

악교익과 싸운 부상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머물던 자리에 날카로운 비수가 박힌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후레달 놈의 새끼가 비열하게 암습을…!”

존재하지도 않는 욕을 창조한 그가 움찔했다.

마른 비와 여규가 기절시킨 원 첩보대의 수장들.

차우와 처거를 포함한 네 명의 목에 칼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이거?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망연자실한 철중구가 중얼거릴 때, 그가 감지할 수 없는 전음이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사지환. 너의 능력으로 이들을 제압하는 건 어려울 것 같구나.」

야투의 진행자, 사지환이라 불린 사내가 투주의 전음에 응답했다.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투주님. 다른 놈들은 모르겠지만, 대호와 저 위에서 날뛰고 있는 놈은 저 혼자선 어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난감하군. 여기서 내가 힘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인데.」

잠시 정적이 흐르고, 투주의 전음이 이어졌다.

「내보내라.」

「네? ……투주님. 관객이 보고 있고, 철중구가 살아 있는데 놈들을 그냥 놔주는 건….」

「놓아줄 리가 있겠느냐. 장원에 배치한 야전단(夜戰團)으로 놈들을 끝장낸다. 야투에 숨어든 세작들과 원의 첩보대가 전멸했으니 문제 될 건 없겠지.」

사지환이 가면 뒤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고, 침통한 전음이 뒤따랐다.

「제가 부족하여 이런 상황을……. 죄송합니다, 투주님. 명 받들겠습니다.」

사지환은 슬쩍 별비의 눈치를 보고 가면을 고쳐 썼다.

가면 뒤의 일그러진 얼굴과 달리 쾌활하고 익살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이런! 과연 야투를 떠들썩하게 만든 투사들답군요. 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사지환이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뭐야, 이게 야투의 전력이야?’ 하고 실망한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요. 지금까진 몸 풀기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 야투의 진정한 힘을 보여드리죠!”

그그그긍―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

불길한 금속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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